[한경 머니=정채희 기자 I 참고 자료 국민권익위원회·제일기획]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구를 ‘톡’ 건드리자, 가치소비가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세상을 밝히는 착한소비 트렌드.
#. “후원했어요.” 직장인 정소영(30) 씨는 텀블러와 배지를 구매하고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 같은 말을 남긴다. 돈을 내고 물품을 구매했는데 ‘샀다’거나 ‘구매했다’는 말이 아니라 ‘후원했다’는 말을 쓴다.
#. “제가 무엇을 생산했든 당연히 수익금의 일부를 ‘기부’했을 거예요.” 비건 패션 브랜드 낫아워스는 매 프로젝트마다 수익금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한다. 신하나 낫아워스 공동 대표는 “브랜드를 시작할 때부터 수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자고 이야기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고 말한다.
#. “사회문제 해결의 미션을 품고 혁신적인 기업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에 투자해요.” IFK임팩트금융을 이끄는 이종수 대표는 민간의 재원을 조성해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기업들에 자원을 투자하는 일을 한다. 기존 금융과 구별되는 혁신적인 금융 솔루션이 그의 목표다.
시대가 변하고, 생활상과 가치관이 변하고 있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가격 대비 성능을 강조하는 ‘가성비’가 소비 트렌드로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에는 금액에 관계없이 심리적 만족을 추구하는 ‘가심비(가격 대비 심리적 만족도)’가 중요해지고 있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기 위한 에코백 구입,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화장품 소비, 장애인 고용 기업의 제품 구매 등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를 지닌 제품은 가격이 비싸도 기꺼이 소비하는 이른바 ‘가치소비’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소비에서 생산으로, 더 많은 소비는 또 투자로
가치소비란 본인이 가치를 부여하거나 만족도가 높은 분야에는 과감히 소비하는 대신 그렇지 않은 영역에서는 합리적인 소비를 하는 성향을 말한다. 이러한 가치소비는 개인의 가치관에서 비롯되는 만큼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진다.
사회적 기업의 제품 또는 기부 등의 좋은 의미를 가진 제품을 구매하는 ‘착한소비’, 평소 좋아하는 스타나 게임, 스포츠 등과 관련한 제품을 구매하는 ‘굿즈소비’, 가격이 비싸더라도 안전성과 신뢰성이 높은 제품을 구매하는 ‘위안소비(비용)’, 돈을 탕진할 때까지 제품 또는 먹거리 등을 가리지 않고 구매하는 ‘탕진소비’, 스트레스를 받아 홧김에 제품 또는 서비스를 구매하는 ‘시발비용’ 등 개인의 신념과 가치를 소비 활동에서 실천하는 일상의 모든 소비가 ‘가치소비’로 여겨진다.
그중에서도 ‘착한소비’는 가치소비의 대표 주자다. 빅데이터 트렌드를 보여주는 소셜매트릭스에 따르면 ‘착한소비’를 지칭하는 키워드 언급량은 2015년 8만8393건에서 2018년 19만6624건으로 지난 4년간 꾸준히 증가세를 보이며 무려 122.4% 증가했다.
윤리적 소비로 잘 알려진 착한소비는 공정무역 등으로 10여 년 전부터 이미 사회에 환기돼 온 문제다. 그러나 최근 유행하는 착한소비는 소비 문화의 중심축이 된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 사이에 태어난 세대)와 Z세대(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 태어난 세대)를 만나면서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며 산업의 판도를 바꿔 놓고 있다.
이들은 해당 상품이 나온 배경과 상품이 출시된 이후 끼칠 미래의 영향을 내다보는 등 생산자와 상품의 이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기꺼이 무형 가치에 비용을 얹어 부담한다.
셀프 서베이 플랫폼인 틸리언프로가 만 20세 이상~만 59세 이하 소비자 1739명에게 착한소비와 관련한 설문을 진행한 결과, 10명 중 6명이 가격이 10% 더 비싸더라도 착한소비를 할 수 있는 제품을 선택하겠다고 응답했다. 같은 가격일 때는 평균 70%의 응답자가 착한소비를 할 것이라고 했으며, 가격이 10% 상승했을 경우는 평균 60%의 사람들이 사회를 더 이롭게 하는 제품을 구매할 것이라고 답했다.
같은 제품을 더 비싼 값에 사는 것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합리적 소비’에 비추면 어리석은 소비일지 모른다. 그러나 가치소비를 추구하는 이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한다’는 사회적 통념을 깨고 사회를 보다 이롭게 하는 제품에 가격 더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보다 더한 선택지를 택하는 ‘바보’ 소비자도 있으니.
이를테면 제품 값으로는 2개의 비용을 지불하고도 하나는 취약계층에 기부하거나, 물건을 받지 않고도 단순히 ‘후원’ 목적으로 상품을 구매하거나, 물건 값에 추가로 후원금을 얹어 구매하는 식이다.
이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상품과 서비스에는 아낌없이 투자하지만, 이에 반하는 기업의 제품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불매운동을 벌인다. 소비자 반응에 따라 장단기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일부 소비재 기업이 착한소비 운동을 주시하는 이유다.
실제 소비자들은 올해 초 롱패딩 구매 시에 동물의 깃털을 가학적으로 채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증하는 ‘RDS(Responsible Down Standard)’ 인증마크를 중요한 사전점검 요소로 선택했다. 소비자들은 RDS 인증 다운을 사용한 브랜드의 이름을 온라인에 게시했고, 나머지 브랜드들은 대중의 선택지에서 제외됐다.
스타벅스는 환경오염의 주범인 플라스틱 빨대를 퇴출하고 종이 빨대를 선보였으며, 서브웨이는 샌드위치 하나를 사면 하나를 초록우산어린이재단에 기부하는 행사를 진행했다. 이런 마케팅을 코즈 마케팅(cause marketing)이라고 하는데, 소비자는 물건을 구매하면서 기부를 하고, 기업 입장에서는 제품을 판매하면서 기업 이미지를 제고해 공유 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방법이다.
코즈 마케팅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또 1인 생산자로 점점 그 진입장벽이 낮아지는 추세다.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소비자에서 머무는 것에서 족하지 않고, 자신의 가치에 부합하는 상품을 만들어 파는 생산자로 진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텀블벅이나 와디즈, 카카오메이커스나 아이디어스 등 크라우드펀딩(선주문 후결제 방식) 플랫폼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생산자(창작자)들이 일반 대학생이나 직장인들이라는 점은 가치소비 생태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와디즈에서 목표액의 1196%를 달성한 팀 '민간잉'의 프로젝트는 국가유공자에게 감사함을 전하기 위한 것으로, 동네 소꿉친구 4명이 군 제대 후 만들었다. 텀블벅에서 펀딩 시작 17시간 만에 목표액의 100%를 달성한 유기동물 쉼터 '포해피니스'는 유기견 봉사를 다닌 일반인들로 구성돼 있다. 가치소비의 대표적인 사례다.
이들에게 순이익 일부를 기부하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생산자는 사회의 일부로서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인식이 뿌리 박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많은 돈을 벌지 않아도 후원에 인색하지 않다.
깨어 있는 소비자, 생산자가 늘면서 이들을 뒷받침하는 투자생태계도 변화하고 있다. ‘소비→투자→ 생산→소비’의 선순환 구조에 맞춰 착한 기업과 프로젝트를 발굴해 재원을 공급하는 ‘임팩트금융’, 이른바 착한 투자에 대한 관심이 점점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존의 임팩트투자자뿐 아니라 영리 부문의 투자자들도 적극적으로 시장에 재원을 공급함으로써 임팩트투자의 생태계를 넓히는 데 일조한다.
착한 투자라고 해서 성과가 별 볼일 없는 것은 아니다. 임팩트금융의 역사는 그리 길지 않지만, 지난 10여 년간 빠르게 성장하면서 오는 2020년에는 그 규모가 전 세계적으로 400조 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종수 IFK임팩트금융 대표는 “이러한 재무적 성과가 기존의 상업금융에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것이다”라고 강조한다.
미닝아웃 시대, 착한소비의 지속가능성
소비자들의 가치소비를 추구하는 경향은 갈수록 더 깊어질 전망이다. 개인이 정치적·사회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길 주저하지 않는 ‘미닝아웃(meaning-out)’ 세대들은 값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소비가 작게나마 지역사회에 공헌하거나 삶의 질 향상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교수는 “밀레니얼과 Z세대의 소비자에게 과거의 브랜드 파워는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며 “윤리적인 소비 혹은 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써 소비를 선호하는 그들에게는 분명한 이유와 명분을 제공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상품이 아니라 신념을 사는 소비자, 신념을 파는 생산자, 신념에 투자하는 투자자. 가치소비는 이제 우리 시대의 하위문화가 아니다. 지속가능성을 위한 거스를 수 없는 대세, 가치소비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은 어떨까.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4호(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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