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게트(Baguette)’는 흔히들 프랑스의 상징이라고 불린다. 프랑스에선 오후 6시쯤 되면 바게트를 들고 귀가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프랑스인들의 주식인 바게트는 기다란 생김새 그대로 라틴어의 지팡이(baculum)라는 말에서 유래됐다. 빵이 한 나라의 상징인 나라로는 프랑스가 유일할 것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성장 동력을 잃고 구조적 모순과 경기 침체에 빠져 있는 프랑스의 경제 상황을 ‘바게트 폭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프랑스는 그동안 저성장·고실업의 늪에 빠져 ‘유럽의 병자’로 전락했다는 말까지 들어 왔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 왔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바게트 폭탄 제거에 적극 나서면서 프랑스 경제가 되살아나고 있다.
프랑스 경제의 활력은 수치로 입증되고 있다. 실업률은 지난해 말 9.4%로 5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진 반면 기업신뢰지수는 10년 만에 최고치까지 치솟았다. 해외 기업가들의 비자 신청이 쇄도하면서 벤처 투자 규모도 사상 처음으로 영국을 앞질렀다.
프랑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는 1.7%에서 1.9%로 올랐다. 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2017년 경제 활성화를 기록한 프랑스를 ‘올해의 나라(country of the year)’로 선정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선정 이유로 “마크롱 대통령이 개혁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던 프랑스를 환골탈태시키고 있다”고 꼽았다.
특히 이코노미스트는 마크롱 대통령이 적극 추진해 온 노동 개혁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실제로 마크롱 대통령이 경제 개혁에 성공하고 있다는 평가를 듣고 있는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프랑스 노조의 철밥통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마크롱식 경제 개혁, 무엇이 달랐나
마크롱 대통령은 지난해 9월 22일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핵심으로 하는 노동법 개정안을 의회 승인이 필요하지 않는 행정명령으로 통과시키는 정면승부를 선택했다. 물론 100여 차례 회의를 개최하며 끈질기게 노동계를 설득하는 등 ‘소통’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프랑스 제2노조이자 강경파인 노동총연맹(CGT)은 지난해 9월 12일과 23일을 총파업의 날로 선언하고 대규모 반대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마크롱 대통령은 “게으름뱅이들에게 절대 굴복하지 않겠다”면서 버텼다.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은 그동안 노동 개혁을 추진했지만 노조의 반발로 매번 실패한 바 있다.
중도우파인 자크 시라크 전 대통령부터 중도좌파인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까지 이른바 ‘프랑스 병(病)’을 고치겠다고 공언했지만 제대로 실현되지 못했다. 마크롱 대통령이 흔들림 없이 노동법 개정안을 밀어붙이자 프랑스 국민들도 마크롱 대통령의 손을 들어주었다. 제1노조인 민주노동연합(CFDT)과 제3노조 노동자의 힘(FO) 등도 명분이 부족하다면서 파업에 불참하면서 노동 개혁은 본격적인 탄력을 받았다.
프랑스는 높은 수준의 사회복지 제도를 자랑해 온 국가다. 특히 미국, 영국과는 달리 노동자가 일단 취업하면 평생고용을 보장받는 등 고용 보장 장치가 잘 마련돼 있다. 하지만 이런 고용 보장 때문에 프랑스 기업들은 신규 채용을 꺼리고 인력은 노동시장이 유연한 해외로 떠났다. 그 결과 프랑스는 그동안 낮은 성장률과 높은 실업률로 중병을 앓아 왔다.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각종 고용 보장 장치가 프랑스 기업들의 경쟁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경제 규모가 큰 대국이지만 경제 성장은 가장 정체돼 있고, 재정 적자는 크게 늘어났으며, 실업률도 높은 ‘삼중고’에 빠져 있다. 프랑스는 2007년부터 급증하는 지출을 통제하지 못해 국가총부채가 GDP의 96%에 육박하는 등 빚더미에 앉은 상황이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유럽연합(EU) 회원국의 평균 실업률을 2배 이상 웃돌고 있다. 또 25세 미만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은 경제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돼 왔다.
마크롱 대통령은 2014년부터 3년간 올랑드 사회당 정부의 경제장관으로 재직하며 성역이란 말을 들어온 ‘주(週) 35시간 근무제’ 폐지와 고용·해고 조건 완화 등을 내용으로 하는 노동법 개정을 추진했다. 프랑스의 노동 시간은 전 세계에서 가장 적은 편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노조들의 대규모 반대 파업과 사회당의 반발 및 공화당의 비협조로 고용과 해고 조건을 일부 완화시켰지만 노동 시간을 전혀 건드리지 못하면서 좌절감을 맛보기도 했다. 심지어 그는 노조원들이 던진 달걀에 얻어맞기도 했다. 당시 그는 정치에 입문해서라도 반드시 노동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다. 따라서 마크롱 대통령의 입장에선 노동법 개정이 어떻게 보면 정치를 시작한 이유이자 명분인 만큼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최우선 과제였다고 말할 수 있다.
개정된 노동법의 내용을 보면 기업이 고용과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복잡한 노동 관련 규제를 완화하고 임금과 수당을 탄력적으로 조정할 수 있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먼저 중소기업과 노동자 교섭에서 노조를 배제했다. 중소기업은 앞으로 노동자들과 교섭할 때 노조의 의견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
전체 95%에 달하는 노동자 50명 미만 사업장의 경우 노동자 대표들이 고용주와 직접 교섭해 합의할 수 있다. 노동자 20명 미만 사업장의 경우 노동자들이 선출한 대표 없이도 고용주는 노동자들과 직접 교섭할 수 있다. 고용주와 노동자는 이 방식으로 교섭할 때 임금, 근로 시간, 조직 구성 등 직장생활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논의할 수 있다. 산별노조 등 주로 산업 단위로 결정되던 근로 조건을 개별 사업장에서 결정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둘째, 고용주는 엄격한 규제 대상인 정리해고를 하지 않는 대신 노조 개입 없이 퇴직 대상 노동자들과 직접 조건을 협상할 수 있다. 기존의 노동법은 회사가 노동자를 해고할 수 있는 권한을 엄격히 규제했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는 다른 국가보다 높은 고용 안정성을 유지해 왔지만, 경기 침체와 시장 수요 변화에도 회사가 노동자들을 쉽게 해고하지 못해 고용을 신중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 왔다.
셋째, 부당 해고에 대해 노동법원이 정하는 손해배상액 상한제를 도입했다. 금액은 노동자의 연공서열(학력, 근속연수 등에 따라 노동자의 임금과 인사이동을 결정하는 체계)에 따라 달라지며 세전 월급의 20개월분을 초과할 수 없다. 이 액수도 근속연수 29년이 넘은 노동자에게만 해당한다. 노동자가 기업을 부당 해고로 제소할 수 있는 기간도 2년에서 1년으로 줄였다. 또 노동법원은 해고의 적법성을 따질 때 프랑스 내 경제 상황을 판단 기준으로 삼기로 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또 경제 활성화를 위해 친기업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대표적인 친기업 정책은 부유세 축소와 자본소득 누진세 폐지를 골자로 한 세제 개편이다. 의회는 지난해 10월 마크롱 정부가 제출한 2018년도 세제개편안을 통과시켰다.
그 내용을 보면 우선 부유세로 불리는 사회연대세(ISF)의 부과 대상을 대폭 축소시킨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자산가들과 기업들이 세금을 피해 줄줄이 해외로 빠져나가자 경제 회생을 위해 ISF를 대대적으로 개편하겠다고 공언해 왔다.
정보조사 업체 뉴월드웰스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프랑스를 떠난 백만장자(순유출)는 6만 명으로 추산된다. 개편 내용을 보면 130만 유로가 넘는 자산을 보유한 개인에게 최고 75%에 달하는 세율을 적용하는 ISF의 항목 중 부동산 보유분에 대해서만 세금이 부과되고, 요트, 슈퍼카, 귀금속 등은 과세대상에서 제외시키기로 했다.
자산에 대한 투자 지분도 과세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또 자본소득에 대해선 기존 누진세율이 아닌 비례세율을 적용하기로 했다. 중산층을 위한 감세 조치도 실시한다. 앞으로 3년간 전체 가계의 80%까지 주택세를 내지 않도록 해 중산층에도 감세 혜택이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특히 기업의 성장, 고용, 투자를 촉진하기 위해 현재 33.3%인 법인세율을 2022년까지 25%로 단계적으로 감축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기업의 경쟁력과 고용을 위해 세액공제를 2019년부터 고용주의 사회보장 부담 등의 경감 방식으로 고칠 방침이다. ◆‘늙은 국가’서 ‘젊은 혁신 국가’로
마크롱 대통령은 또 프랑스를 유럽의 ‘늙은 국가’가 아닌 ‘젊은 혁신 국가’로 탈바꿈시키겠다며 창업 지원을 위해 100억 유로 규모의 스타트업 펀드를 조성할 계획이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공기업 지분 매각을 적극 추진할 계획이다. 프랑스 정부는 방위산업체인 사프란, 자동차 생산 업체인 르노, 프랑스전력(EDF) 등 81개 기업에 지분을 갖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은 또 해외 창업자 유치를 목표로 ‘기술비자’를 신설해 외국인이 4년 동안 취업비자 없이 프랑스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목표는 프랑스를 EU에서 독일과 대등한 국가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프랑스는 EU에서 독일에 비해 경제성장률은 낮고 실업률은 높다. 독일의 2013~2016년 평균 경제성장률은 1.4%를 기록한 반면 프랑스는 0.9%밖에 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또 수출경쟁력 약화로 2000년부터 17년째 연속 무역수지가 적자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의 실업률은 2013년 이후 4년간 10%대를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프랑스의 지난해 GDP는 2조5750억 달러로 EU를 이끄는 독일(3조7000억 달러)에 비해 상당히 뒤진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1975년까지 이른바 ‘영광의 30년(Les Trente Glorieuses)’을 구가하면서 국력을 발전시켰다. 경제학자인 장 푸라스티에가 명명한 이 기간에 프랑스는 연평균 5.1%의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실업률은 1.4%로 완전고용을 실현했고, 대량 소비사회가 열리면서 국민의 생활수준도 급속히 향상됐다.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가 정착되고, 연 5주일의 유급휴가가 주어지는 등 사회보장 제도와 근로 조건도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의 독자적인 외교·안보 노선으로 프랑스의 국제적인 위상이 크게 올라갔을 뿐만 아니라 과학·기술, 사상과 철학, 문학과 예술에서도 세계를 이끌었다. 하지만 드골 이후 프랑스의 역대 대통령들은 이런 국력의 상승을 이어가는 데 실패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이후 프랑스 역사상 최연소(39세) 대통령이 된 마크롱은 엘리제궁에서 발표한 신년사에서 “앞으로 경제 개혁에 더욱 박차를 가할 경우 프랑스의 르네상스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그의 야심 찬 목표가 실현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이장훈 국제문제 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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