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 와인의 역사는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와인을 빛나게 하는 디캔터나 글라스 역시 그 역사의 화려한 조연이었으리라.
아득한 고대부터 와인은 유럽의 식탁과 종교의례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었다. 기원전 80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부터 인류는 와인을 만들어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포도는 다른 과일과 달리 포도 껍질 자체의 성분으로 스스로 발효될 수 있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류가 예전부터 자연 발생적인 술로 애용했을 것이다.
포도나무를 가꾸기 시작함으로써 인류는 유목 생활을 포기하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고대 이집트를 거쳐 그리스 문명 역시 와인에 대한 사랑과 집착은 대단한 것이어서 오늘날 연회의 기원이 되고 있는 그리스의 심포지엄은 와인을 곁들인 남자들만의 술 파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와인은 상류층만이 마실 수 있었던 신분을 구분 짓는 상징적인 것이었고 역사 속의 많은 크고 작은 사건과 연루돼 있었다.
신분을 구분 짓는 귀중품이자 사치품
와인의 역사에서 로마인의 등장은 포도 재배와 와인을 만드는 과정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중요한 사건이 됐다. 로마군대는 정복한 지역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방법으로 포도나무의 재배 및 포도주의 생산 기술을 정복민에게 전수했다. 와인은 1년 내내 손이 가는 작물이었기에 로마의 정복하에 있던 많은 주민들은 포도밭을 가꾸는 재미에 무기 대신 쟁기를 들고 평화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됐다.
포도주는 중세 초부터 기독교가 발전함에 따라 더욱 널리 전파됐다. 1년 내내 빵과 포도주로 집전하는 미사를 거르지 않기 위해서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포도 재배에 정성을 다하는 일꾼이 됐고, 포도의 전문적인 재배자가 돼 갔다. 포도주 외에도 중세에는 물 대신 맥주를 마시는 풍습이 있었으나 당시에 맥주는 와인과 달리 장기간 보관이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포도주는 물을 대신하는 음료수로써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포도주에 대한 수요는 점점 더 커져 갔다. 포도주에 대한 안정적인 수요 때문에 포도주를 만드는 일은 중세에서 가장 돈벌이가 되는 사업이 됐다. 중세 경제에서 포도주의 큰 비중은 수도원의 경제 또한 비중 있게 만들었다. 포도주 생산의 깊은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던 수도원의 포도원은 커져만 갔고 수도원의 경제도 그와 함께 성장했다. (사진) 아름다운 라인의 디저트 와인 잔(빅토리안). (사진) 터키블루 컬러의 크리스털 화병(아르누보).
세계 3대 고딕 성당으로 잘 알려져 있는 쾰른 대성당도 포도주가 이끌었던 경제와 무관하지 않다. 쾰른을 가로질러 흐르는 라인강을 통해 포도주를 가득 실은 네덜란드 교역선들이 라인강 하류의 쾰른에 이르면 강바닥이 낮아져 배의 바닥이 강바닥에 닿았다.
그래서 쾰른에서 짐을 하역해서 다른 배로 옮기게 되는데, 이때 쾰른시는 하역비 명목으로 많은 세금을 걷을 수 있었고 이로써 번창을 거듭했다. 쾰른 대성당의 건축과 같은 대역사의 이면에는 포도주와 연관된 쾰른시의 번성이 있었던 것이다.
와인이 이렇게 오랫동안 서양의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다 보니 대다수 큰 전쟁의 이면에는 와인에 대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프랑스 왕위 계승과 관련해 100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계속됐던 백년전쟁이 좋은 예다.
14세기 중엽 프랑스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자 친족 관계인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프랑스 내 영국 영토였던 보르도 지방을 프랑스가 몰수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양국 간 전쟁은 더 치열하게 이어졌다.
기후 여건상 와인을 생산할 수 없는 영국으로서 보르도 지방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지역이었기에 전쟁은 절박하게 100년간이나 계속됐다. 처음 수세에 몰렸던 프랑스였으나 전쟁 후반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승리하며 보르도를 지켜냈고, 오늘날 와인의 대표적인 국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와인 산업에도 대량 생산과 소비 체제가 도입되면서 보르도 지역은 거대한 포도밭으로 변했고 품질 고급화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때 샤토(Château)라는 귀족적인 이름을 붙인 와이너리가 등장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문의 문장 새겨진 와인 액세서리…앤티크 컬렉션으로
15세기 이래로 계속된 열강의 식민지 지배는 와인의 재배지를 전 세계로 확장하는 계기가 됐다. 16세기에는 남미 지역, 17세기에는 남아프리카, 그리고 18세기에는 미국의 나파밸리에서 포도가 재배되기에 이르렀다. 17세기가 되자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수도사인 돔 페리뇽은 코르크마개를 사용해 스파클링 와인을 밀봉하는 기술을 개발함으로써 와인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숙성된 좋은 와인은 수천 년간 귀족들의 식품에 가까운 기호품이었다. 살아 숨 쉬는 와인이 테이블에 서빙 되기까지 다소 복잡하게 느껴지는 과정을 거치는데, 이 과정에서 디캔터와 글라스, 그리고 다양한 와인 액세서리가 사용됐다. (사진) 스털링이 트리밍된 샴페인 쿨러(아르데코). (사진) 아르데코 시대에 유행했던 압축 크리스털로 만든 코발트블루 디너 접시와 레이어드된 잔은 바카라사의 로마네 콩티 와인 잔, 터키블루 화병(이르누보).
침전물을 부드럽게 가라앉히기 위해서 누워 있었던 와인병을 하루 이틀 동안 똑바로 세워 놓는 와인홀더, 손님에게 와인을 대접하기 전 주인이 시음하기 위한 테이스팅 컵, 그리고 코르크스크루 등이 있었다. 또한 마시기 전 오픈한 와인을 외부의 산소와 접촉하게 해 맛과 향을 더욱 살릴 수 있는 브리딩 과정을 위해 필요한 디캔터가 있다.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은식기가 있었듯 디캔터와 크리스털 글라스 등 와인 액세서리에도 가문의 문장이나 이니셜 모노그램이 새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안 가문의 애장품으로 이어져 내려와 현대에도 소중한 앤티크 컬렉션 아이템이 되고 있다.
여러 테이블 세팅 중에서도 와인 테이블에는 특히나 유리 혹은 크리스털 제품이 많이 들어간다. 와인 테이블의 주연은 물론 와인이겠으나, 와인글라스와 디캔터 없는 와인 테이블을 상상할 수 없으니 그들도 화려한 조연임에 틀림없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2호(2019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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