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라이프 애자일 오피스 전경.
오렌지라이프 애자일 오피스 전경.
ASSET • FINANCE INSIDE [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 사진 서범세 기자·각 사 제공]

보수적인 금융권의 체질을 바꿔라. 신기술로 무장한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금융 산업에 뛰어들면서 금융사들이 생존을 위한 혁신의 일환으로 애자일 조직을 속속 도입하고 있다.

오렌지라이프의 ‘2030 스쿼드(소그룹)’팀은 지난해 돌발 상황에 맞닥뜨렸다. 한 직원의 실수로 프로젝트를 전면 수정해야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팀원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류충하 브랜드마케팅팀 과장은 “팀원들 모두 즉시 하던 일을 내려놓고 해당 상황에 긴급하게 대응해 빠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공동체 의식’이 팀원들을 강하게 묶어준 덕분이었다.

애자일(agile: 기민한) 조직 도입 후 수직적 관계에서 벗어나, 함께 과제를 설정하고 역할을 나눠 맡는 수평적 문화로 바뀌면서 팀원들의 자발적 참여와 책임의식이 성장했다는 것이다.
조직이 유연해지고 결속력이 강화되니 성과도 올라갔다. 종전 신상품 준비 기간이 2개월 이상 걸렸다면 애자일 조직으로 바뀐 뒤 3~4주로 대폭 줄었다. 과거에는 한 부서가 신상품을 개발하면 그 결과물을 다른 부서가 차례대로 넘겨받아 점검하는 과정을 거쳤다. 만약 그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되면 초기 단계로 돌아가 상품을 전면 수정해야 했다. 하지만 애자일 도입 이후 상품 개발 초기부터 언더라이팅, 보험금 심사 등 여러 유관 부서가 동시에 실시간 피드백을 진행해 준비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었다.

오렌지라이프는 2018년 회사 간판(옛 ING생명)을 바꿔 달았고, 신한금융그룹의 품에 안겼다. 거센 파고(波高) 앞에서 오렌지라이프는 ‘혁신’을 생존 전략으로 택했다. 지난해 4월 보험업계 최초로 전사적으로 애자일 조직을 도입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조직 개편을 통해 본사 직원 500여 명 중 절반에 가까운 200여 명을 애자일 조직 소그룹으로 배치했다.

정문국 오렌지라이프 대표는 “부서 간 장벽을 허물고 여러 기능의 조직원을 하나의 스쿼드로 구성해 업무에 관한 모든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고객 니즈와 시장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오렌지라이프의 애자일 소그룹은 각기 다른 직무를 가진 구성원이 업무 중심으로 모여 한 팀이 되는 형태를 이룬다. 영업, 마케팅, 상품 기획, IT 등 각 부서 간 경계를 허물어 소그룹으로 헤쳐 모였다. 오렌지라이프의 애자일 조직은 도입 채 1년이 되지 않은 시행 초기임에도, 국내 기업들의 대표적인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비단 보험사만이 아니다. “빠른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속자생존(速者生存) 시대를 맞아 은행, 카드사 등 전 금융권에서 ‘애자일 조직’ 실험이 속속 진행 중이다.

IT 기업처럼 ‘민첩하게’ 수평적 소통 강점
오렌지라이프 애자일 오피스 전경.
오렌지라이프 애자일 오피스 전경.
‘애자일’이라는 용어는 소프트웨어의 개발 과정에서 나왔다. 기업들의 전통적 업무 방식인 폭포수(waterfall) 방식은 상품 개발 전부터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설계해 최종 결과를 내놓는 방식이다. 만약 결과물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다시 기획 단계로 돌아가야 한다. 반면 애자일 방식은 일정한 주기를 정해 중간 중간 피드백을 받아 수정해 나가는 방식으로, 고객과 환경의 변화에 즉각적이고 민첩하게 반응할 수 있다.

2001년 17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애자일 매니페스토(Agile Manifesto)’를 공식적으로 발표하면서 ‘애자일’이 화두에 떠올랐다. 네 가지 핵심 가치는 프로세스나 도구보다는 개인과의 상호작용을, 포괄적인 문서보다는 작동하는 소프트웨어를, 계약에 대한 협상보다는 고객과의 협력을, 계획 고수보다는 변화에 대한 대응을 내걸었다.

애자일 조직은 민첩한 대응을 위해 소그룹을 구성하고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특징이다. 오렌지라이프는 임원-부서장-중간 관리자-직원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직급 체계를 철폐하고 상하가 없는 수평적 팀으로 바꿨다. 멀티 기능 형태의 소그룹 18개를 꾸려 업무에 대한 의사결정 권한을 부여했다. 다양한 직무별로 모인 팀원들은 직급에 상관없이 하나의 과제를 놓고 자유롭게 자기의 의견을 이야기하고 역할을 나눈다.

기능 중심으로 나뉘었던 조직이 업무 과제 중심으로 모이자 한 팀 내에서 집단 지성을 통해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실행하는 도중에 실패하더라도 민첩하게 다른 대안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시행착오를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가 조성되니 팀원들 간에 토론도 여느 때보다 활발해졌다. 일례로 사무실 한쪽에는 ‘무한도전상’이 걸려 있다. 실패 사례를 공유해서 상을 주는 것이다. 설혹 시행착오를 겪더라도, 그 실패를 통해 배운 점을 나누고 다시 도전을 북돋워 성장으로 나아가려는 취지다.

박영선 오렌지라이프 브랜드마케팅팀 과장은 “직원이 부서장으로부터 1:1로 업무를 지시받으면 결과에 대한 부담감이 큰데, 애자일 도입 후 팀원들이 협력해 과제를 수행하니 기꺼이 책임을 지게 되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감수해보자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고 전했다.

애자일 조직은 성과관리 주기를 짧게 설정해 업무의 효율성을 기한다는 점도 특징이다. 구글은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 소수의 개발자로 구성된 팀이 매일 아침 회의에서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통해 프로젝트의 계획 및 변경 사항을 점검하며, 진행 성과는 2~3주 간격으로 리뷰한다. 3개월마다 전체 성과에 따라 인력과 자원을 과감하고 신속하게 재조정한다.

오렌지라이프도 매일 오전 9시 소그룹들이 보드판 앞에 모여 일어선 채로 업무 진행 상황과 지원 사항을 공유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다양한 직무별로 모인 팀원들은 직급에 상관없이 하나의 과제를 놓고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팀별 사안을 결정한다. 매일의 짧은 회의로 업무 진행 상황 및 업데이트 인식이 가능해졌다. 이러한 애자일 방식은 만연했던 초과 근무와 마감 기간 누락 같은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도 주목받는다.

천지원 오렌지라이프 애자일 코치는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과거처럼 초과 근무를 많이 하거나 상사의 지시가 강하게 전달된다고 업무의 효율성이 올라가지 않는 환경이 됐다”며 “주 52시간 근무 및 워라밸(work & life)을 추구하는 젊은 직원들의 라이프사이클에 맞는 조직문화 구축에 애자일 조직 도입은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보수적인 금융권에 ‘디지털’ 타고 혁신 바람
2017년부터 애자일 실험에 나선 국민은행과 하나은행.
2017년부터 애자일 실험에 나선 국민은행과 하나은행.
애자일 방식은 국내 금융권으로 빠른 속도로 전파되고 있다. 디지털·코딩 능력으로 무장한 인터넷 기업들이 금융의 영역에 침투하면서 금융권은 전에 없던 위기감을 느꼈다. 전통적인 금융 사업 기반이 흔들리면서 보수적이고 안정 지향적인 금융권도 ‘애자일’ 방식으로 체질 개선에 나섰다.

김인현 투이컨설팅 대표는 “디지털로 전환되는 금융 환경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 현업과 IT 조직의 유연한 협력을 중심으로 금융권의 애자일 도입이 확산되는 추세”라며 “방대하고 구체적인 업무 계획을 수립하기보다는 소규모 그룹으로 다양한 시도를 빠르게 해낼 수 있는 방식이 선호되고 있다”고 했다.

KB금융은 윤종규 회장의 의지로 2017년부터 KB국민은행, KB국민카드 등 그룹사에 애자일 조직을 도입했다. KB국민은행은 현재 ACE(Agile, Centric, Efficient)라는 명칭으로 디지털금융그룹, 개인고객그룹, 경영기획그룹 등 3개 그룹에서 12개 애자일 조직을 운영 중이다.

KB국민은행은 에이스 조직을 통해 고객 중심의 비대면 전문 상담 서비스를 강화한 ‘스타링크’를 론칭했고, 교직원의 금융 니즈와 소비 패턴에 부합하는 맞춤형 금융상품 솔루션을 개발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KB국민은행 관계자는 “기획 중심 임시조직(TFT 등)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실행 중심의 새로운 조직 운영 방식 도입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됐다”며 “향후 에이스 조직의 효율적인 운영을 통해 은행의 디지털화(digitalization)를 가속화할 계획이다”고 밝혔다.

KB국민카드는 창의적이고 역동적인 조직을 구축하기 위해 2018년 초 스웨그(Smart Working Agile Group, SWAG)라고 이름 지어진 별도 상설의 애자일 조직을 신설했다. 본부 내 인력과 자원 운용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본부 주도 자율 조직제’도 도입했다.

스웨그 조직은 고객의 니즈와 급변하는 시장환경 변화에 대응 가능한 자율적인 조직 구성을 통해 신사업 개발 및 전사적 혁신 과제 중심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또한 조직 내 단순 반복 업무의 효율화를 위해 로보틱스 프로세스 자동화(RPA)를 도입했다.

KEB하나은행은 앞서 2017년부터 프로젝트 중심의 셀(cell) 조직을 운영 중이다. 엄밀히는 IT업계에서 얘기하는 애자일 방법론에 기반을 두고 운영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프로젝트에 따라 유연한 업무 환경을 만든다는 측면에서 유사하다.

셀은 주도적으로 일에 임하며 결과에 책임을 지면서 빠른 결과를 낼 수 있는 조직 운영 방식이며, 전통적 은행 업무의 정형화된 프로세스를 허물어 일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보는 실험이 진행되고 있다. 현재 미래금융그룹 내 기획·혁신 기술 개발을 담당하는 미래금융R&D본부, 사업화와 운영을 담당하는 미래금융사업본부 아래 5개 셀이 운영 중이다. 각 셀 부문의 장에게는 수행 프로젝트에 한해 부서장에 준하는 책임과 권한을 부여해 자율성을 보장하고 있다.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기존 은행의 조직은 대부분 정형화된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정형화된 틀 안에서 운영되는데, 미래금융그룹은 변화의 접점에서 창의적인 실험을 하는 조직이기 때문에 정형화된 틀에서 벗어나야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며 “시행 2년을 맞아 ‘일하는 방식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미래금융그룹 외 전행에서 필요에 따라 부서의 범위를 넘는 수준까지 유연하게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조직을 운영할 수 있도록 규정 등을 개편할 예정이다”고 밝혔다.

NH농협은행은 2019년 새롭게 여는 디지털R&D센터에 애자일 조직을 도입한다. 창의적인 근무 환경 조성을 위해 자율좌석제, 모바일 오피스, 클라우드 개인용컴퓨터(PC) 도입 등 다양한 시도를 하겠다는 방침이다. 은행권 최초로 시도하는 디지털R&D센터에서 농협은행은 인공지능(AI), 클라우드, 사물인터넷(IoT) 등 최신 기술을 연구하고, 이를 사업에 적용하기 위한 테스트를 진행할 계획이다.

현대카드는 2018년 초 애자일을 주제로 디지털 환경에 맞는 조직 개편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기존에 있던 부본부나 센터 등은 폐지하고 본부-실-팀으로 조직체계를 일원화했다. 기존 조직체계에 비해 의사결정 과정을 단순화하고 업무를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기업문화 또한 디지털화되고 있다. 현대카드 관계자는 “지난 2월 애자일 조직 도입 후 ‘플렉스 타임(Flex Time)’제나 애자일 오피스 구축 등 기업문화의 인프라를 점진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애자일 조직의 밑거름을 다져왔다”며 “단순한 조직 개편만으로는 애자일이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현대카드에 가장 적합한 애자일을 찾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4호(2019년 01월)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