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최근 국내 주요 기업을 중심으로 직원들의 ‘워라밸’에 힘쓰는 곳이 늘고 있다. 업무시간 외에 업무 지시를 금지하는가 하면, 아예 법정 근로시간보다 근무시간을 단축한 기업까지 등장했다. 일부 기업의 이 같은 워라밸 파격 실험이 어디까지 확산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신세계그룹은 2018년 시작과 함께 그룹 임직원 5만8800여 명을 대상으로 주 35시간 근무제를 시행한다. 이는 법정 근로시간보다 5시간을 단축한 것으로 국내에서는 첫 사례다. 재계에서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이라는 호평과 함께 성공 여부를 장담하긴 이르다는 우려가 공존한다. 유통업계는 신세계의 근로시간 단축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분위기다. 다만 제조업계의 경우 ‘취지는 공감하지만 동참하기 어렵다’는 반응이 주를 이룬다. 생산설비를 돌리는 제조업체의 경우 성수기 생산 물량을 맞추기 위해서는 연장 근무가 불가피하다는 이유에서다.

롯데그룹도 2018년부터 근무시간 외 ‘카톡 지시’를 금지하고 연장 근무 방지를 위한 ‘PC 오프제’를 전 계열사로 확대 시행한다. 이와 함께 초과 근로에 대해 임금 대신 휴가로 보상하는 ‘근로시간 저축 휴가제’를 도입하고 기존 남성의무육아휴직제도 더욱 활성화한다는 방침이다. 2017년 여직원 사내 성폭행 논란에 휩싸였던 한샘은 야근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육아 휴직을 확대하는 등 ‘여성이 일하기 좋은 회사’를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안을 마련 중이다.

◆ ‘수평적 문화’가 만든 카카오 워라밸
사실 유통업계보다 ‘워라밸’을 선도하는 기업은 따로 있다. 국내 정보기술(IT)업계 선두주자인 카카오다. 카카오는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유일무이한 제도를 여럿 시행하고 있다. 특히 안식년 휴가는 같은 IT업계에서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파격적이다.

카카오는 입사 후 3년마다 유급 휴가 30일과 휴가 지원금 200만 원을 지급하고 있다. 경쟁사인 네이버의 경우 2년이 지나면 최대 10일 연속 사용하는 ‘리프레시 휴가’를 제공하지만 직원들의 만족도 측면에서 카카오에 못 미친다.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휴가제도 역시 승인제가 아닌 등록제로 운영되고 있어 직장 상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으며, 2시간 단위로 쪼개 쓸 수 있는 ‘반반차 휴가제’는 직원 활용도가 높다. 이 외에도 육아 및 임신 기간 중에는 근무시간을 단축시켜주고 한시적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직장 내 어린이집은 사내 복지의 백미로 꼽힌다. 규모나 프로그램 측면에서 국내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현재 카카오는 판교(늘예솔)와 제주(스페이스닷키즈) 오피스 두 곳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있으며, 특히 판교 오피스(H스퀘어)에 위치한 어린이집은 430㎡ 규모의 대형 실내 놀이터를 갖추고 있다. 사실상 빌딩 1개 층을 온전히 어린이집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국내법상 최대 모집 가능 인원인 3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제주 오피스 역시 180명 규모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으며, 두 곳 모두 원어민 교사를 상주시키는 등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이에 더해 카카오 측은 어린이집을 이용하는 직원들의 편의를 향상시키기 위해 주차우선권 혜택도 제공하고 있으며, 매년 학부모 만족도 조사를 실시해 어린이집 운영에 적극 반영하고 있기도 하다. 가장 최근 실시한 조사에서는 5점 만점에 4.7점으로 학부모들의 어린이집 만족도도 높게 나타났다.

카카오 인사팀 관계자는 “카카오에서 육아는 개인의 책임이 아닌 회사와 직원이 함께한다는 인식이 강하다”며 “다양하고 수준 높은 복지는 카카오 특유의 수평적인 기업문화에서 비롯된다”고 설명했다. 실제 카카오는 대리, 과장 등 직급명이 곧 직원 개개인의 ‘이름’이 되는 일반적인 기업과 달리 수평적 조직문화를 위해 설립 초기부터 영어 호칭을 활용하고 있다. 카카오의 김범수 의장과 임지훈 대표도 각각 브라이언(Brian), 지미(Jimmy)로 불린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이외에도 카카오는 주요 이슈가 발생할 경우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전체 미팅을 진행하고 있다. 목요일(Thursday)인 ‘T’와 5시(5:00)를 의미하는 500을 합쳐 ‘T500’으로 불리는 미팅은 전체 구성원들이 아이디어와 정보를 공유하는 토론의 장이 되고 있다. 또한 서서 일할 수 있는 ‘스탠딩 데스크’와 50여 개에 이르는 사내 동호회, 회사 내 이동 수단으로 비치된 킥보드는 유연한 사고와 창의적 생각을 최우선으로 하는 카카오의 조직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 ‘금융 워라밸’ 선도하는 신한은행
조직문화의 혁신을 이끄는 IT 기업들과 달리 금융사는 상대적으로 보수적 이미지가 강하다. 특히 은행은 돈을 다루는 직업이다 보니 리스크 관리가 금과옥조로 여겨지며 조직 구성원도 ‘상명하복’ 문화에 익숙하다. 하지만 최근 은행권에도 ‘노타이 근무(신한은행)’와 ‘자율좌석제(KEB하나은행)’ 등 수직적 조직문화를 탈피하고자 하는 변화의 바람이 거세게 불고 있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이 같은 노력은 직원 개개인의 일과 삶의 균형을 찾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있으며, 금융권에서는 신한은행이 워라밸 선도 기업으로 꼽힌다. 신한은행은 지난 2016년 7월 국내 금융권 최초로 유연근무제(스마트근무제)를 도입한 데 이어 2017년 9월부터는 증권, 보험, 캐피털 등 신한금융그룹 전 계열사로 확대 시행하고 있다.

스마트근무제는 크게 스마트워킹센터 근무, 스마트 재택근무, 자율출퇴근제 등으로 나뉜다. 스마트워킹센터 근무는 기존 사무실과 동일한 환경의 사무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 없이 일할 수 있는 방식으로 출퇴근 시간이 긴 직원들이 주로 활용하고 있다. 최근 한 취업포털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울 직장인의 하루 평균 출퇴근 소요시간은 2시간을 훌쩍 넘어선다. 집과 가까운 스마트워킹센터를 이용할 경우 출퇴근 시간을 줄여 자신의 여가생활을 좀 더 풍성하게 할 수 있다. 현재 신한은행은 강남과 영등포, 죽전, 본점 등 네 곳에 스마트워킹센터를 운영 중이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스마트재택근무제의 경우 기획아이디어 도출 및 상품·디자인 개발 등 은행 전산망을 사용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집이나 기타 장소에서 근무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특히 자율출퇴근제는 육아 문제 등 직원들의 생활 패턴을 고려해 출퇴근 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도록 한 제도로, 영업점을 포함해 전 직원이 월 8회 이상 이용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 은행 관계자는 “자율출퇴근제의 경우 시행 초기에는 상사의 눈치를 살피는 분위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정착 단계에 와 있다”며 “육아 문제에 직면한 직원은 물론 원거리 주말부부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고 있으며 출퇴근 시간 단축으로 가족들과 함께 저녁이 있는 삶을 누릴 수 있게 됐다는 직원들도 많아졌다”고 소개했다.

신한은행은 이런 제도적 측면뿐 아니라 스마트근무제 도입에 따른 직원들의 여가 및 취미생활을 지원하는 맞춤형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를테면 자율출퇴근제로 일찍 퇴근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취미플랫폼 in CGV’의 경우 퇴근 이후 영화 감상뿐 아니라 유명 작가와의 토크콘서트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또한 그동안 바쁜 일상으로 여가 활동이 어려웠던 직원들에게는 ‘취미를 배달해 드립니다’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취미박스’를 배송해주고 있으며, ‘1인 1취미 갖기’ 프로젝트를 통해 줌바댄스, 베란다 텃밭 가꾸기, 캘리그래피 등 168개(7000여 명)의 취미 동호회를 운영하고 있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이 같은 프로그램은 창의와 혁신의 문화 확산, 일과 삶의 균형을 통해 직원 행복이 커지기를 바라는 조용병 신한금융지주 회장의 경영 철학이 담겨 있다”며 “가족들도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모든 직원들이 일과 삶의 균형을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워라밸 모범 기업 ‘유한킴벌리’
유한킴벌리는 ‘워라밸’ 하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중견기업이다. 2017년 한 취업포털이 조사한 국내 대표 워라밸 기업에서도 구글, 카카오, 네이버 등 대표 IT 기업들과 함께 당당히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유한킴벌리는 워라밸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1990년대 초반 유연근무제를 도입해 현재까지 운영해 오고 있다. 그동안 정부는 물론 많은 기업과 시민단체 등에서도 유한킴벌리의 차별화된 복지제도를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아 왔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현재 유한킴벌리는 관리직의 경우 육아돌봄이나 자기계발을 위해 시차출근제를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임신 초기 또는 저학년 초등생을 자녀로 둔 직원은 임금 변경 없이 3개월간 재택근무제도 이용할 수 있다. 또 업무의 효율성 및 수평적 조직문화 구축을 위해 지정좌석제를 폐지하는 한편, 서울 본사를 비롯해 죽전, 군포, 충주, 대전 등 총 9곳에 스마트워크센터를 마련해 원격근무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유한킴벌리는 여성들의 경력 단절 및 저출산 극복 노력에 가장 적극적인 기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전 사업장에 모성 보호 공간과 모유 착유 시설이 마련돼 있으며, 대전 공장에는 직장 보육시설도 운영 중이다. 지난 2009년부터는 매해 임산부간담회를 개최해 출산과 휴직을 준비하는 과정을 의논하고, 육아기에 있는 여성 직원들에게는 재택근무제를 비롯해 시차출근제, 육아휴직 등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다.
[big story] 직원 행복 찾기…‘워라밸’ 실험 나선 기업들
이 같은 모성 보호 활동으로 여성 직원들의 육아휴직 후 복직률과 복직 후 유지율은 매해 90~100%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한편 유한킴벌리 역시 업무 효율성과 수평적 조직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직책 대신 ‘○○님’으로 부르는 ‘님호칭제도’와 기존 팀 명칭을 없애고 ‘워크그룹’ 개념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유한킴벌리 관계자는 “유한킴벌리의 기업문화는 ‘한국에서 가장 일하기 좋은 회사’를 구현하고자 하는 최고경영자(CEO)의 경영 철학에서 비롯됐다”며 “일과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스마트워크의 사회적 확산을 위해 더욱 노력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공인호 기자 bal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