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리먼브러더스 사태가 발생한 지 10년이 됐다. 1980년대 후반 블랙 먼데이(선진국), 1990년대 후반 아시아 외환위기와 러시아 모라토리움(신흥국), 2000년대 후반 리먼 사태(선진국)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한 점을 감안하면 2010년대 후반에는 다음 금융위기 후보지로 신흥국이 일찍부터 지목돼 왔다.
공교롭게도 지난 3월 이후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에 이어 이란, 터키 등 중동 국가가 잇달아 외자 이탈에 시달리면서 금융위기 조짐이 재현되고 있다. 여름 휴가철 이후에는 아르헨티나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긴급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등 오히려 악화되는 분위기다.
리먼 사태 이후 지난 10년 동안 늘어난 달러 부채 만기가 돌아오는 시기에 미국 중앙은행(Fed)의 금리 인상(3월, 6월)과 맞물리면서 원리금 상환 부담이 급증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금리 차와 환차익을 겨냥해 이동되는 캐리자금도 네거티브 트레이드 여건이 형성돼 달러계 자금을 중심으로 외자 이탈이 가세되고 있다.
신흥국의 미숙한 정책 대응도 문제다. 외자 이탈을 수반한 달러 부채 상환에 가장 적절한 대책은 외환보유액을 확충하고 외자 조달 능력을 키우는 일이다.
그러나 지난 3월 이후 금융위기 조짐에 시달리는 대부분의 신흥국은 금리 인상으로 대처해 오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경우 정책(기준)금리를 60%까지 올렸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외면한 금리 인상은 실물경기 침체와 추가 외자 이탈 간 ‘악순환 고리(vicious cycle)’를 형성시킨다. 20년 전 태국,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국가가 겪었던 외환위기의 직접적인 배경이다. 일부 신흥국은 이런 악순환 고리가 형성됨에 따라 금융위기가 발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
리먼 사태가 발생한 지 꼭 10년이 되는 시점에서 최대 관심사로 부각되고 있는 ‘다음 금융위기가 어디에서 발생한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기존 금융위기 경험국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특징을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자본수지 대용변수의 표준편차 기법’을 활용해 금융위기 경험국에서 나타난 공통점은 크게 4가지로 요약된다. ◆금융위기 겪은 국가들의 공통 특징은
금융위기 경험국이 초기 국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징은 신용디폴트스와프(CDS) 프리미엄이 급증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의 CDS 프리미엄도 2003년 초 SK 글로벌 분식회계 사건으로 185bp(1bp=0.01p)까지 급등하기도 했으나, 이후 하락세를 이어가다가 2007년 4월 말에는 사상 최저치인 14bp까지 급락했다.
하지만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의 영향이 처음으로 파급되기 시작한 2007년 7월 이후 상승세로 전환해 2008년 9월에 발생했던 리먼 사태 이후 급등세를 나타냈다. 같은 해 10월 27일에는 사상 최고치인 675bp를 기록했다가 10월 말 미국과의 통화스와프 체결을 계기로 하락했다. 시차가 있긴 하지만 외평채 가산금리 등과 같은 코리아 프리미엄을 나타나는 각종 지표도 CDS 프리미엄과 동일한 경로를 거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별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진행 과정에서 CDS 프리미엄의 상승폭을 비교해보면 미국보다 신흥국이 많이 올랐다. 같은 신흥국 가운데에서는 중국, 태국 등 여타 아시아 국가의 CDS 프리미엄도 급등했으나 우리의 상승폭이 유난히 컸다는 점이 눈에 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2000년대 이후 신흥국에서는 내부 요인보다 외부 요인에 의해 금융위기가 발생할 뿐만 아니라 한국과 중국처럼 경제 여건이 좋은 국가일수록 그 정도가 심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CDS 프리미엄과 외국자본 유·출입, 환율 움직임과의 관계를 보면 CDS 프리미엄이 장기 평균치에 비해 표준편차의 2배를 벗어나기 시작하면 외자 유입이 감소하기 시작하며, 4배를 벗어나면 CDS 프리미엄이 이전보다 빠르게 상승하는 쏠림현상이 발생했다. 비슷한 시점에서 외자 순유입 규모도 장기 평균치에 비해 표준편차의 2배 이상 감소하는 이른바 금융위기 단계에 진입했다. 이때부터 위기 발생국의 통화가치는 절하(환율 상승)되기 시작했다.
CDS 프리미엄이 급등한 이후 순차적으로 금융위기 발생국의 통화가 큰 폭으로 평가절하가 됐던 것도 공통점이다. 그만큼 외국인 자금이 유입될 당시에는 평가절상이 되다가 외국자본 유입이 갑자기 중단 이후 곧바로 대량 이탈로 급진전되는 과정에서 통화가치가 큰 폭으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갈수록 국제 간 자금 흐름이 투기적 속성이 강한 각종 캐리자금이 의해 주도됨에 따라 환율 변동성이 심해졌던 점도 주목된다. 금융위기가 경험국의 사례별 실질실효환율(REER) 변동률을 보면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당시 태국과 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 4개국은 평균 45.5%,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사태가 발생할 때 아르헨티나, 브라질, 칠레, 터키 등 6개국은 21.1%, 리먼 사태가 발생한 이후 한국, 브라질, 인도네시아, 터키 등 8개국은 20.1% 평가절하가 된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마다 다소 차이가 있으나 시기별로는 대규모 외자 이탈 발생국의 통화가치가 장기 평균치에 비해 표준편차의 3배를 벗어나거나 해당연도 절하율이 직전년도의 절하율을 10%포인트 상회할 경우 이전보다 빨라지는 쏠림현상이 나타나면서 금융위기 단계로 악화됐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한국이 그랬다.
이때 위기 발생국은 외환보유액을 풀어 외환시장 안정에 나서면서 외환보유액이 충분하다고 인식되면 CDS 프리미엄이 빠르게 떨어지는 진정 국면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위기 발생국의 외화 유동성에 의심이 갈 경우 투기성 자본의 집중적인 공격 대상이 되면서 IMF의 긴급 구제금융 지원 등과 같은 계기가 마련되기까지 혼란 국면은 더 지속됐다.
대규모 외자 이탈 전후로 이뤄진 대폭적인 평가절하로 무역수지가 개선되면서 중장기적으로는 대외 부문의 균형을 회복하고 금융시장과 실물경기가 안정을 찾는 원동력이 됐다. 주목되는 것은 아시아 외환위기와 러시아 국가부도 사태를 잇달아 겪으면서 대규모 외자 이탈이 발생한 국가를 중심으로 대부분 신흥국이 외환보유액 확충에 대거 나섬에 따라 그 후 위기가 발생한 국가에서는 자국 통화가치에 대한 평가절하 폭이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신흥국은 올해 안에 2000억 달러, 내년부터 2025년까지 매년 4000억 달러 이상 달러 부채 만기가 돌아온다. 지난 3월, 6월 회의에서 두 차례 금리를 올린 Fed는 9월과 12월 회의에서 추가적으로 금리를 올릴릴 것으로 예상된다. 신흥국 외화 사정이 지금보다 더 악화될 수 있다는 의미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대발산(great divergence)의 악몽’이 되살아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대발산이 일어났던 1994년 이후 상황을 보면 독일의 분데스방크(유럽중앙은행 창립 이전에 유럽 통화정책의 중심 역할)는 금리를 5%에서 4.5%로 내렸다. 같은 시점에 Fed는 3.75%에서 4.25%로 인상한 이후 채 1년도 못 되는 짧은 기간 안에 6%까지 올렸다.
미국 경제도 견실했다. 클린턴 정부 출범 이후 수확체증의 법칙이 적용되는 정보기술(IT)이 주력 산업으로 부상하면서 ‘고성장하에 저물가’라는 신경제 신화를 낳았다. 그 결과 ‘외자 유입→자산 가격 상승→부(富)의 효과→추가 성장’ 간 선순환 고리가 형성되면서 달러 강세 시대가 전개됐다.
신흥국은 대규모 자금 이탈에 시달렸다. 1994년 중남미 외채위기,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1998년 러시아 국가채무 불이행 사태까지 이어지는 신흥국 위기가 발생(그린스펀 쇼크라 부른다)한 것이다. 미국과 유럽 등 다른 국가 간 금리 차가 벌어지고 감세, 리쇼오링 등으로 또 다른 신경제 신화를 쌓아 가는 미국 경제의 지금 상황과 비슷하다. ◆금융위기 가능성 높은 신흥국은
지난 7월 말을 기준으로 IMF의 모리스 골드스타인 지표와 글로벌 투자은행(IB)이 활용하는 외환상환계수로 신흥국 금융위기 가능성을 점검해보면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터키, 파키스탄, 이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이 높게 나온다. 브라질, 인도네시아, 멕시코, 필리핀,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등은 그다음 위험국이다.
금융위기 발생 고위험국으로 분류되는 중남미 국가는 외채 위기로 학습효과가 있는 데다 미국과의 관계(베네수엘라 제외)도 비교적 괜찮다. 하지만 이란, 터키처럼 미국의 경제 제재를 받거나 협조하지 않는 국가와 중국에 편향적이거나 일대일로(一带一路) 계획에 과도하게 참여하는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과 같은 이슬람 국가는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더라도 받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IMF의 최대 의결권을 미국이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도 외자 이탈 방지를 위해 금리를 올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시각도 고개를 들고 있다. 신흥국 금융위기 사례를 보면 외자 이탈 방지의 최선책은 ‘금리 인상’보다 ‘외환 보유를 충분히 확보하는 방안’이다. 연구자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외환보유액이 10억 달러 증가하면 신흥국이 위기를 겪을 확률이 평균 50bp 정도 낮아지는 것으로 추정된다.
적정 외환보유액을 추정하는 방법은 3가지다. 즉, 과거 경험으로부터 잠재적인 외화 지급 수요를 예상 지표로 삼아 구하는 ‘지표 접근법’, 외환보유액의 수요함수를 도출해 추정하는 ‘최적화 접근법’, 외환보유액 수요함수로부터 행태 방정식을 추정해 계량적으로 산출하는 ‘행태 방정식 접근법’으로 구분돼 왔다. 세 방안 중 가장 널리 사용되는 것은 지표 접근법이다. 이 방식은 외환 보유 동기에 따라 △국제통화기금(IMF) 방식 △그린스펀·기도티 방식 △캡티윤 방식으로 세분된다. 우리 외환보유액은 ‘1선(직접 보유)’과 ‘2선(통화스와프 등 간접 보유)’ 자금을 합하면 5000억 달러가 넘는다. 가장 넓은 갭티윤 방식으로 추정된 적정 외환보유액은 3700억 달러 내외다.
우리처럼 외자 이탈에 따른 방어 능력이 갖춘 여건에서 금리 변경과 같은 통화정책은 고용 창출에 최우선 순위를 둬 추진하고 있는 재정정책과 보조를 맞출 필요가 있다. 가뜩이나 스텝과 라인 간 갈등이 경기에 부담이 되는 상황에서 통화정책과 재정정책까지 엇박자가 날 경우 우리 경제는 ‘총체적 난국’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한상춘 한국경제 논설위원 겸 한국경제TV 해설위원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61호(2018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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