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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njoy] 현재의 행복을 찾아가는 상상여행
[한경 머니 =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우유부단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크고 과감한 결정으로 멋지게 회사를 키운 경험 많은 최고경영자(CEO)가 갑자기 아무 결정도 못 내리겠다며 필자를 찾아오기도 한다. 이를 ‘경영 입스(Executive Yips)’라 부르기도 한다. 결정이 어려운 이유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마음의 불안이 증폭됐기 때문이다. 입스증후군과 결정장애는 과도한 불안의 여러 표현 형태들이다.

최고의 피겨 선수인 김연아 선수, 과거 인터뷰를 보니 1위를 했던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경기 직전 몸을 풀 때 어떤 이유에서인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며 “점프를 뛰지 못해 프로그램 직전까지 점프에 대한 자신감이 하나도 없어 최악이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천하의 김연아 선수가 점프를 뛸 수 없을 정도로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니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된다.

이런 현상을 입스(Yips) 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대표적으로 프로 골퍼들 가운데 퍼트나 드라이버 샷을 할 때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불안 증상이 생겨 스윙을 하지 못하고 주저하게 되는 현상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실력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자기가 우승했던 코스에서도 입스가 찾아올 수 있다. 누구보다 강심장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김연아 선수, 겉으로 내색은 안 해도 내면적으로는 많은 부담을 가졌으리라 충분히 공감된다. 그런 부담을 이겨내고 훌륭한 연기를 펼쳤으니 정말 대단한 선수인 셈이다.

강박적 느림(obsessional slowing)이라는 증상이 있다. 불안이 만드는 완벽에 대한 집착에 사고와 행동이 병적으로 느려지는 것이다. 책 한 장을 넘기는 데 30분도 걸린다. 빼놓고 안 읽은 부분이 없나 불안한 마음에 수도 없이 같은 페이지를 읽게 되는 것이다. 병적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우유부단도 불안감과 연관된 강박적 느림인 셈이다.

회사의 규모가 작았을 때는 느낌에 따라 과감한 결정을 내렸던 CEO가 회사 규모가 커지면서 결정에 따른 위험도도 커지니 결정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이 몰려온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결정에 있어 완벽을 추구하고 위험을 최소하기 위해 객관적 분석 자료에 지나치게 의존하기 쉬운데 그래도 결정이 어렵다.

닥터 쇼핑 현상

‘건강 염려’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된다. 심해지면 일상생활의 대부분을 건강 염려 속에서 보내고 그러다 보니 반복적으로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가는 것이 일상이 되기도 한다. 검사를 하면 정상 결과가 나오지만 주관적으로 증상이 느껴지고 몸에 문제가 있다고 확신이 들기에 그 결과를 믿지 못하고 계속 이 병원 저 병원을 돌아다니는 닥터 쇼핑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건강 염려란 늪에 잘못 빠지게 되면 빠져나오는 것이 쉽지 않다. 사실 건강 염려는 죽기가 싫은 병이다. 다르게 말하면 살고 싶은 욕구가 큰 사람에게 찾아오기 쉽다는 것이다. 오히려 ‘헛된 인생,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라며 염세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건강 염려가 찾아올 일이 없다. 물론 염세적으로 사는 것이 좋은 건 아니지만 잘 살고 싶은 마음에 찾아온 건강 염려 때문에 삶의 질이 더 부정적이 되기 쉽다. 내일 죽어도 그만이다 생각하는 사람은 내일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오늘을 마음 편하게 즐기며 살 수 있는데 내일 꼭 살아야 한다고 걱정하는 사람은 그 걱정에 오늘을 엉망으로 보내게 되는 황당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과거인 어제, 중요하다. 미래인 내일도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서 있는 것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불안과 걱정은 미래를 생각할 때 찾아오는 감정들이다.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염려가 오늘을 망가트릴 정도가 된다면 문제인 것이다. 과거도 중요하다. 보다 나은 오늘을 위한 지혜와 경험을 주기에. 그러나 지나치게 과거에 빠져 있으면 우울이 찾아오게 된다.

반나절 정도 나는 어느 시점의 생각을 주로 하고 살고 있나를 적어보는 것, 의미가 있다. 내 생각의 3분의 1만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염려로 차 있어도 사람은 현재의 행복을 잘 못 느낀다고 한다.

완연한 여름이다. 여름은 바캉스의 계절인데 어디로 여름휴가를 갈지는 정했는지 궁금하다. 가족들과 어디로 가긴 해야 하는데 어디로 갈지 고민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즐거워야 할 바캉스가 일에 쫓기다 정신없이 갔다 오다 보면 여행을 한 것인지 일을 한 것인지 혼동되기까지 한다. 오히려 바캉스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다 마쳤다 하는 안도감과 자유로움을 느끼기도 한다. 바캉스의 라틴어 어원이 ‘자유를 찾다’라고 한다. 그런데 그 자유를 여행지가 아닌 돌아온 집에서 느낀다면 섭섭한 일이다.

여행을 가고픈 국내 여행지나 해외의 도시들이 누구의 마음에나 있다. 그러나 바쁜 삶에 치이다 보면 실행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럴 때 가끔은 상상여행법을 이용해보는 것을 권한다.

과거 매주 해외여행을 간 적이 있다. 예를 들어 금요일 업무를 마치고 인터넷으로 인천 출발 파리 드골공항 도착 항공 스케줄을 열어본다. 그리고 상상으로 출발 날짜를 정한다. 그런 다음 파리가 잘 그려진 영화, 예를 들어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몰입해서 본다. 현재의 파리뿐만 아니라 과거의 파리 풍경까지 볼 수 있다. 보통의 파리 여행으로는 카메라 앵글이 잡아주는 그 장면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다. 실제 가서 보는 것보다 더 멋진 파리를 감상할 수 있다.

우리 감성은 현실과 환상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허구인 영화나 드라마에 우리가 감동하는 것이다. 가고픈 곳을 다 갈 수 없는, 즉 시간과 장소의 제한을 많이 받는 우리이기에 아마도 조물주가 이런 기능을 우리 뇌에 심어 놓지 않았나 싶다. 몰입의 정도에 따라선 환상이 더 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국내 여행을 하고 싶을 땐 토요일 오전에 여행 다큐멘터리를 본다. 좋은 경치, 좋은 사람, 그리고 맛난 음식을 느낄 수 있다.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멋진 여행, 거기에 맛집까지 곁들여지면 우리 뇌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한다.

이렇게 상상 여행에도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된 뇌는 진짜 여행에는 더 진하게 반응한다. 현재에 대한 몰입과 집중력이 커지기 때문이다. 입스, 건강 염려를 가져오는 불안은 현재에서 자유를 느낄 때 슬며시 마음에서 자리를 떠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70호(2019년 07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