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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위한 저축, 노르웨이에 배운다
[한경 머니 =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 노후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까. 평생 현역처럼 살며 생활비를 벌 수 있다면 걱정이 줄어들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미래를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물론 계획대로 척척 풀리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노후를 위해 저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크게 두 부류가 있을 것 같다. 먼저 ‘노후는 없다’고 생각하는 부류다. 노후가 없으니 준비할 필요도 없는 건 당연하다. 이미 준비가 끝난 부류도 있다. 이들 중에는 평생 현역으로 살며 생활비를 벌 테니 지금 아등바등 저축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이들도 있고, 물려받은 재산이나 벌어 둔 돈이 많아 추가로 저축할 필요가 없는 이도 있다. 하지만 이때도 소득원이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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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적이고 자산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따져봐야 한다. 예측이 빗나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다.

나우루엔 저주, 노르웨이엔 축복된 천연자원

남태평양 미크로네시아에는 나우루라는 작은 섬이 있다. 울릉도의 3분의 1 정도 되는 크기의 나우루는 바티칸과 모나코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나라다. 본래 나우루 주민들은 20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지 않고 농사와 고기잡이를 하며 평화롭게 살아 왔다. 그런데 100년 전 섬에서 인광석이 발견되면서 순식간에 운명이 바뀌었다.

인광석은 질소비료의 주원료다. 섬 전체가 질 좋은 인광석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알려지자, 서구 열강들이 번갈아 가며 나우루를 식민지로 만들고 인광석을 채굴해 돈을 챙겼다. 그러다 1968년에 독립하면서 인광석 채굴권을 돌려받은 나우루는 돈방석에 올라앉았다. 1980년대 당시 나우루의 1인당 국민소득은 벌써 3만 달러를 넘어섰다.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최근 3만 달러를 넘어선 것과 비교하면 당시 나우루가 얼마나 부자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화려한 나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인광석 생산량이 서서히 줄어들더니, 2000년대 접어들면서 바닥을 드러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인광석을 캐내느라 섬 전체가 상처투성이가 되면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나우루 사람들에게 농사를 지을 체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호화주택에서 살며, 걸어서 4시간도 안 되는 섬을 고급 승용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나우루 국민들에게 당뇨병 발병률 세계 1위라는 오명만 남았다. <총 균 쇠>라는 책의 저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나우루와 같이 천연자원이 풍부한 국가가 가난하게 사는 것을 두고 ‘천연자원의 저주’라고 불렀다.

하지만 천연자원을 저주로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나우루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나라도 있는데, 노르웨이가 대표적이다. 1971년 노르웨이의 앞바다인 북해에서 거대한 해저유전이 발견됐다. 예상치 못한 축복에 노르웨이는 나우루처럼 대응하지는 않았다. 노르웨이 정부는 오일펀드를 조성해 석유 사업에서 나오는 수익을 고스란히 적립했다. 노르웨이 경제가 어려워지거나 석유자원이 고갈됐을 때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1996년 적립을 시작한 노르웨이 오일펀드의 운용 자산 규모는 올해 1분기 9190억 유로에 이르러, 세계 유수의 국부펀드 중에서도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도 노르웨이를 천연자원의 저주를 깨고 전 국민을 위해 자원 이익을 축적한 보기 드문 사례로 들고 있다.

자동 저축 장치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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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오일펀드 운용 사례를 통해 노후 준비와 자산관리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다. 우리 집 앞마당에 석유가 뿜어져 나오진 않지만, 우리에겐 다른 자원이 있다. 경제학자들이 ‘인적자원’이라고 부르는 노동력이 바로 그것이다.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천연자원이 언젠가 고갈되듯, 우리도 때가 되면 은퇴해야 한다. 인광석을 채굴해 한창 돈을 벌고 있을 때 나우루 국민들이 ‘인광석 없는 나우루’를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한창 일할 나이에 ‘은퇴 후 소득 없는 삶’을 준비하기도 쉽지 않다.

노르웨이도 처음부터 준비를 잘한 것은 아니다. 노르웨이 앞바다에서 석유가 처음 생산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이다. 개발 초기에 노르웨이 정부는 석유 수익을 국내 경기를 부양하는 데 이용했다. 하지만 성장은 오래가지 못하고 삐걱대기 시작했다. 석유 수출 대금이 국내로 유입되면서 노르웨이의 통화 가치가 상승하자, 석유 이외의 다른 산업의 수출이 타격을 받으면서 경제가 어려졌다.

일련의 사태를 겪으면서 노르웨이 경제학자들은 석유 자원만 의존한 경제 성장이 지속 가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미래 세대에 큰 부담을 지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에서 노르웨이 오일펀드 조성에 대한 아이디어가 탄생했다. 1990년 관련 법률이 국회를 통과했고, 1996년부터 석유 사업에서 얻은 수익을 적립하기 시작했다.

은퇴 상담을 하다 보면 “노후 대비 저축은 언제부터 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받을 때가 많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은 노후를 불안해하면서도 정작 저축은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다. 하지만 불안을 없애려면 고민보다는 행동이 필요하다. 저축할까 말까 하는 망설임을 극복하려면, 노르웨이 오일펀드와 같은 자동 저축 시스템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노후 대비 계좌를 만들고 해당 계좌에 소득 중 일부를 자동이체 하는 것이다. 그러면 저축 금액은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살 수 있다. 아껴 쓰고 남은 금액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저축하고 남은 금액을 아껴 쓰는 것이다.

웬만해선 꺼내 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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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정부는 국부펀드의 목표를 ‘미래 세대를 위한 부의 축적’으로 정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려고 석유 회사에 대한 국가 지분에서 나온 분배 이익금, 석유 사업에 대한 세금, 정부가 직접 참여한 석유 사업에서 발생한 수익 등 석유 관련 모든 수익을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펀드 자금을 중도에 임의로 인출할 수 없도록 법적 장치를 마련했다. 2001년까지만 해도 오일펀드에서 정부가 예산으로 받아 쓸 수 있는 돈은 펀드 규모의 4%로 제한됐고, 2017년부터는 한도가 3%로 줄었다.

2016년 이전까지 노르웨이 오일펀드에서 인출한 금액이 같은 해 펀드로 유입된 돈을 넘어선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일펀드 자산규모가 크게 늘어난 2016년이 돼서야 비로소 해당 적립금보다 많은 돈을 인출했다. 하지만 적립금을 운용해서 얻은 수익이 있어 오일펀드 자산규모는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노후 대비 저축을 할 때도 자산규모가 일정 수준으로 늘어날 때까지는 가능한 한 자금을 빼 쓰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복리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인출의 유혹에서 벗어나려면 저축을 시작할 때 애당초 인출하기 불편한 금융상품을 선택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돈이 모인다.
연금저축과 개인형퇴직연금(IRP)과 같은 연금계좌가 여기 해당된다. 연금계좌 가입자는 매년 저축 금액에서 최대 700만 원까지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적립금은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할 수 있는데, 그 이전에 계좌를 해지하면 기타소득세를 납부해야 한다. 적립할 때 세액공제율은 13.2% 또는 16.5%인데, 해지할 때 기타소득세율은 16.5%다. 중도해지 할 경우 세액 공제 혜택으로 받은 금액이나 그 이상을 토해내야 한다는 얘기다. 하지만 중도해지를 하지 않고 적립금을 55세 이후에 연금으로 수령하면, 비교적 낮은 세율(3.3~5.5%)의 연금소득세만 납부하면 된다.

투자 기간에 맞춰 자산 배분을 한다

적립금은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 노르웨이에서 오일펀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을 때, 정치권에서는 자금 운용을 두고 논란이 일어났다. 당시만 해도 안정성에 중점을 두고 적립금을 운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고, 안정성이란 결국 원금 보존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1996년에 처음 투자된 자금은 중앙은행의 외환보유액처럼 단기채권 중심으로 안전하게 투자됐다. 하지만 오일펀드는 2~3년 후에 운용하다가 말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장기적으로 석유수입금을 통해 혜택을 얻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이 같은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오일펀드 운용 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1998년은 오일펀드에서 중요한 한 해다. 드디어 성장의 시대가 시작됐다. 당시 오일펀드는 처음으로 주식에 투자하면서 비중을 40%까지 확대해 나갔다. 투자 대상도 차츰 넓혀 나갔다. 초기에는 서유럽 선진국과 미국에 대한 투자가 대부분이었지만, 2년 후부터는 일부 신흥 공업국 주식으로 포트폴리오가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2007년에는 다시 주식 비중을 60%로 확대하기로 결정하고, 2008년부터 주식 비중이 대대적으로 확대해 갔다. 알다시피 2008년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주가가 대폭 하락하면서 금융시장이 공황 상태에 빠졌을 때다. 이때도 노르웨이 오일펀드는 60%라는 목표 수치를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주식을 사들여, 2009년 말에 주식 비중이 62.4%로 높아졌다. 2011년부터는 부동산에도 최대 5%까지 투자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2017년에는 다시 주식 비중을 다시 70%로 상향하면서 부동산 투자 비중으로 최대 7%로 상향했다. 저금리 환경에서 기대수익률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배경이었다.

노르웨이 오일펀드는 1998년 광범위한 투자를 시작한 후 연평균 6%의 수익을 기록했다. 그렇다고 해서 매년 수익만 낸 것은 아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주식투자 비중을 60%로 확대하면서 23.3%라는 엄청난 손실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장이 폭락했을 때도 자산 배분 비중을 맞추기 위해 꾸준히 주식을 사들였다. 그 덕에 싼 가격에 주식을 매입해 2009년에는 25.6%, 2010년에는 9.6%의 수익을 얻을 수 있었다.

노후 자금을 운용할 때도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을 배분해야 할 필요가 있다. 당장 1~2년 뒤에 찾아 쓸 돈이 아니라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산 배분을 해야 한다. 20~30년 뒤에 찾아 쓸 요량이라면, 1년 뒤 자산이 10%나 줄어들었다고 해도 최종금액만 괜찮다면 그건 중요하지 않다. 프로야구에서 시즌 마지막에 우승을 거두기만 한다면 개별 경기 결과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다. 자칫 한 경기에 이기겠다고 투수 로테이션을 무너트렸다가 시즌 전체를 망치는 수가 있다.

정기적으로 리밸런싱 하라

자산 배분 비중을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지키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래서 리밸런싱이 필요하다. 자산 배분 비중에 맞춰 주식과 채권을 구입했다고 해도 시장 상황에 따라 이내 자산 비중이 달라진다. 주가가 상승할 때는 주식 비중이 높아지고, 반대의 경우에는 채권 비중이 높아진다. 이럴 때 처음 정한 자산 배분 비중으로 되돌려놓는 것을 리밸런싱이라 한다. 리밸런싱 하려면 많이 오른 자산을 팔고, 적게 오른 자산을 사야 한다. 투자에 성공하려면 싸게 사서 비싸게 팔아야 하는데, 리밸런싱을 하면 이 같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자산 배분 비중을 조정하려고, 주식을 매도하고 채권을 매수하거나 혹은 반대로 하는 적극적인 방법을 동원할 필요는 없다. 펀드로 새로이 유입되는 자금을 가지고 비중을 높이고자 하는 자산을 구입하면 된다. 반대로 펀드에서 자금을 인출할 때는 비중을 줄이고자 하는 자산을 처분하면 된다.

한번 정해진 자산 배분 비중을 계속 일정하게 유지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노르웨이 오일펀드처럼 당연히 당신도 주식과 채권의 가중치를 바꿔 나갈 수 있다. 그러나 이건 매우 신중해야 한다. 더 높은 수익을 내리라는 확신만으로 자산 배분 비중을 자주 바꾸면 더 낮은 수익을 거두게 된다. 노르웨이 오일펀드가 주식 배분 비중을 상향 조정했던 것은 투자 기간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직장인들도 노후 자금을 자산 배분 할 때는 은퇴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 20~30대에는 투자 기간이 많이 남았기 때문에 주식 비중을 높여 가도 되지만, 은퇴가 가까워질수록 변동성을 줄여가기 위해 주식 비중을 점차 낮춰 나갈 필요가 있다. 만약의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일반 투자자들이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 배분 비중을 조정하는 것을 돕기 위해 등장한 금융상품이 ‘TDF(Target Date Fund)’다. 이 펀드는 투자가 은퇴 시기를 정하기만 하면, 은퇴까지 남은 기간을 고려해 알아서 주식 비중을 조정해준다.

‘화수분처럼 노후생활비가 끊임없이 솟아났으면 좋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번쯤 해본 적 있을 것이다. 대다수 직장인 가지고 있는 노후 자금 항아리도 화수분은 아니다. 그래서 나우루가 아니라 노르웨이 방식의 노후 준비가 필요하다. 노르웨이가 ‘석유 없는 노르웨이’를 준비하듯, 우리도 ‘소득 없는 노후’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0호(2019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