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기고=젠티 씨씨 미국 웰씨앤와이즈 투자 컨설턴트·국제공인재무설계사]한국에서는 단순히 자선 활동으로만 알려져 있는 ‘필란트로피(philanthropy)’. 이번에는 필란트로피가 단순한 사회적 책임의 범위를 넘어 가문의 자산관리와 세대 간 화합에 어떤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지 살펴봤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어떤 요소가 필요할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기업가적 기술과 냉철한 비즈니스 판단력, 그리고 자원 관리 능력 등이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활동의 틀에는 기업 운영과 기업의 상품 및 서비스 제공을 위한 지역사회가 바탕에 깔린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이들이 기업 운영을 통해 축적한 부를 지역사회에 어느 정도 환원하는 것을 도덕적 ‘의무’라고 여기지만, 이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물론 사회에 대한 의무의 의미로서 사회환원 활동을 이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사회환원 활동이 ‘어쩔 수 없이’ 이행해야 하는 행위라는 인식으로 연결될 수 있다. 이에 대한 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필란트로피’다. 필란트로피는 단순한 기부, 사회적 환원의 의미를 넘어, 부모와 자녀, 후세대까지 연결해줄 가문의 핵심 가치를 형성하고 실천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하며, 이를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데 있어서 최적의 콘셉트로서의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래 몇 가지 이야기를 통해 필란트로피를 가문의 미션이자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줄 도전, 그리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서 현명하게 활용한 몇 가문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1 워런 버핏
이 시대의 필란트로피를 논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워런 버핏(Warren Buffett)이다. 그가 보유한 수백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은 그를 역사적인 자산가 반열에 올려놓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이다. 하지만 버핏이 세계적으로 존경받는 이유는 그의 막대한 자산뿐만이 아니다. 그는 부호들의 기부 클럽인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의 공동 창시자로서 사회환원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 극명하게 실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10년 버핏이 빌 게이츠(Bill Gates), 그리고 그의 아내 멜린다 게이츠(Melinda Gates)와 함께 설립한 더 기빙 플레지의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생전 혹은 사후에 재산의 절반 또는 그 이상을 기부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해야 한다.
버핏은 실제로 죽기 전까지 자신이 소유한 자산의 99%를 자선 활동에 쓸 것을 서약한 바 있다. 그가 발표한 ‘나의 자선 서약(Warren Buffett Pledge Letter)’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자.
“이 서약을 하는 이유는 사회 시스템을 이용해 돈을 벌었다는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저와 제 가족의 고마움을 표하기 위함입니다. 저와 제 가족이 재산의 1% 이상을 우리를 위해 더 사용한다고 해서 우리 가족의 삶의 질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재산의 99%를 기부한다면–98%를 기부했을 때와 비교했을 때–남들의 건강과 복지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버핏은 또한 그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것이 개인적 능력 외에 막대한 운과 다양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제가 지금까지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에 살 수 있었다는 점, 좋은 유전자를 타고났다는 점, 그리고 복리(compound interest) 덕분입니다. 저와 제 아이들은 소위 말하는 ‘난소 복권(Ovarian Lottery)’에 당첨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1930년에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신생아가 태어날 확률은 30대1이었습니다. 또한 제가 백인 남자로 태어난 덕분에 그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겪던 문제들을 겪지 않고 넘어갈 수 있기도 했습니다. 제 행운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전반적으로는 미국을 잘 굴러가게 하지만 가끔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생성해주는 시장의 시스템 덕분에 배가 됐습니다.”
2 존 D. 록펠러
이번에는 필란트로피 활동을 ‘비즈니스’적으로 해석해 자신과 가문에게 더 유리한 가치를 창출한 사례다. 너무나도 유명한 19세기 미국의 석유 사업가 존 D. 록펠러(John D. Rockefeller)는 생전 시작한 필란트로피 활동으로 현재까지 이어져 온 6세대를 하나로 묶는 데 성공한 필란트로피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다. 록펠러 집안의 필란트로피 활동은 보다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방식을 추구하며, 1890년에 설립한 록펠러대, 1913년에 설립한 제너럴 에듀케이션 보드와 록펠러재단 등을 포함한 다양한 기관 및 재단의 설립과 운영을 기반으로 한다.
각 기관과 재단, 그리고 가문 구성원 개인들의 기여 활동은 시대별 주요 사회문제였던 빈곤, 교육, 인종 차별, 질병 등에 초점을 맞춰 이루어졌다. 기관 및 재단을 통한 필란트로피 활동의 가장 큰 장점은 다음 세대들이 자연스럽게 가문의 필란트로피 활동에 참여해 이를 통해 가문이 확립한 가치를 자연스럽게 따르고 화합할 수 있는 틀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활동의 뿌리에는 록펠러뿐 아니라 그의 사업과 필란트로피 활동에 있어 조력자로 활약했던 프레드릭 게이츠(Frederick Gates)가 있었다. 그는 1891년부터 1923년까지 록펠러와 함께하며 타 비영리단체를 통한 기부 활동이 아닌 자체적인 기관 및 재단 설립을 통한 자선 활동을 제안했고, 기관들을 관리하며 록펠러 집안이 자선 활동을 조직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도왔다.
또한 록펠러 가문은 기존의 가치를 지켜내는 것에만 힘쓰지 않고, 해당 과정에서 각 세대의 열정과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해 생성된 새로운 가치를 흡수하고 융합하는 것을 가문의 또 다른 정신으로 삼았다. 예를 들어 록펠러 가문의 3세대인 데이비드 록펠러(David Rockefeller)는 유럽의 많은 도시들을 파괴한 제1차 세계대전의 현장들을 목격한 뒤 프랑스의 베르사유궁전과 퐁텐블로를 재건하는 데 막대한 양의 돈을 기부하며 아버지의 뜻을 새김과 동시에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성장 과정을 통해 베푸는 것의 가치와 실천하는 것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며 자랐으며, 평생에 걸친 여러 활동을 통해 그의 가치관에 깊게 뿌리내린 필란트로피 정신을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라 록펠러 가문의 많은 후세들이 마치 그들에게 ‘필란트로피 DNA’가 있기라도 한 듯 다양한 기관을 통해 사회의 여러 이슈에 대해 눈여겨보고 응답하며 필란트로피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록펠러 가문은 그들의 깊은 필란트로피 역사를 통해 쌓아 온 노하우와 지식을 기반으로 다른 가문에 필란트로피 관련 조언을 제공하기 위해서 ‘록펠러 자선 자문단(Rockefeller Philanthropy Advisors)’이라는 비영리단체를 구성해 뉴욕을 중심으로 시카고, 로스앤젤레스(LA),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등에서 활약하고 있다.
3 빌 게이츠 & 멜린다 게이츠
필란트로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빠트리지 말아야 할 또 다른 중요 인물은 바로 더 기빙 플레지의 공동 창립자이자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부부로 꼽히는 빌 게이츠와 멜린다 게이츠다. 재단과 자선사업을 통해 수십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이들 부부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우리는 그것이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자녀를 돌보고 난 뒤의 남은 자산을 활용하는 가장 가치 있는 방법은 사회에 환원하는 것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재단을 통해 미국의 교육 수준을 높이는 데 매년 약 5억 달러(약 6000억 원)를 기부하고 있으며, 질병으로 사망하는 어린이를 돕고 필요한 백신을 보급하며 교육의 기회 제공을 위한 개발도상국 지원에 매년 약 40억 달러(약 4조7000억 원)를 기부하고 있다.
그들이 이야기하는 기부의 주요 목적은 2가지다. 빌 게이츠는 해당 질문에 대해 “첫 번째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러한 활동이 즐겁기 때문”이라고 답하며, “기부 활동 뒤에 따라오는 성과 결과를 분석하는 것에 큰 만족감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4 척 피니
한때 ‘필란트로피계의 제임스 본드’로 알려졌던 DFS그룹(Duty Free Shoppers Group)의 창업자 척 피니(Chuck Feeney)는 1982년부터 1996년까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의 기부 활동을 철저히 숨긴 채 약 2900회에 걸쳐 천문학적인 금액을 기부한 인물로 유명하다. 그의 기부 행적은 DFS그룹의 지분 일부를 프랑스의 루이비통사에 넘기며 발생한 비즈니스 분쟁으로 인해 세무조사의 대상이 되면서 언론에 공개됐다.
그가 1982년에 설립한 애틀랜틱 자선재단(The Atlantic Philanthropies)은 늘 선행을 몸소 실천하던 그의 어머니와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은 남을 돕는 것이라고 설파한 앤드루 카네기(Andrew Carnegie)의 에세이 <자산(Wealth)>에서 영감을 받아 설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베풀어라(Giving while living)’라는 자신의 모토를 몸소 실천하며 2016년까지 그의 재산의 99.9%에 해당하는 80억 달러(약 9조5000억 원)를 기부한 바 있다.
수많은 대학과 재단을 포함해 아일랜드, 호주, 베트남, 미국 등에 위치한 수많은 조사기관에 자산을 기부했던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행보를 걷기를 기원했다.
“기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면 지금 당장 시작하길 권합니다. 지금 하는 것이 죽은 뒤 하는 것보다 훨씬 보람차기 때문이죠.”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은 이러한 피니의 정신에 영감을 받아 더 기빙 플레지를 설립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들뿐만 아니라 페이스북의 창시자인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gerg)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챈(Priscilla Chan), 버진그룹의 회장인 리처드 브랜슨(Richard Branson),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 등 필란트로피를 몸소 실천하는 훌륭한 예는 무수히 많다. 이들은 자선 활동이 다른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고 지역사회의 문화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일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보다 가치 있는 의미와 목적을 부여해 삶 자체를 향상시키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와 같은 활동에 있어서 패밀리 오피스의 솔루션이란, 가문이 필란트로피라는 개념 아래 그들 가문의 핵심 가치와 미션을 깨닫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그들이 보유한 자산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위의 결과로 세대를 뛰어넘어 가문 전체가 하나가 되는 일을 실현할 수 있도록 전문적이고 체계적인 지원과 조언을 제공하는 역할을 해주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기부라는 활동 자체에는 패밀리 오피스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패밀리 오피스만이 가문이 형성한 자산과 가문의 핵심 가치를 분석해 어떤 방식으로 기부를 했을 때 가문에 더 큰 가치로 돌아올 수 있는지에 대한 길을 알려줄 수 있는 것이다.
젠티 씨씨 미국 웰씨앤와이즈 투자 컨설턴트·국제공인재무설계사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3호(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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