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순간,
그 단 한 번의 순간을 위한 준비.
死의 찬미, 두려움을 넘어서.
나를 위한 마지막 예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건만, 죽음은 두렵고 슬프다.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무섭다. 그래서 그동안 죽음은 기피해야 할 대상으로서 터부시돼 왔다. 누군가는 소금을 뿌리고, 혹자는 눈과 귀를 막아 죽음을 외면했다. 준비되지 않은 죽음은 갑자기 찾아와 회한을 남겼다.
그러나 죽음이 회피의 대상이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죽음과 관련된 한국 사회의 관행이나 장례 문화를 보면 우리 조상들은 죽음을 오히려 준비하고 맞이할 것으로 여겼다. 마치 결혼식을 앞둔 젊은 남녀처럼, 흔히 노인이 되면 가묘(묏자리)를 알아봤고, 가묘의 주인은 직접 묏자리를 손질했다. 향후 본인의 평생 안식처가 될 곳이니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을까.
수의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나이가 많은 부모를 위해 수의를 마련하는 것이 ‘실례’가 아니라 ‘효’로 통한 시기다. 죽음에 대한 논의를 부정하지도 않았다. 노인들은 자손들과 사후 일처리에 대해 상의했다. “돌아가시면 제사상에 제일 좋아하시던 음식을 놓아 드리겠다”는 말에 노인들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금기의 대상이 아닌, 준비하고 맞이하는 대상으로서 죽음을 바라봤기 때문이다.
죽음을 금기시하지 않은 모습은 상갓집에서도 드러난다. 호상(好喪)의 경우에 상갓집은 슬픔이 짓누르는 무겁고 엄숙하기만 한 자리는 아니었다. 외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누고, 춤과 놀이가 행해졌다. 지금은 전통이 바래거나, 종교가 깃들면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지만 멀게는 고구려 때부터 장송에 가무를 행했고, 조선시대에는 가무를 즐기지 않아 비판했다는 기록도 있으니, 한국의 전통적 장례가 축제 성격을 띤 것이 오히려 더 유구한 역사다.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들은 때때로 죽음이란 거울 앞에 자신의 생애를 비춰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지금 현재 생의 행복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종종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친다. 나의 마지막 순간에도 예우가 필요하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1호(2019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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