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사진_왼쪽부터 시계 방향) 아르데코 시대의 살구 톤 압축 크리스털에 티파니, 수프 볼과 아르누보 시대의 크리스털 와인 잔, 크랜베리 크리스털 저그(아르누보), 아르누보 시대의 티파니 스털링 커트러리 세트와 아르데코 압축 샐러드 접시가 레이어드 된 정찬 세팅.

[한경 머니=백정림 갤러리 이고 대표·<앤티크의 발견> 저자 | 사진 서범세 기자] 요즘 사람들에게 뜻밖의 여유가 생기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질문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말할 터. 하지만 역사상 산업혁명의 경제적 풍요로 신흥 중산층이 처음으로 생겨나기 시작했던 빅토리안 시대의 사람들이라면 ‘집 안 꾸미기’를 선택했을 것이다.

영국의 빅토리안 시대 이미지로 우리에게 제일 먼저 연상되는 것이 여러 장식품으로 치장된 실내장식, 그리고 화려한 테이블 문화다. 1800년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했던 영국의 상류사회를 주도했던 문화는 집 안 꾸미기와 식문화로,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했던 신흥 중산층의 욕구와 귀족 계급의 차별화가 어우러지며 절정에 달했다.

중산 계급층, 삶의 투쟁…피난처는 ‘집’

예로부터 손님 초대와 접대는 귀족들의 주된 생활이었다. 왕족, 귀족, 평민, 그리고 하층민의 계급 간 이동이 힘들었던 이전 시대에 비해 빅토리안 시대에는 산업혁명의 여파로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일구고 중산층으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 시기였다.

주로 상업, 무역업, 제조업, 법조인, 회계사, 의사 등의 직업을 가졌던 영국의 중산층은 산업혁명 전까지는 그 수가 보잘 것 없었으나, 19세기에 영국의 인구가 늘어나고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눈에 띄게 많아졌다.
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사진) 레이스 느낌이 나게 정교하게 데코한 물컵(아르누보).

부를 단순히 세습하는 귀족들과 달리 스스로 부를 일구는 건전한 경제인구가 늘어나게 되면서 사회 또한 이들 위주로 발전과 번영을 거듭하게 됐다. 그들은 개인의 독립과 사회적 상승 욕구에 대한 의지가 매우 컸고, 가정을 가장 소중한 가치로 생각했다. 삶의 투쟁에서 지친 중산 계급의 남자들은 그들 자신의 피난처로 가정을 택했다.

열심히 일해서 재산을 늘리는 재미와 함께 이들이 추구했던 것은 바로 ‘귀족 따라 하기’였다. 귀족들이 누렸던 가구와 식기로 집 안을 장식했고 정원 가꾸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귀족들이 즐겼던 손님 초대에도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손님 초대에는 실과 바늘처럼 입맛 돋우는 요리와 식기가 함께 등장했다.
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사진_위부터)금박이 화려한 앙피르 시대의 티 잔, 스털링을 정교하게 투각해 장식한 압축 유리 티 잔(아르데코).

손님을 맞이하는 거실에는 벽난로와 탁상시계가 놓였고 천으로 마감된 소파와 커튼이 드리워졌다. 다이닝룸에는 너도 나도 앞 다투어 값비싼 판유리를 끼운 장식장을 구비해 놓고 그 안을 아름다고 화려한 그릇으로 장식했다. 당시 판유리는 매우 귀한 것이었기에 다이닝룸의 그릇장 또한 중산층들이 부를 과시하려는 풍조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귀한 장식장 안에 자신의 소중한 물건들을 진열하는 문화가 정착하게 됐다. 아마도 우리의 어린 시절 집집마다 거실에 찬장이라는 가구를 들여놓고 그 안에 귀한 찻잔이며 접시를 모셔 두었던 모습은 빅토리안 시대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듯 그들이 집 안 꾸미기에 정성과 열정을 다한 것은 사회적 성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 필수요소였던 인맥 관리가 집으로의 손님 초대에서 비롯되기 때문이었다. 바깥세상에서 열심히 일하는 남편을 위해 안주인이 해야 할 가장 큰 의무는 남편의 사업과 관련된 사람들과 친척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훌륭한 식사를 대접하는 일이었다.

이때 집 안의 장식품과 식기는 그 집안의 교양과 부를 가늠하는 척도가 됐다. 당시 유럽 전역에는 새로운 부가 창출돼 귀족과 기득권층은 신흥 중산층 계급으로부터 끊임없는 도전을 받게 됐다.

따라서 기존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신분에 어울리는 새로운 기준을 정해 새롭게 상류층에 진입하려는 사람들과 차별화하며 스스로를 보호할 필요를 느꼈다. 그 기준이 바로 정찬모임이었으며, 훌륭한 음식과 선별된 손님, 장식성이 강한 천 의자, 그림, 카펫 등으로 꾸며진 다이닝룸은 그러한 정찬모임의 필수조건이었다.

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손님 모시기는 집안의 격(格)


긴 테이블 위에 놓인 화려한 도자기 그릇부터 은으로 만들어진 서빙 그릇, 가지런한 커트러리 등은 정찬 테이블의 기준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털 디캔터와 다양한 와인글라스, 크루엣(cruet: 조미료통), 캔디 볼(candy bowl), 리넨, 화려한 촛대, 유리나 도자기 장식의 센터피스 등이 빠짐없이 등장했다. 식탁은 잘 손질된 다양한 리넨 천으로 장식됐다.

영어로 리넨(linen)은 마(麻)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테이블 세팅을 말할 때는 테이블보, 러너, 매트, 냅킨, 그릇받침 등 식사에 필요한 모든 천 종류를 일컫는다. 이 시기에는 대부분의 공정이 수공으로 이루어졌는데 손으로 수를 놓는 것은 물론이고 한 올 한 올 올을 뽑아 얽어 만드는 드로운 워크(drawn work) 공법의 레이스는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러한 리넨은 여자에게 옷이나 화장품과 같이 마지막 꾸미기의 단계로 테이블 세팅에 있어서 장식성과 기능성을 높여주는 매우 중요한 요소다.

손님을 초대해서 코스별로 음식을 내는 것 또한 안주인의 역량이었고 집안의 격을 표현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요리는 최고의 요리를 택하되 가짓수를 적당히 하고 포도주는 종류별로 최상급 품질을 준비했다.
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빅토리안 시대, 테이블 세팅의 시작
(사진_위부터) 금도금 스털링 국자(아르누보),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아 꽃과 새를 손잡이에 조각한 스털링 티 스트레이너(빅토리안).

음식은 가장 주된 것에서 가벼운 순서로, 포도주는 옅은 향에서 짙은 향의 순으로 서빙 됐다. 가령 수프 다음에 셰리주, 첫 번째 앙트레에 이어 샴페인, 생선요리와 화이트와인, 육류와 레드와인의 조합이었다. 음식은 모두 은식기에 담았고 후식은 도자기 그릇에 담겨졌으니 빅토리안 시대는 진정 음식의 천국, 화려한 만찬의 극치였다.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도 빅토리안 시대 중산층처럼 가정에서 지친 몸을 쉬며 위안을 얻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이다. 그 시대 가정의 품격과 남편의 내조를 위해 가정을 꾸몄던 안주인의 역할은 오늘날 다시 되새겨질 필요가 있는 듯하다. 화려할 수는 있으나 정성과 따뜻함이 없는 바깥에서의 식사에 지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오늘 저녁 개성 넘치는 정겨운 집밥으로 행복 가득한 식탁을 꾸며보는 것은 어떨까.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0호(2019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