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윤대현 서울대학교병원 강남센터 정신의학과 교수]
삶에 지쳐 있을 때 어떤 친구에게 더 위로를 받을까. 힘내라고 격려하며 열심히 해결책을 이야기해주는 친구, 아니면 커피 한 잔이나 소주 한 잔을 내밀며 묵묵히 내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친구. 아직 힘이 남아 있고 살짝 지쳤을 땐 전자의 친구가 좋을 수 있다.
파이팅을 해주면 같이 파이팅 할 힘이 남아 있고 같이 하다 보면 실제 지친 마음에 에너지가 충전될 수 있다. 그런데 너무 지쳤을 때 누군가 와 계속 힘내라고 한다면 더 짜증이 날 수 있다. 미운 감정까지 생겨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릴 수도 있다.
너무너무 지쳤을 때, 말 주변이 없어도 공감 어린 시선으로 묵묵히 옆을 지켜주는 친구에게서 더 큰 위로를 받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상대방에게 따뜻한 에너지를 전달하는 소통 방법에 말이 3등이라고 한다. 2등은 스킨십. 그렇다면 1등은 아이 콘택트(eye contact), 눈 맞춤이다. 비언어적 소통이 더 효과적인 위로의 도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눈만 맞춘다고 상대방에게 위로의 에너지를 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똑 같은 눈 맞춤이지만 위로가 아닌 공격의 느낌이 될 수 있다. ‘너 왜 째려봐’처럼. 이 또한 비언어적 소통의 강력함이다. 눈빛만으로 사람을 제압하거나 공격성을 보일 수 있다. “내 눈을 쳐다보고 이야기해봐. 말로 사람을 속여도 눈으론 속일 수 없어”란 말은 눈에 마음의 진실이 담겨 있음을 이야기한다. 내 감정을 숨기고 싶을 때 나도 모르게 우리는 상대방이 내 눈을 보지 못하게 돌려 버린다.
눈빛 위로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상대방에 대한 공감이 작동해야 하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에게 나눠줄 정도로 충분한 에너지가 내 마음에 있어야 한다. 공감이란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연결된 것이다. ‘공감해야지’ 생각한다고 공감이 되지는 않는다.
공감은 자연스러운 마음의 반응이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이 있을 때 공감은 작동한다. 또 상대방이 그 애정에 반응해야 비로소 마음은 연결이 된다. 연결이 됐다고만 해서 지친 상대방을 따뜻하게 위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눠줄 공감 에너지가 충분해야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다.
나도 고갈돼 있는데 남에게 억지로 주다 보면 공감을 전달할 때 행복감이 아닌 통증이 찾아오고 스스로 번아웃이 돼 버릴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연결된 통로로 짜증이 스며들어가 오히려 상대방의 마음을 더 다운시킬 수도 있다.
서로 섭섭한 관계가 아닌 미안한 관계가 좋은 관계라 생각한다. 섭섭하다는 것은 내가 준 것이 받은 것보다 많다고 느낄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미안함은 준 것보다 받은 것이 더 많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론적으로 최상의 관계는 5대5로 정확히 따뜻한 공감 에너지를 주고받는 것이겠지만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6대4 때론 4대6 정도로 서로가 조금은 돌아가며 섭섭함과 미안함을 느끼지만 전체적으로는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서로가 미안한 관계라 생각한다.
처음부터 주고받는 에너지의 밸런스가 맞으면 금상첨화지만 쉽지 않다. 그래서 친해져 가면서 튜닝이 필요하다. 잘 주는 쪽은 받는 연습을 해야 한다. 줄 것이 보이는데 안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런데 공감 능력이 좋아 더 많이 쏟아 붓게 되면 상대방은 더 의존적이 될 수밖에 없다. 다르게 표현하면 상대방의 주는 기쁨을 뺏는 것일 수도 있다.
서로에게 지칠 때 위로를 주는 힐링 프렌드가 되기 위해선 공감 케미도 기본적으로 좀 맞는 친구를 찾아야 하고 그 이후도 서로 주고받는 것을 잘 튜닝해 서로를 고갈시키지 않고 공감 채널에 에너지가 잘 오고 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친구가 여러 명 있는 것이 필요하다. 둘 다 다른 일로 고갈됐을 때는 위로를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번아웃된 상태에서 서로 위로를 원하면 서로가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조금은 에너지가 더 풍성한 친구에게서 위로를 받는 것이 현명하다. 그런데 위로를 받았다면 그 사람에게 그만큼의 위로를 돌려줄 빚이 생긴 것이고 기회가 될 때 위로로 갚아야 한다. 신용이 올라가야 대출을 많이 받을 수 있다. 공감의 주고받음에도 마음의 신용도가 중요하다. 너무 주기만 하는 사람, 너무 받기만 하는 사람 모두 공감 불량자가 되기 쉽다.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행복하기 때문에 생존했다’는 주장이 흥미롭다. 행복이 목적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였기에 인류가 오랜 세월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인데, 그럼 무엇을 할 때 행복한가. 단순화하면, ‘좋은 사람과 맛있는 것 먹을 때 행복하다’는 것이다. 최근 <리틀 포레스트>란 영화를 보고 행복했다. 심심할 듯해 기대 없이 보았는데 반전이었다.
잔잔한 시골의 풍경 안에 서울 생활에 지쳐 귀향한 친구를 위로하는 우정, 그리고 직접 재배한 재료로 만드는 맛난 음식들이 가득 차 있었다. 행복과학 입장에서 보면 심심한 영화가 아니라 자극적인 영화였던 셈이다. 맛있는 걸 먹는다는 것은 신체적 건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또 좋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사회적 기능이 잘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인 셈이다. 몸 건강하고 사회에 잘 적응하면 생존할 수 있다. 음식과 사람을 만날 때 찾아오는 쾌감이 우리의 생존을 도왔다는 주장에 일리가 있다.
행복에 대한 연구를 보면 생존이 필요한 수준까지는, 즉 먹고 살만한 정도까지는 수입의 증가에 따라 행복의 증가가 함께 일어난다. 그러나 먹고 살만해진 이후엔 행복과의 연관성이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돼 있다. 왜 그럴까. 돈이 많으면 더 행복할 것 같은데, 자족(自足, self-sufficiency)이 증가하기 때문이란 연구 결과가 있다. 돈이 많으면 남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마음도, 남을 도와줄 마음도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행복의 원천인 사람과 멀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2018년의 하반기 내 마음을 위한 감성 목표로 ‘힐링 프렌드 만들기’를 권한다.
[본 기사는 한경머니 제 159호(2018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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