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탁업을 둘러싼 갈등은 어느덧 해묵은 이슈가 됐다. 저성장·고령화에 따른 신탁업 규제 완화를 요구하는 목소리와 달리 금융업권 간 밥그릇 싸움이 신탁 시장 활성화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big story] 은행·증권 갈등에 길 잃은 신탁업
[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지난해 초 금융위원회는 ‘금융개혁 5대 중점 과제’를 발표하며 기존 신탁업 제도에 대한 전면 개편 계획을 발표했다. ‘믿고 맡긴다’는 신탁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에서였다. 개편안의 핵심 내용은 ▲다양한 맞춤형 서비스 제공을 위해 신탁 전문 법인, 법무법인 등 새로운 플레이어 진입 촉진 ▲생전·유언신탁, 유동화신탁 등 신(新)수요에 대응해 수탁재산 범위 대폭 확대 ▲장기 재산관리신탁 등에 대해 광고 규제 완화 및 제한적 비대면 계약·지시 허용 등이었다.

금융위는 개편안의 배경에 대해 “해외 주요국의 경우 신탁이 노후 재산관리, 부의 이전, 기업 자산관리 등에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는 데 반해, 우리는 신탁업이 금융투자업을 다루는 ‘자본시장법’으로 규율돼 본래의 유용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측면이 있다”고 소개했다.

◆ 반쪽짜리 신탁, 절반의 성공
실제 ‘신탁법’이 규정하고 있는 신탁의 수탁재산은 부채와 영업·담보권, 보험청구권 등 재산의 범위를 포괄적으로 적용하고 있지만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이하 자본시장법)’의 규제를 받게 되면서 금전 및 증권 등으로 영업 범위를 제한받고 있다. 이로 인해 국내 신탁 산업은 은행, 증권사 등 겸영신탁업자의 단순 운용형 금전신탁에 편중돼 왔다.

실제로 신탁 시장은 최근 수년간 급속한 성장을 이뤄 왔지만 실제 내막을 들여다보면 반쪽짜리에 그친다는 혹평이 나온다. 한국 신탁업의 경우 지난 2010년 이후 금전신탁 위주로 가파른 성장세를 보여 왔는데, 지난해 9월 말 기준 수탁고(겸영사 기준)는 593조2000억 원으로 금전신탁이 392조3000억 원, 재산신탁이 201조 원이었다.

이는 전년 대비 11.6%(61조8000억 원) 증가한 수준이지만,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재산신탁의 경우 법인들이 대출을 위해 담보로 제공한 부동산담보신탁이나 금전채권 추심을 위한 금전채권신탁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금전신탁 역시 퇴직연금신탁이 105조 원에 이르고 정기예금형신탁이 84조 원, 법인 위주 단기 수시입출금신탁(MMT)이 68조 원 등으로 신탁의 본질인 개인을 위한 자산관리 툴로서의 기능과는 거리가 있다. 국내 금융사들 역시 자문 및 관리 서비스보다 개별 금융상품 판매에 집중해 왔던 게 현실이다. 특히 국내 겸영사의 경우 금전신탁 비중이 67%에 달하는 데다, 이 가운데 특정금전신탁 비중이 96%에 이를 정도로 치중돼 있는 실정이다.

이와 관련, 금융위는 지난해 상반기 동안 실무 태스크포스(TF) 운영을 통해 ‘신탁업법’ 제정안을 마련하는 한편 은행, 증권, 보험 등 각 업권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공청회 개최도 예고했다. 당시 김용범 금융위원회 사무처장은 “관련 TF를 통해 신탁산업 전반이 성장할 수 있도록 하겠다”며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어 특정 업권의 이해에 치우치지 않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big story] 은행·증권 갈등에 길 잃은 신탁업
◆ 밥그릇 싸움 변질…“파이부터 키워야”
하지만 신탁업 제도 개편을 둘러싼 금융업권 간 시각은 크게 엇갈렸다. 시중은행의 경우 반쪽짜리 신탁업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됐다며 크게 반긴 반면, 금융투자업계는 은행들이 자산운용업 진출을 노리고 있다며 적극 반발했다. 당시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수익성 악화에 직면한 은행권의 요구를 정부가 수용해준 것’이라는 관전평이 주를 이뤘고, 신탁업 개편에 대한 실익 역시 은행권에 편중될 것이라는 불만이 팽배했다.

이 같은 갈등은 급기야 각 업계를 대표하는 협회 간 날선 공방으로까지 이어졌다. ‘기울어진 운동장’과 ‘종합운동장’론이 대표적이다. 당시 은행연합회장이었던 하영구 전 회장은 “신탁은 모든 금융업권이 공유하고 있는 비즈니스”라며 “‘신탁업법’ 제정은 금융권 전체에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반면 같은 시기 금융투자협회장에 재직했던 황영기 전 회장은 “‘신탁업법’을 따로 빼낸다는 취지 뒤에는 은행권이 신탁업을 통해 자산운용업에 진출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는 것이다”라며 기울어진 운동장론을 꺼냈다.

이 같은 양측의 갈등은 펀드 시장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배경이 됐다. 현행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은행은 자산운용사에서 판매하는 펀드 상품처럼 주식 포트폴리오를 직접 만들어 판매할 수 없지만, 신탁업이 전면 허용되면 은행도 자체적으로 ‘집합운용’과 ‘불특정금전신탁’이 가능해진다. 이와 관련, 금융당국은 집합운용과 불특정금전신탁의 경우 ‘신탁법’ 제정안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라고 진화에 나서기도 했지만 논란은 좀처럼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권용원 금융투자협회장도 올 초 취임 일성으로 “‘신탁업법’ 분리는 ‘자본시장법’ 내에서 해결하는 게 맞다. 동일 기능 동일 규제 원칙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신탁업법’을 분리하는 것은 ‘자본시장법’에 어긋난다”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어 그는 “타 금융권(은행)에선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다는 것을 잘 안다”면서도 “목소리만 커서 되는 게 아니라 잘 준비된 논거가 있어야 한다”고 꼬집었다.

반면 은행들은 공식 대응은 자제하면서도 불특정금전신탁이 빠진 신탁업 활성화는 반쪽짜리에 그칠 것이라며 불편한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이처럼 양측의 갈등이 지속되면서 금융당국 역시 사실상 신탁업 개편에 손을 놓고 있다. 지난해 초 계획했던 공청회조차 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국내 신탁 시장의 경우 미국, 일본 등에 비해 갈 길이 먼 상황인 데도 밥그릇 싸움에만 매몰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다”며 “우선은 활발한 경쟁을 통해 신탁 시장의 파이부터 키우는 일이 급선무가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