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올 들어 정부의 부동산 안정화 대책으로 대출 증가세가 주춤해지자 은행들은 가계대출 대신 중소기업대출과 비이자수익 확대에 열을 올리고 있다. 특히 비이자수익 가운데서도 신탁 상품 수수료 수익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4대 시중은행의 지난해 누적 신탁수수료는 7893억 원으로 전년 대비 무려 64.3% 증가한 것으로 집계됐다.
국민은행이 3060억 원으로 67.8% 늘었고, 하나은행도 1747억 원으로 41.3% 증가했다. 이어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이 각각 1696억 원(72.2%↑), 1390억 원(82.9%↑)으로 뒤를 이었다. 같은 기간 신탁 수탁고는 신한은행이 57조5000억 원으로 가장 많았고 하나은행이 52조9000억 원으로 뒤를 이었다.
이 같은 호조세는 지난해 주식시장 호황으로 은행 신탁 상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파생결합증권(DLS)인 주가연계신탁(ELT) 규모가 크게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신탁 상품 본연의 기능인 종합자산관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최근 각 은행들이 시장에 내놓고 있는 신탁 상품의 진화를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 ‘진짜’ 금융주치의, 신탁의 진화
시중은행들이 신탁 시장에 주목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신탁이 저금리·고령화 시대의 ‘진짜’ 금융주치의로 주목받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신탁은 예금, 펀드 등 금융자산부터 부동산 등 비금융자산의 관리, 은퇴 이후의 증여·상속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만능 자산관리 툴(tool)로서의 기능이 가능하다.
배정식 KEB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장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신탁은 고액자산가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이제는 은퇴 전후의 고객들을 위한 라이프사이클 서비스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다”며 “인구구조 변화와 맞물려 금융의 역할과 책임도 그에 맞춰 변해야 하는 시점이다”라고 설명했다.
신탁 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인 행보를 보여 온 곳은 하나은행이다. 하나은행은 ‘신탁법’ 개정 이전인 2010년 ‘하나 리빙트러스트(Living Trust)’라는 브랜드를 론칭하고 국내 첫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유언대용신탁은 유언장 없이도 위탁자 생전에 유언의 효과 및 생전·사후의 재산관리는 물론 안정적 운용까지 가능한 종합자산관리 상품이다. 유언장보다 더 안전하고 정확한 재산 분배는 물론 미성년 자녀를 위한 재무 보호 시스템도 갖추고 있다.
2016년 출시된 ‘치매안심신탁’도 눈여겨볼 만하다. 이 상품은 고령화 추세를 반영해 현재 치매에 걸렸거나 장래 치매를 대비해 본인의 생전 자산관리 또는 상속 업무까지 지원해준다. 특히 초기 치매 상태에서의 안전한 병원비, 간병비, 생활비 등의 지급관리는 물론 재산관리 및 상속까지 지원해주는 단계별 자산관리가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미성년 및 성년후견신탁도 맞춤형 상품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성년후견신탁은 성년후견개시심판 또는 한정후견개시심판을 받은 발달장애인 등의 재산을 투명하고 안정적으로 관리해주는 상품이며, 미성년후견신탁은 불의의 사고 등으로 부모의 보호를 받기 힘든 미성년 자녀들을 위한 성장단계별 자금 지원 상품이다.
최근에는 이혼 소송 급증에 따른 양육비 분쟁을 방지하기 위해 매월 양육비를 자녀의 계좌로 입금해 원래의 목적에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양육비지원신탁’도 내놨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기업과 개인의 가업승계 및 상속은 물론 고령 및 미성년자들을 위한 안전판 역할에 충실한 다양한 신탁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라며 “특히 치매안심신탁 등의 경우 일정한 세제 혜택을 통해 정부의 재정 부담을 경감시킬 수 있도록 적극 나서겠다”고 말했다. ◆ 기부형부터 펫신탁까지…이색 상품 속속
여타 시중은행들도 가입 기준을 낮춘 이색 신탁 상품을 속속 출시하며 시장 개척에 나서고 있다. 특히 국민은행은 1인 가구 및 반려동물 증가 등 시장 트렌드에 맞춘 이색 상품을 속속 출시하며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다.
지난 2016년에 출시된 ‘펫코노미신탁’은 반려동물 주인의 사망으로 반려동물을 돌보지 못할 경우를 대비한 신탁 상품으로, 반려동물을 맡아서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수익자)에게 반려동물을 돌보는 데 필요한 자금을 은행이 지급해주는 구조다.
또 지난해 출시된 ‘금지옥엽신탁’은 조부모가 손자녀를 위해 가입하는 보급형 상속·증여 상품으로, 상속형은 본인 사망 시 사전에 지정한 방법대로 손주에게 용돈을 지급하고 증여형은 손주의 대학 입학, 자동차 구입, 결혼 등 특별한 순간에 신탁금을 지급할 수 있다.
신한은행은 올 초 위탁자 사망 시 신탁 잔액을 사전에 신탁계약서상에 명시해 놓은 공익단체, 학교, 종교단체 등에 기부하는 유언기부신탁 신상품 4종을 출시했다. 기부처에 따라 일반형-기부천사신탁(일반 기부단체에 기부를 원하는 경우), 학교형-후학양성신탁(교육기관에 기부를 원하는 경우), 기독교형-천국의보물신탁(천주교, 개신교 등 기독교 단체에 기부를 원하는 경우), 불교형-극락왕생신탁(사찰에 기부해 49재 비용을 준비하는 경우) 등으로 나뉜다. 적립형은 물론 평소에는 자유롭게 입출금 통장으로 사용하다가 상속 시점의 잔액을 기부하는 방식도 가능하다.
우리은행도 기부연금신탁인 ‘우리나눔신탁’을 판매하고 있다. 이 상품은 가입 금액의 50%는 기부하고 50%는 연금으로 수령하는 신탁으로 기부 시점에 따라 생전기부형과 사후기부형으로 나뉜다. 기부자는 월, 분기, 반기, 연 단위로 지정해 연금을 수령할 수 있으며, 은행 이체수수료 면제 등의 금융 혜택도 주어진다.
이처럼 이색 신탁 상품이 속속 출시되면서 전문 인력 확보 경쟁도 갈수록 치열해질 조짐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탁의 경우 1대1 고객 대면이 필수적인 관계형 영업이라는 점에서 인공지능(AI)의 완벽한 대체가 불가능하다”며 “최근 신탁 전문 인력의 몸값이 높아지면서 은행원들 사이에서도 ‘신탁 배우기’ 열풍이 확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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