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반대말은 무엇일까’란 질문을 던지면 대답으로 행복이란 단어가 가장 흔하다. ‘우울하면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울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기분 전환을 하려고 노력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기분 전환은 마음 조정의 한 기술이다. 인공적으로 에너지를 써서 부정적인 감정을 좋은 쪽으로 바꾸는 방법이다. 효과가 있으나 너무 사용하면 마음이 더 지치게 된다.
흥겨운 술자리 뒤에 이상스러운 공허함이 찾아온다. 이 공허함의 정체를 즐거운 활동이 적어서라고 오해하고 더 핑크빛 놀이와 활동에 빠지다 보면 행복중독 현상에 빠지게 된다.
행복하지 않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살고 있다. ‘열심히 살아야 행복하다’라는 언어의 틀이 우리 마음을 꽉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행복할 순 없다. 그런데 열심히 사는 것만큼이나 행복에 있어 중요한 요소가 ‘마음에 행복의 판단 기준이 어떻게 설정돼 있는가’다. 객관적으로 열심히 살고 있어도 행복의 판단 기준이 좋지 못하면 마음에서 행복을 느끼기가 어려워진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행복의 판단 기준은 아름다움을 정의하는 미적 기준과 연결돼 있다. 미에 대한 인식은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가치관과 직결된다. ‘무엇을 아름답게 느끼는가’는 ‘내가 누구이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정체성을 시각적으로 보이게끔 한다. 우울의 반대말이 불행이라는 것은 우울한 이미지가 아름답지 않게 보인다는 것이다.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 이미지는 정말 못생긴 것들일까.
21세기를 대표하는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 그의 조각 작품은 현재 최고가다. <걷는 남자>가 1200억 원, <가리키는 남자>가 1600억 원. 전문가가 아닌 경우엔 대부분 놀라는 금액이다. 작은 머리와 큰 발에 뼈대만 가늘게 드러난, 부서질 것만 같은 약한 남자의 모습. 두 남자(걷는 남자, 가리키는 남자) 모두 1000억 원대의 자산가임에도 전혀 부자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당장 병원에 입원시켜 영양주사라도 놔주고 싶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불러일으킨다. 그럼에도 볼품없고 우울감을 조장하는 그들의 외모에 담긴 아름다움이 높게 평가돼 부자가 된 것이다. 두 남자에게 숨겨진, 비밀스러운 가치가 1000억 원대인 것인데 무엇일까, 그 가치는? 메마른 부자의 우울, 그리고 역설의 긍정성
마음과 만나는 일이 직업인 필자에겐, 그 가치가 작품 안에 진하게 엉켜 있는 사람이란 존재의 불안과 고독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삶에서 절절히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고독은, 속물적 접근으로 환산해보면 1000억 원이 아니라 그 이상이 돼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이 없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외로워서 사랑을 한다. 행복하지 않아 우울한 것이 아니라 우울하기에 기분 좋은 행복감을 좇는 것이다. 불안도 마찬가지다. 불안은 가장 중요한 생존 시그널이다. 불안하기에 미래를 준비하고 염려하는 것이다. 불안 유전자가 없었다면 인류는 오랜 시간 동안 생존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불안과 고독은 결핍의 현상만은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갖고 태어나는 인간의 본질적 특징이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죽고 싶은 이는 없으나 모두에게 꼭 찾아오는 개인적인 삶의 종결이다.
사람의 유전자가 모두 코딩된 지 오래전이고, 사람의 지능을 능가하는 인공지능(AI)의 개발이 예견되는 첨단 시대이지만, 우리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팩트에 대해 모든 인류가 공감할 하나의 답변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인간은 왜, 어떻게 만들어져 왜 노화하고 결국 죽어야만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앞에 언급한 자코메티의 앙상한 두 남자에겐 허영을 뺀 본질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닐까. 나를 잘 사랑해주는 튼튼한 자존감은 심리학적 용기에 기반을 둔다. ‘나는 강하다’란 용기가 아닌 ‘내게 이런 약함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심리학적 용기다. 도전에서 실패를 하지 않는 인생이 자존감 높은 인생이 아니라, 열심히 도전했지만 결국은 실패해 느끼는 아픔조차 삶의 소중한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수용 능력과 용기가 높은 자존감의 증거다. 한계 가득한 내 본질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용기를 가질 때 역설적인 긍정성이 찾아와 내 삶을 지켜준다.
바니타스(vanitas)는 라틴어로 인생무생이란 뜻인데, 바니타스 예술은 인생이 한시적이고 덧없다는 것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다. 자코메티의 작품도 17세기 시작한 바니타스 예술의 20세기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당시엔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이 그림의 주인공인 경우가 많았고 옆에 조연으로 한시성을 상징하는 모래시계가 자주 등장했다. 우린 모두 시한부 인생이라는 것이다. 거울도 종종 등장하는데 인간의 허영을 그린 것이라 한다.
가뜩이나 사는 것도 빡빡한데 그림이라도 산뜻해야지. 이런 칙칙한 그림을 집에 갖다 놓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꺼려지겠지만 가끔씩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것은 심리적 유익이 크다. 죽음을 생각하면 마음의 기대치가 떨어지는 심리적 겸손이 찾아와 내가 이미 갖고 있는 소중한 것을 감사하게 되고 만족감도 증대된다. 우울한 죽음을 생각할 때 역설적으로 튼튼한 긍정적 감정이 찾아오는 것이다. 훌륭한 평가를 받는 예술 작품을 보면 대체로 우울하다. 삶의 본질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아직 춥다. 어디든 문화예술 공간을 찾아 삶의 본질을 다루는 작품들을 만나 지친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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