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 여파 ‘일파만파’…노정(勞政) 압박 심화

[한경 머니=공인호 기자] 정치권발() ‘채용 비리논란으로 금융권이 잔뜩 움츠러들고 있다. 논란의 중심에 선 최고경영자(CEO)는 연임 7개월 만에 사임 의사를 밝혔고, 일부 은행 노조는 인사 전횡의 책임을 묻겠다며 지주 회장과 은행장의 동반 사퇴를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노정(勞政) 압박이 갈수록 심화되는 가운데 관피아(관료+마피아) 출신들이 금융권 협회장 자리를 꿰차면서 묘한 대비를 이룬다.

금융권 적폐 청산의 역설 ‘관피아 부활’
문재인 정부 들어 금융권에 불어닥친 적폐 청산칼바람의 진앙지는 우리은행이다. 지난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심상정 정의당 의원이 특혜 채용 의심 명단 16명을 공개했을 당시만 해도 이 같은 후폭풍을 예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채용 특혜 논란 이후 우리은행 민영화공로를 인정받아 지난 3월 연임에 성공한 이광구 우리은행장은 임기 반년 만에 자리에서 물러났고, 이후 한 달 넘게 CEO 공석 사태가 이어졌다. 특히 이 행장은 과거 서금회’(박근혜 전 대통령의 서강대 동문 모임) 논란 탓에 이동걸 전 KDB산업은행 회장과 이덕훈 전 수출입은행장과 함께 자리 보존이 어렵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현실화된 사례다.


강력한 채용 비리 여진긴장 속 NH농협금융

국내 은행 첫 과점주주 지배구조하에 선임된 민선 1기 은행장의 중도 낙마는 여러 측면에서 부정적 파급효과를 불러왔다. 여전히 우리은행의 최대주주로 남아 있는 예금보험공사(18.78%)는 차기 은행장 선출에 관여하려다 관치(官治) 재현이라는 부정적 여론을 감지하고 임원추천위원회(행추위)에서 발을 뺐고, 이르면 연말로 예상됐던 정부의 잔여 지분 매각 작업도 시점을 기약하기 어렵게 됐다.

여기에 채용 청탁자 명단이 추가로 공개되면서 상업-한일출신 간 내부 갈등은 더욱 심화될 조짐이다. 심 의원이 폭로한 명단에는 이 행장과 같은 상업은행출신만 명기돼 있어 이번 채용 비리 파장이 내부 파벌 싸움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어 왔다. 만약 우리은행 과점주주들이 이번 사태의 원인을 파벌 싸움으로 인식할 경우 이종휘, 이순우, 이광구로 이어진 내부 출신 은행장이라는 10년 전통도 무너질 수 있다.

일단 행추위는 내부 출신인 손태승 글로벌부문장과 최병길 삼표시멘트 대표(전 경영기획본부 부행장)를 최종 후보군에 포함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손 부문장과 최 대표의 경우 각각 한일·상업은행 출신이라는 점에서 내부 계파갈등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는 관전평도 나온다. 때문에 그동안 업계에서는 외부 출신 은행장을 선임한 뒤 지주사 전환 과정에서 회장은 외부, 은행장은 내부 출신이 맡는 시나리오가 유력하게 거론된 바 있다.

채용 비리 후폭풍은 시중은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찍부터 특혜 채용 의혹에 휘말렸던 금융감독원은 연말 인사에서 부원장보급 9명을 포함해 임원 13명 전원이 교체되는 초유의 인사 태풍을 겪었다. 최근 금감원이 금융사들로부터 갹출하는 분담금 관리감독권을 놓고 기획재정부와 금융위원회가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도 금융당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반영하고 있다.

올해 초 연임에 성공한 김용환 NH농협금융 회장도 인사 청탁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이다. 여기에 이경섭 NH농협은행장이 12월 임기 만료를 앞두고 있어 자칫 리더십 공백 사태로 이어질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하기 어렵다.

일각에서는 채용 비리에 대한 현 정부의 척결 의지가 과거 어느 때보다 강력하다는 점에서 파장이 더욱 확산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일부 은행은 경영진의 친인척이, 또 다른 은행은 주요 고객의 자녀가 채용된 사례가 많은 것으로 안다외부의 압력과 유혹에 빈번하게 노출되는 은행 업무의 특성상 특혜 채용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곳은 드물 것이다라고 말했다.

금융권 적폐 청산의 역설 ‘관피아 부활’
KB·하나금융, 노조 반발에 리더십 흔들
정부의 적폐 청산 기조는 노조의 경영 참여 요구와 맞물리면서 은행권 노사 갈등을 증폭시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KB국민은행 등 KB금융 계열사 노조는 윤종규 회장의 연임 결정을 셀프 연임으로 규정하고 노동이사제도입 등에 대한 공세 수위를 높여 왔다. 최근 열린 KB금융 임시주주총회에서 윤 회장의 연임과 허인 은행장의 선임이 최종 결정됐지만, 노동이사제 등 노조 측 안건은 부결됐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다양한 논란거리를 남겼다. KB금융 최대주주인 국민연금은 국제의결권 자문기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반대권고에도 불구하고 노동이사제 도입에 찬성했다. 특히 의사결정 과정에서 외부 전문가로 구성된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도 거치지 않으면서 2년 전 삼성물산-제일모직합병 당시의 정권 눈치 보기가 재현됐다는 비판을 받았다. 노동이사제는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 사항이기도 하다.

노조는 내년 3월 정기주총에서도 노동이사제 도입과 함께 사외이사후보추천위원회 등 이사회 내 각종 위원회의 회장 참여를 제한하는 내용으로 정관 변경을 추진한다는 방침이어서 노사 대치 상황은 한동안 지속될 공산이 크다. 하나금융지주도 김정태 회장과 함영주 KEB하나은행장의 동반 퇴진을 주장하는 노조 측 압박에 홍역을 앓고 있다. 노조는 최순실 국정농단사태와 관련해 최 씨의 금고지기로 알려진 이상화 전 본부장의 승진에 김 회장과 함 행장이 모두 연루됐다며 사퇴를 촉구하는 집회를 연일 이어가고 있다.

금융권 적폐 청산의 역설 ‘관피아 부활’
민간 CEO 줄줄이 낙마낙하산 대신 관피아
사실 새 정부 출범 당시에만 해도 국내 은행이 적폐 청산의 표적이 될 것이라는 관측은 드물었다. 오히려 문재인 정부가 금융권의 고질적 병폐로 관치 금융을 거론하면서 정권 교체기마다 반복됐던 친정부 성향의 낙하산 인사에 대한 우려가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의 금융 인맥으로 분류되는 퇴직 인사들이 속속 금융권 복귀를 선언한 데 이어, 기존 민간 출신 CEO들이 줄줄이 낙마하면서 전 정권에서의 발탁 인사에 대한 축출 작업이 본격화된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더욱 우려스러운 부분은 민간 출신 CEO들이 외풍에 휘둘리면서 금융권 협회장 자리에 관료 출신들이 득세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금융권 적폐를 도려내겠다는 문재인 정부 행보가 관피아(관료+마피아)’라는 구태를 끄집어낸 셈이다. 통상 민간 금융사의 경우 외풍이 강해질수록 힘 있는 관료 출신을 영입해 바람막이로 활용하려는 욕구가 강해진다. 실제 손해보험협회는 옛 재무부 관료 출신인 김용덕 전 금융감독위원장을 신임 회장으로 선임했다. 김 회장은 행정고시 15회로 최종구(25) 금융위원장보다 한참 선배다.

손해보험협회장에 장관급출신이 선임되면서 임기 만료된 은행연합회장과 생명보험협회장 자리에도 고위 관료 출신들의 올드 보이가 잇따라 하마평에 오르내리고 있다. 은행연합회장에는 민간 출신인 신상훈 전 신한금융지주 사장과 함께 홍재형 전 경제부총리가 유력 후보로 부상한 가운데 김창록 전 산업은행 총재, 윤용로 전 외환은행장 등이 하마평에 올랐다. 또 생명보험협회장에는 양천식 전 수출입은행장과 진영욱 전 한국정책금융공사 사장 등이 후보군에 포함됐다.

공인호 기자 ball@hankyung.com
일러스트 허라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