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투기 세력이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무기도 종전보다 더 강력해졌다. 환투기 주도 세력인 헤지펀드 설정액은 역대 최대 규모로 늘어났으나 레버리지 비율(증거금 대비 총투자 금액)은 ‘볼커 룰’ 규제로 금융위기 이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알고리즘에 의한 프로그램 매매로 활동이 보다 자유로워지고 공격 시점도 잘 포착하고 있다.
금융위기 이후 한동안 자취를 감췄던 환투기 세력이 활동을 다시 시작한 것은 지난해 3월 미국 중앙은행(Fed)이 금리를 올린 직후부터다. 중남미 통화 약세에 베팅하면서 아르헨티나는 환투기 세력에 손을 들면서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다. 환투기 세력의 공격으로 헤알화 가치가 급락하면서 브라질 국채에 투자한 한국인도 큰 손실을 봤다.
지난해 6월 Fed의 두 번째 금리 인상 이후 환투기 세력의 공격 대상이 중동과 남아시아 통화로 이동됐다. 빅 스텝 금리 인상 등으로 마지막까지 방어하다가 견디지 못한 터키와 파키스탄은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으나 미국과의 관계 악화로 지원을 받지는 못했다. 이란, 스리랑카 등 주변국도 마찬가지였다.
환투기 세력의 공격 대상이 아시아 통화로 이동된 것은 지난해 여름 휴가철 이후다. 투기 규모와 범위도 아시아 통화위기 이후 가장 크고 광범위하다. 인도네시아 루피화 가치는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1달러=1만5000루피’ 밑으로 폭락했다. 중국 위안화도 ‘1달러=7위안’ 선이 붕괴 위험을 느낄 정도로 환투기 세력의 집요한 공격에 시달렸다.
◆환투기 세력, 선진국 통화도 공격
중국 외환당국의 적극적인 방어로 위안화 약세 베팅에 실패한 환투기 세력이 지난해 하반기 미국이 환율보고서 발표를 앞두고 ‘일본도 환율 조작에서 피해갈 수 없다’는 경고가 나오자 곧바로 엔화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환투기 세력이 선진국 통화를 표적으로 삼은 것은 1990년대 초 조지 소로스가 영국 파운드화를 공격한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미국의 환율 조작 경계 발언 이후 일본 주가는 떨어지는데 왜 환투기 세력은 엔화 ‘약세’가 아니라 ‘강세’에 베팅하느냐 하는 점이다. 경제 실상을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주가가 떨어지면 통화가치도 약세가 돼야 한다. 그 답은 아베노믹스(아베 정부의 경제정책) 실체에 숨어 있다.
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20년’을 겪었던 것은 베리 아이켄그린 미국 버클리대 교수가 지적한 ‘엔고의 저주(curse under safe haven)’가 주요인이다. 특정국 경기가 침체되면 해당국 통화가치는 약세가 돼야 수출이 증대되고 경기가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은 엔화 가치가 강세가 돼 경기가 더 침체됐다.
“경기 실상과 통화가치가 따로 노는 악순환 국면을 차단하는 것이 일본 경기를 회복시키는 마지막 방안이다”라는 하마다 고이치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의 권고를 받아들인 것이 아베노믹스다. 2012년 말부터 아베 정부는 발권력까지 동원해 인위적으로 엔저를 유도 즉, 환율을 조작해 경기를 부양시켜 왔고 성과도 컸다. 첫 번째 의문점이 풀린다. 미국의 환율 조작 경계로 더 이상 아베노믹스가 추진되지 못할 경우 경기 둔화 우려로 주가는 떨어지고 엔화 가치는 종전대로 강세로 되돌아갈 가능성이 높다. 환투기 세력이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다. 1985년 플라자 협정 이후 엔화 강세에 베팅해 3배 이상 환차익을 거뒀던 ‘유포리아 회상(euphoria recall)’도 가세됐다. 또 하나의 의문점이 생긴다. 일본은 경기가 침체되는데 엔화 가치는 왜 강세가 되느냐 하는 점이다. 안전통화 여부는 경기가 침체될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즉, 최종 대부자(last resort) 역할을 누가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은 엔화표시 채권을 자국 국민이 96% 갖고 있어 저축률이 떨어지지 않는 한 국가 부도 위험은 희박하다.
환투기 세력이 인접국인 중국 위안화, 일본 엔화를 순차적으로 공격했다면 그다음 표적은 한국의 원화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나 가질 수 있다. 특히 우리의 경우 외환위기를 겪은 ‘낙인 효과(stigma effect)’가 있는 만큼 당시처럼 환투기 세력이 공격한다면 원화 약세에 베팅하지 않겠느냐는 시각이 우선적으로 나올 가능성이 높다.
1990년대 후반 환투기 세력이 원화 약세에 베팅한 것은 외화 보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탓도 컸지만 궁극적인 요인은 따로 있었다. 나라 밖에서는 위기가 곧 닥친다고 경고하는데도 정작 당사국인 한국 경제 각료는 “펀더멘털(경제 기초여건)이 괜찮다”는 안이한 경기 진단과 미흡한 대처, 부처 간 갈등이 궁극적으로 외환위기로 몰고 갔던 가장 큰 요인인 것이다.
외환위기 당시 대내외 상황을 보면 미국과 다른 국가 간 따로 노는 ‘대발산(Great Divergence, GD)’이 시작됐다. GD가 시작됐던 1994년 이후 미국 Fed는 정책금리를 3.75%에서 4.25%로 인상한 이후 1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6%까지 올렸다. 비슷한 시점에 독일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는 정책금리를 5%에서 4.5%로 인하했다. 일본은행(BOJ)을 비롯한 미국 이외의 선진국 중앙은행도 금리를 내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 4월에는 일본 경제를 살리기 위한 ‘역(逆) 플라자 합의’ 이후 달러 강세를 용인하는 ‘루빈 독트린’ 시대가 전개됐다. 루빈 독트린이란 당시 로버트 루빈 미국 재무장관이 달러 강세가 자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전개됐던 슈퍼 달러 시대를 말한다. 엔·달러 환율의 경우 달러당 79엔에서 148엔까지 급등했다.
미국 경제도 견실했다. 클린턴 정부 출범 이후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보기술(IT)이 주력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신경제(new economy) 신화’를 낳았다. 경제 위상도 높았다. 그 결과 ‘외자 유입→자산 가격 상승→부(富)의 효과→추가 성장’ 간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면서 전후 최장의 호황기를 누렸다.
신흥국은 대규모 자금 이탈에 시달렸다. 1994년 중남미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국가채무 불이행 사태까지 이어지는 신흥국 위기가 잇달아 발생(그린스펀·루빈 쇼크라 부름)했다. 미국도 슈퍼 달러의 부작용을 버티지 못하고 2000년 이후에는 ‘IT 버블 붕괴’라는 위기 상황을 맞았다.
‘GD’가 다시 시작됐다. Fed는 출구전략의 일환으로 2014년 10월 말 양적완화(QE) 종료에 이어 이듬해 12월부터 금리를 인상해 오고 있다. 출구전략이란 금융위기로 흐트러졌던 비정상 국면을 정상 국면으로 돌려놓는 것을 말한다. ‘푸는 것’보다 ‘회수하는 것’이 더 어려운 통화정책 관행을 감안하면 또 하나의 험난한 길이다.
비슷한 시기에 유럽중앙은행(ECB)은 마이너스 금리 폭을 확대하고 양적완화 시한을 연장했다.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는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추가 금융완화책을 보완하겠다는 의사도 빼놓지 않았고 그 후 필요할 때마다 실행에 옮겨 왔다. 아베노믹스에 한계를 느낀 BOJ도 마이너스 금리제도를 도입해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Fed와 ECB(다른 선진 중앙은행 포함)는 실물경제 여건 면에서 격차가 크지 않는 한 동일한 통화정책 기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세계 경제와 국제금융시장의 안정을 기하기 위한 묵시적인 합의 때문이다. Fed와 ECB가 서로 다른 길을 걷는 것은 1994년 이후 21년 만에, 1999년 ECB 설립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트럼프 정부의 달러 정책은 출범 초 약달러 정책은 무역적자 축소에 도움이 되지 못함에 따라 지난해 3월 래리 커들러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 취임 이후 강달러 정책으로 바뀌었다. 신흥국 입장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제2 루빈 독트린’이라 불리는 ‘커들러 독트린’ 시대가 전개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달러 가치는 ‘머큐리(Mercury)’로 표현되는 펀더멘털 요인과 ‘마스(Mars)’로 지칭되는 정책 요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기대해볼 수 있는 것은 Fed는 최악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게임을 선택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다. Fed가 추가로 금리를 올려 ‘슈퍼 달러’ 시대가 전개되면 미국과 신흥국 모두에 최악의 시나리오가 닥칠 수 있기 때문이다. ◆불황형 흑자 한국, 외환 리스크 없나
현재 우리 외환보유액은 충분하다. 언제든지 꺼내 쓸 수 있는 2선 외화(캐나다와 맺은 상시 통화스와프 제외)까지 포함한다면 5300억 달러가 넘는다. 외환위기가 발생할 당시 외환보유액인 300억 달러보다 무려 17배 이상 늘어났다. 가장 넓은 의미의 캡티윤 방식에 의한 적정 외환보유액인 3800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다.
하지만 우리 경제 앞날과 관련해 경착륙, 중진국 함정, 샌드위치 위기, 일본형 복합 불황, 베네수엘라 사태 등 각종 비관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우리 국민도 90% 정도가 경기가 침체되고 있다고 공감하고 있는데 정작 정책당국은 최근까지 회복되고 있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해외 시각도 악화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초 크리스토프 하이더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 사무총장은 “한국 경제가 갈라파고스 함정에 빠지고 있다”고 작심 발언을 한 적이 있었다. 갈라파고스 함정이란 중남미 에콰도르령(領)인 갈라파고스 제도가 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1000km 이상 떨어져 있는 것에 빗대 세계 흐름과 격리되는 현상을 말한다.
경기가 침체되고 해외 시각도 흐트러지는 속에 우리 경제에 나타나고 있는 가장 뚜렷한 특징 중 하나가 ‘불황형 흑자’다. 성장률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함께 세계 양대 평가사인 무디스는 올해 성장률을 2.3%까지 내려 잡았다. 가장 낮은 잠재성장률 2.8% 대비 0.5%포인트의 디플레 갭이 발생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는 늘어나는 추세다. 빠른 시일 안에 경상수지 흑자가 줄어들지 않으면 지정 요건을 완화해 처음 적용할 올해 4월 미국 재무부의 환율 보고서에서 환율조작국으로 걸릴 수 있다.
불황형 흑자가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켄그린 교수가 지적했던 ‘원고(高)의 저주(curse under safe haven)’에 걸릴 가능성이다. 경기가 침체되면 원화 가치가 떨어져야 수출이 늘어나고 경기가 회복될 수 있다. 하지만 경상수지 흑자 때문에 원화 가치가 올라가면 수출이 감소되고 경기가 더 침체되는 악순환 국면에 빠진다.
불황형 경상수지 흑자가 시정돼야 미국의 통상 압력이 줄어들고 경기 침체 부담도 줄일 수 있다. 통화정책도 외자 이탈 방지, 강남 등 수도권 집값 잡기, 가계부채 억제 등과 같은 2선 목표보다는 물가 안정, 고용 창출(넓은 의미로 경제 성장)과 같은 1선 목표 달성에 보다 충실해야 한다.
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5호(2019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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