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상상력의 보고, 신화

<천하도>.
<천하도>.
.">
이방인이라는 키워드는 신화 세계에서 타자에 대한 인식을 보여준다. 나와 다른 존재를
어떻게 바라보고 그려냈는지에 대한 신화적 상상력이다. 인간 사회의 위계질서(hierarchy)에서 어떻게 함께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지에 대한 동양 신화의 답은 포용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재서 이화여대 명예교수

신화에는 신과 영웅들이 주역으로 등장하지만 괴물, 요괴는 물론 기이한 모습을 한 이방인들도 등장해 신화 세계의 신비한 분위기를 한껏 더해준다.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를 보면 주인공이 대인국, 소인국 등 이방인들이 사는 나라를 여행하며 많은 모험을 겪는다. 근대 이후에 지어진 이 소설은 중세의 <박물지>나 여행기에서 묘사된 이방인들로부터 착상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신화 책인 <산해경(山海經)>에는 이들 서양의 <박물지>나 여행기의 기록보다도 훨씬 오래되고, 매우 다양한 이방인들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어 주목을 요한다. 동양 신화의 이방인들은 문명인이 산다고 생각했던 중국 대륙의 중심 지역 곧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사방의 변방 지역에 주로 거주한다. 가령 변방에는 다음과 같이 우민국, 관흉국, 장비국, 효양국, 저인국 등과 같은 이방인들의 나라가 있다.
우민국이 그 동남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머리가 길고 몸에 날개가 나 있다(羽民國在其東南, 其爲人長頭, 身生羽). <해외남경(海外南經)>
몸에 날개가 나 있는 우민국 사람들은 새처럼 알로 태어난다고 한다. 여기서 연상되는 것은 고구려의 건국 영웅 주몽의 탄생신화다. 주몽 역시 알에서 태어나는데 이러한 신화는 중국 대륙의 동남 해안 지역에 거주했던 동이계(東夷系) 종족들이 새를 숭배했던 풍속과 관련이 있다.
관흉국이 그 동쪽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가슴에 구멍이 나 있다(貫胸國在其東, 其爲人胸有竅). <해외남경>
관흉국 사람들은 그들의 선조가 가슴을 찔러 죽은 후 계속 그렇게 가슴이 뚫린 채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은 상하 질서가 엄격한 종족이었다. 존귀한 이가 행차할 때면 옷을 벗고 비천한 것들로 하여금 대나무로 가슴을 꿰게 해 가마를 탄 것처럼 다녔다고 한다.
장비국이 그 동쪽에 있는데 물속에서 고기를 잡아 양손에 각각 한 마리씩 들고 있다(長脾國在其東, 捕魚水中, 兩手各操一魚). <해외남경>
장비국 사람은 팔이 엄청 길었다. 그래서 그들은 물가에 꼿꼿이 선 채로 긴 팔을 물속으로 뻗어 고기를 잡았다고 한다. <동이전(東夷傳)>의 기록에 의하면 옥저 해안에서 소매 길이가 3장(丈)이나 하는 베옷을 건진 적이 있다고 했는데 이로 미루어 장비국이 동해 어디쯤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효양국이 북구의 서쪽에 있다. 그 생김새는 사람의 얼굴에 입술이 길고 검은 몸에 털이 나 있으며 발뒤꿈치는 반대로 향했다. 사람을 보면 웃으며 왼손에 대통을 쥐고 있다(梟陽國在北朐之西, 其爲人人面長脣, 黑身有毛, 反踵, 見人笑亦笑, 左手操管). <해내남경(海內南經)>
효양국 사람은 사실 호모사피엔스가 아니라 비비(狒狒) 종류의 원숭이인 것 같다. <산해경>에서는 이들을 인간으로 간주했다. 이들은 사람을 보면 웃는다고 했는데 그때가 도망갈 기회였다. 웃느라고 긴 입술이 위로 말려 올라가 눈을 가릴 때 잽싸게 도망가야만 비비의 공격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인국이 건목의 서쪽에 있는데 그들은 사람의 얼굴에 물고기의 몸이고 발이 없다(氐人國在建木西, 其爲人人面而魚身, 無足). <해내남경>
저인국은 인어가 사는 나라다. 그런데 이들은 서양의 인어공주처럼 왕자와 사랑을 하는 로맨틱하고 예쁜 인어가 아니다. 남성 인어로 대표되는 이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비단을 짜고 그것을 육지로 팔러 다니는 생계형 인어다. 그들은 진주를 생산하기도 했는데 그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그릇을 놓고 울기만 하면 눈물이 진주가 돼 떨어졌다고 한다. 인어아저씨 저인은 인어는 예쁜 아가씨이어야만 한다는 우리의 통념적인 상상을 깨뜨린다. 그래서 진부한 인어공주의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예컨대 싸이의 노래 ‘강남스타일’이 수록된 앨범 재킷에는 인어아저씨 로고가 그려져 있으며, TV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에서는 인어로 분(扮)한 전지현이 눈물을 흘려 진주를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섭이국이 무장국의 동쪽에 있다. 두 마리의 무늬 호랑이를 부리며 그 사람들은 두 손으로 자신들의 귀를 잡고 있다. 외따로 떨어져 바다 한가운데에 사는데 물가 근처에서는 괴물들이 드나든다.
두 마리의 호랑이는 그 동쪽에 있다(聶耳之國在無腸國東, 使兩文虎, 爲人兩手聶其耳, 縣居海水中, 及水所出入奇物. 兩虎在其東). <해외북경(海外北經)>
섭이국은 귀가 큰 사람들이 사는 나라다. 이 나라 사람들은 크고 무거운 귀를 두 손으로 받치고 다니며 잠을 잘 때 한 귀는 요로 깔고 다른 한 귀는 이불로 덮고 잔다고 했다.
이상 살펴본 바와 같이 동양의 이방인들은 모두 비정상적인 신체를 지니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등 외견상 서양의 이방인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리적 거리가 차이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고, 움베르토 에코는 주변부의 비정상인은 중앙의 정상인을 위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중원의 중국인이 주변부의 민족을 문화적으로 차별하는 의식에서 이방인들을 희화화(戲畫化)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유럽인이 그들의 <박물지>에서 이방인을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그렸던 것과 비슷한 현상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는 피상적인 소견일 뿐 비록 동양 신화 속 이방인의 이미지는 낯설고 이상할지라도 그들에 대한 언급과 해설에서 적대적인 감정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 세계에서 배제돼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야 할 존재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 인본주의 전통에서 타자는 주체를 위협하는 위험한 대상으로 간주돼 엄격히 격리되거나 배제된다. 그러나 동양 신화에서 타자는 동물종마저도 인간계에 포함되고 이방인은 그들의 정체성을 간직한 채 사해동포(四海同胞)의 일원으로 이 세계의 구성에 참여한다. 동양 신화의 이방인에 대한 이러한 관용이야말로 향후 로봇, 사이보그, 복제인간 등 다양한 타자와 공존해야 하는 포스트 휴먼 시대에 꼭 필요한 마인드라 할 것이다.
저인국
저인국
섭이국
섭이국
관흉국
관흉국
box 팔다리가 길어 아름다운 존재들
동양 신화에는 팔다리가 긴 형태의 존재가 많이 등장한다. 중국의 남쪽 바다 바깥 지역에 사는 장비국 사람들은 물속에 선 채로 긴 팔을 물에 뻗어 물고기를 잡았다. 이들이 좀 깊은 바다로 가서 고기를 잡아야 할 때는 근처에 사는 장고국 사람들과 협동을 해야 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다리가 길어 3장, 즉 9m가 넘었다는데 이들은 장비국 사람들을 등에 업고 깊은 바다까지 나아가 고기를 잡게 했다. 그렇게 해서 잡은 고기를 두 종족은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마치 개미와 진딧물 사이와 같은 아름다운 공생 관계다.
팔이 기형인 종족으로는 장비국 사람 이외에 외팔이인 일비국 사람들이 있다. 서쪽 바다 바깥에 살았던 그들은 외팔과 외눈에 콧구멍이 하나인 괴상한 생김새였다. 이곳에는 호랑이 무늬의 누런 말이 있는데 사람을 닮았는지 그것들도 외눈에 앞발이 하나였다. 근처에는 또 다른 외팔이들이 사는 기굉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들은 외팔이지만 눈이 셋에다 특이한 것은 남녀의 생식기를 한 몸에 지닌 자웅동체, 즉 어지자지였다.
그들은 신기한 말을 타고 다녔다. 길량이라고 부르는 그 말은 황금색 눈빛에 아름다운 무늬가 있었는데 이것을 타고 다니면 천 살까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기굉국 사람들은 늘 이 말을 타고 다녔으니 아마 퍽 오래 살았을 것이다. 그들 곁에는 또 적황색 몸빛에 머리가 둘 달린 이상한 새가 항상 따라다녔다고 한다.
[이방인의 세계] 이상한 나라에 사는 괴상한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