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 = 강보라 연세대 커뮤니케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나만 잘되게 해주세요-자존과 관종의 감정 사회학> 저자]시대가 변하고, 세상이 변하면서 흔히 말하는 사회적 ‘어른의 표상’도 달라지고 있다. 최근의 ‘586세대’와 ‘X세대’, 그리고 ‘밀레니얼 세대’ 간의 각축전이 언론이나 출판을 중심으로 확산되는 양상은 그러한 변화를 대변한다. 그 사이 ‘어른’이란 개념은 ‘아재’와 ‘꼰대’로 덧칠해져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형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괜찮은 어른’이 존재한다면 어떤 모습일까. 대체 어떻게 하면 멋진 것까진 몰라도 ‘꽤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big story]괜찮은 어른이 되는 조건은
일단 소위 ‘별로인 어른’의 모습을 보여주는 2가지 장면을 살펴보자. 아래의 단락은 20~30대의 젊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관심을 받았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두 단편 모두 회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회사와 일, 그리고 직장 문화에 대한 서로 다른 감각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해 갈등을 빚는 내용을 다룬다.

장면 ①
‘요즘’ 스타일
“합시다, 스크럼.”
오전 9시.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스크럼(scrum) 시간이다. 스크럼이란 2000년대 초반부터 미국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시작된 애자일 방법론(Agile이란 문서 작업이나 설계에 집중하던 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프로그래밍 자체에 집중하는 IT 개발 방법론을 지칭한다)의 필수 요소로, 우리 회사 같은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널리 쓰이는 프로젝트 관리 기법이다. 데일리 스크럼의 대원칙은 이렇다.
매일, 약속된 시간에, 선 채로, 짧게, 어제는 무슨 일을 했는지, 그리고 오늘은 무슨 일을 할 것인지 각자 이야기하고, 이를 바탕으로 마지막에 스크럼 마스터가 전체적인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것. (중략)

애자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스크럼이라면 이 모든 과정이 길어도 15분 이내로 끝나야 했다. 하지만 우리 대표는 스크럼을 아침 조회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심히 문제였다. 직원들이 10분 이내로 스크럼을 마쳐도 마지막에 대표가 20분 이상 떠들어대는 바람에 매일 30분이 넘는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장류진 <일의 기쁨과 슬픔> 중에서

꼰대나 아재가 아닌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 ‘요즘’ 스타일을 찾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단지 회사에 빈 백 의자(beanbag)나 전자동 커피머신을 설치한다고 해서 혁신 기업이 되지 않는 것처럼 ‘요즘’ 스타일의 외형만을 따와 예전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전형적인 ‘윗분 중심의 마인드’다. 앞의 단편소설에 등장하는 ‘스크럼’이 예전의 ‘훈화 말씀’으로 변질되는 것도 그와 같은 선상에서 발생하는 일 중 하나다.

사내에서 소위 ‘수평적인 커뮤니케이션’을 실천하자고 하면서 “자, 막내부터 한 마디 해봐”라고 하든가 동등하게 영어 이름을 사용하자고 하면서 선배나 상사에게는 영어 이름 뒤에 ‘Nim(님)’이라는 존칭을 사용하게끔 만드는 분위기 모두 예전의 마음으로 요즘의 몸이 되려고만 해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장면 ②
‘인생 선배’의 변명
“팀장님은, 만족하세요? 팀장님이야말로 매일 야근하시고. 다른 데로 옮길 생각은 한 번도 안 해 보셨어요?”
“나는 회사에서 많은 걸 받았어. 준이 태어났을 때 육아 휴직도 1년이나 갔다 왔고.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선 육아 휴직 주면 타격이 커. 그래도 사장님은 한마디도 안 하셨어.”
“너무 회사 입장에서만 생각하시는 거 아니에요? 육아 휴직은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요.”
“그래. 근데 자기도 알잖아, 한국 사회가 그렇잖아.”

그녀는 항상 한국 사회가 그렇다고 했다. 또는 사회생활이 그렇잖아. 사람들 시선이 그렇잖아. 남자들이 다 그렇잖아. 한국 사회에서 아직 여자는…. 선화는 복도에 서서 창문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거북목으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옆얼굴. 너무 익숙한 풍경이었다. 여기 있으면 팀장님처럼 될 것 같아요. 선화는 생각했다. 전 팀장님처럼 살기 싫어요. 팀장님도 싫고 팀장님 인생도 싫어요. 팀장님은 영원히, 아무 변화도 없이 여기서 일하시겠죠. 근데 전 아니에요. 전 싫어요. -김세희 <드림팀> 중에서

어른이란 호칭은 스스로 붙일 때보다 상대가 자신을 어른으로 인정하고 불러줄 때 비로소 의미를 지닌다. 단지 나이가 많아서, 연차가 쌓여서 혹은 직급이 높아서 자연스레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로인 어른’의 문제는 상대가 어른이라고 인정하기도 전에 자신을 이미 어른이라고 규정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흔히 “나 때는 말이야”로 시작되는 인생 선배의 한 마디는 상황의 부조리나 모순을 관행으로 덮는 데 동원된다. 마주하고 있는 사회의 모습은 똑같은데 변명만 늘어가는 게 어른의 모습이라면 아무도 어른이 되고 싶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괜찮은 어른’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안타깝게도 절대적인 정설이나 묘책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냉정한 자기성찰과 상대를 향한 열린 감각이 좋은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차원에서 다음의 3가지 질문을 던져보자. 이 질문과 마주할 준비가 돼 있다면 ‘어른’의 그림자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인지도 모른다.

상대와 나는 동일한 경험을
한 집단인가?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발행하는 테크놀로지 리뷰에 따르면 스마트폰은 인류 역사에 있어 가장 빠른 발전 속도를 보인 기술이라고 한다. 특정 기술이 전 세계 인구의 10%에 도달하는 속도를 비교해보았을 때, 전기가 30년, 전화기가 25년, 그리고 스마트폰은 8년이 소요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기술의 변화와 함께 정치, 경제, 사회 등 거의 모든 측면에서 급격한 변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지금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동시대인, 아니 심지어는 비슷한 연령대의 집단이라 해도 각자의 경험이 균질적이지 않을 가능성 또한 높아졌다. 심지어 서로 다른 연령대의 집단이라고 한다면 경험의 차이가 훨씬 커진다. 그러므로 사회에서 만나는 거의 모든 상대가 나와 다른 종류의 경험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나와 상대의 다름을 ‘맞고 틀림’의 질서 안에 대입하지 말고, 같은 층위에 있는 여러 다름의 하나로 받아들이는 노력은 ‘괜찮은 어른 되기’의 좋은 출발이 된다.

나는 상대에게 얼마나 솔직하고
명료한 언어를 구사하는가?

한국 문화의 특징 중 하나를 잘 설명해주는 단어가 바로 ‘눈치’다. 최근 들어 윗사람이 아랫사람의 눈치를 본다고도 하지만, 대부분 눈치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의 의중을 파악할 때 동원된다. 눈치야말로 권력관계의 흐름을 나타내는 징표라 할 수 있다.
즉, 윗사람에게 눈치는 선택사항이지만, 아랫사람에게 눈치는 필수사항이 된다. 사회를 문화적 특징에 따라 구별할 때 고맥락(high context) 사회와 저맥락(low context) 사회로 나누는데, ‘눈치’와 같이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추상적인 의도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 사회는 고맥락 사회에 속한다.

이 사회는 직접적이기보다는 간전접인 표현, 직설적이기보다는 우회적인 표현을 주로 사용한다. 고맥락 사회에서 ‘어른’은 응당 자신의 의중을 아랫사람이 미리 파악하기를 기대하는데,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소모적일뿐더러 비효율적이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이 서로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거라면 상대가 눈치 보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솔직하고 명료한 언어를 구사할 때, 불필요한 ‘눈치 게임’은 끝이 나고, 비로소 동등한 존재 간의 대화가 시작됨을 기억하자.

나는 상대를 충분히 어른으로
대접하는가?

나이를 먹는다고 또는 사회적 위치가 높다고 자연스레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자신보다 여러 측면에서 미숙하다고 가정하고, 스스로 윗사람 행세를 함으로써 어른이 된 기분을 만끽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상대를 먼저 어른으로 대접한다고 해서 내가 어른이 못 되는 것도 전혀 아닌 데 말이다.

넷플릭스의 전 최고인재책임자인 패티 맥코드(Patty McCord)는 그의 저서 <파워풀(Powerful)>에서 모든 직원을 어른으로 대할 것을 제안한다. 그녀가 강조하는 ‘어른으로 대하기’란 누구에게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동등하게 부여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먼저 어른이 된 상사’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부하 직원’을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어른으로서 수평적인 시각에서 함께 협력하는 힘이 발휘될 수 있다. 이제 나이나 경험, 또는 직위로 상대를 제압해 어른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 어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절실한 이유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3호(2019년 10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