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유럽의 최고 명품 브랜드로 인정받고 있는 에르메스가 ‘보자기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스카프를 내놓았다. 그런데 그 보자기는 바로 우리의 선조들이 사용하던 전통 조각보로서 그 예술성을 현대화시킨 디자인이었다.
조각보는 작은 천도 아껴 함부로 버리지 않고 한 땀 한 땀 이어 생활에 유용한 물건으로 재탄생시켰던 우리 조상들의 귀한 예술품이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종류의 천을 삼각형, 마름모, 사각형 등의 다양한 기하학적 문양으로 조합했고, 규칙성과 불규칙성을 함께 사용하며 우리 고유의 생활 오브제를 만들어냈다.
이런 직선의 아름다움과 예술적 창의성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조각보는 추상이라는 현대회화의 길을 열었던 몬드리안의 작품에 견주어지기도 한다. 조각보의 심플한 직선과 선명한 색의 조화가 몬드리안 작품과 누가 보아도 많이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_위부터) 우리의 옛 베갯모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액자. 연한 핑크빛과 그린 손잡이의 조화가 아름다운 크리스털 저그(아르누보).
◆몬드리안 작품에 견주는 조각보
직선의 단순미와 단색의 조화를 표현하는 예술적 창의성은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언제부턴가 단순한 직선을 강조하는 심플, 블랙, 모던함이 마치 세트처럼 함께 다니며 우리의 집과 레스토랑, 카페의 인테리어를 도맡아 담당하고 있다.
최근 영화관을 다녀본 사람이라면 유명 프랜차이즈 극장의 인테리어가 모두 기하하적인 패턴의 장식과 회백색 벽, 그리고 철제 프레임으로 꾸며진 것을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주변 공간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직선의 매끄러움이 특징인 인테리어 경향은 모두 아르데코 스타일과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다.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 장식예술 박람회(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ecoratifs)’ 제목에서 유래된 아르데코(art deco) 사조는 인류가 다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는 1930년대 후반까지 그 기조를 이어갔다.
이 시기는 인류가 오랜 신분제도에서 벗어나 경제가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로 대두되며 중산층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때다. 전통을 지키며 살던 귀족층에서 신흥 상공인으로 문화 주체가 자리를 바꿈에 따라 인류의 소비 패턴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20세기 초에 처음으로 겪었던 세계대전은 사람들의 생각에 많은 변화를 주었고, 자동차로 시작된 교통혁명은 1900년대 초 비행기의 등장으로 대륙 간 이동이 수월해졌다. 자유로운 여행과 풍요로운 삶에 대한 장밋빛 희망으로 사람들은 한껏 들뜨게 됐다. 더 풍요로운 소비를 위해 곡선 위주의 수공예적인 아르누보 사조가 점차 쇠퇴하며 기계에 의한 대량 생산이 선호됐다. (사진_위부터) 한 폭의 그림처럼 핸드페인팅된 19세기 초 캐비넷 접시. 청홍과 금박무늬가
다채로운 이마리 티잔(빅토리안).
아르데코 양식의 밝은 표면과 기하학적인 무늬는 반복 가능한 기계생산을 가능케 했고 이는 모든 분야에서 역동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미국의 사회 현실과 잘 맞아떨어졌다. 세계시장의 중심으로 자리 잡은 뉴욕에서 아르데코는 더욱 급속히 퍼져 나갔는데 여기에는 1920년대 등장한 TV와 영화의 보급이 큰 역할을 했다.
TV와 영화에 등장하는 아르데코의 실내장식과 테이블웨어는 모든 사람이 추종하는 디자인이 됐고, 곧 심플함이 현대적 아름다움으로 인식됐다.
◆현대 조형미, 아르데코 예술
알퐁스 무하의 포스터에서 보듯 아르누보 시대의 색조는 엷은 파스텔 톤이지만 아르데코 시대에는 검정, 회색, 녹색의 조합과 갈색, 크림색, 주황의 조합으로 강렬한 색조가 주류를 이루었다.
1925년 이집트의 투탕카멘 무덤 발굴과 아즈텍 문명의 재발굴은 이국적 취향을 아르데코에 가미했다. 상아, 진주, 옻칠 등의 이국적 재료가 많이 쓰였으며 흑단, 마호가니처럼 값비싼 목재가 사용됐다. (사진) 색감의 조화가 모던한 우리의 옛 조각보.
기하학적인 형태와 반복되는 패턴은 이 시대 지어진 건축의 실내장식과 다양한 테이블웨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아르데코 시대에 만들어진 티포트, 트레이, 커트러리의 손잡이는 상아로 장식된 것을 종종 볼 수 있고 디너 접시 또한 은과 흑수정 등으로 장식돼 강렬한 색의 조화를 나타낸다. 보통 그릇의 가장자리에 짙은 색감의 라인을 둘렀고 기하학적 문양 혹은 추상적인 문양이 많이 표현됐다.
은 세공 예술가 장 퓨포켓은 매끄러운 표면과 기하학적인 문양에 기초를 두고 불필요한 장식을 배제해 단정하고 현대적인 제품을 추구했다. 상아와 오닉스, 장미목 등의 귀한 재료를 사용했고 스털링이나 금을 도금하는 기법을 선호했다.
르네 랄리크는 귀족 여성들만의 오랜 전유물이었던 향수병의 제조법에 획기적인 방법을 도입해 많은 여성들이 향수를 즐기게 했다.
이러한 아르데코 예술은 제2차 세계대전 전에 쇠퇴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직까지 우리 생활에 깊숙이 남아 있다. 우리가 쓰는 많은 일상용품이 심플한 직선의 아르데코 라인이고, 멋진 인테리어로 우리를 유혹하는 많은 레스토랑과 극장, 카페의 실내가 모두 블랙과 직선을 추구하는 아르데코 스타일인 경우가 많다. (사진_왼쪽부터) 스털링 오버레이 블랙 크리스털 와인 잔(아르데코), 스털링 오버레이 스카이블루 와인 잔(아르누보).
사실 직선의 단순미와 단색의 조화로 표현되는 아르데코의 미니멀리즘은 우리 고유의 가옥 형태인 한옥과도 무관하지 않다. 한옥은 흰색의 한지를 바른 실내 배경 속에 사방탁자와 같은 짙은 밤색 계통의 단순한 목가구와 기둥이 소박하고 담백한 조화를 이루도록 꾸며졌다.
이러한 우리 고유의 미니멀한 멋스러움은 현대적 아름다움으로 인식되는 심플함과도 일맥상통할 수 있는 것으로 늘 우리 곁에 있어 왔던 정서다.
에르메스가 우리의 조각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탄복해 그것을 상품화해서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한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러나 마음 한쪽에는 아쉬움과 불편한 마음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도 오래된 유물로만 취급돼 우리 생활 속에서 멀어져 있는 우리의 앤티크에 대한 애틋함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앤티크 컬렉터 백정림은…
하우스 갤러리 이고의 백정림 대표는 한국 앤티크와 서양 앤티크 컬렉터로서, 품격 있고 따뜻한 홈 문화의 전도사다. 인문학과 함께하는 앤티크 테이블 스타일링 클래스와 앤티크 컬렉션을 활용한 홈 인테리어, 홈 파티 등을 제안하고 있다. 이고갤러리 02-6221-4988, 블로그 blog.naver.com/yigo_gallery, 인스타그램 yigo_gallery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9호(2019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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