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상상력의 보고, 신화

<중국연환화>에 묘사된 ’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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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의 큰 줄기에는 영웅들이 있다. 영웅신화로 분류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리더와 리더십에 관한 신화적 상상력이기도 하다. 신화 속 영웅들의 면면엔 오랜 기간에 걸쳐 사람들이 갈망했던 리더의 조건이 투영돼 있다. ‘누가 리더가 될 수 있나’에 대한 동양 신화의 답은 ‘탁월성’이 아니라 ‘상호성’으로 요약된다.
문현선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 <세계신화총서> 역자, <신화, 영화와 만나다>·<귀신 요괴 이물의 비교문화론> 공동 저자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보물을 찾아 고향과 집을 떠난다. 보물은 빼앗긴 왕권의 상징인 황금 양털일 수도 있고, 잃어버린 부계 혈통일 수도 있고,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는 불사의 비약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보물을 구하러 떠난 소년이 걸어야 하는 길은 피할 수 없는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모험의 길이다.
소년은 길 위에서 나쁜 꾐에 빠지기도 하고, 늙은 마녀에게 호된 시련을 당하기도 하고, 무시무시한 괴물과 맞붙어 싸우기도 한다.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 떨어지거나 고래 뱃속에 들어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어둠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모험의 과정을 거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더 이상 ‘나의 살던 고향 집’에 머무르던 그 어린 사내아이가 아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소년은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바로 ‘영웅’이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영웅신화다
영웅(英雄)이라는 말은 꽃부리 영(英)과 수컷 웅(雄)이 합쳐진 글자로 수컷의 가장 꽃다운 시절, 즉 소년을 가리킨다. 그래서 ‘영웅은 소년에서 나온다(英雄出少年)’고 하는 모양이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교신화학자라 일컫는 조지프 캠벨은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구조적으로 동일한 단일신화(單一神話, monomyth)로 간주하고 이 이야기들의 주인공을 ‘영웅’이라 불렀다. 공자, 석가, 예수, 마호메트와 같은 성인들의 삶의 연대기도 따지고 보면 단일신화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다.
캠벨에 따르면, 영웅은 일상적인 삶의 세계에서 초자연적인 경이의 세계로 떠난다. 여기에서 그는 엄청난 세력과 만나고 결국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다. 영웅은 이 신비스러운 모험에서, 동료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힘을 얻어 현실 세계로 돌아온다.
‘일상’적인 삶에서 ‘경이’의 세계로, 그리고 그 위험 속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무사히 모험을 마친 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선물’을 가지고 돌아온 소년은 더 이상 한낱 어린아이(少年)가 아니다. 그가 속한 세계의 모두가 우러러보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영웅인 것이다. 공동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롤 모델이 된다는 의미에서 영웅은 다름 아닌 그 사회의 리더(leader)다.

“소년이여, 신화가 되어라!”
단군, 주몽, 온조, 수로, 혁거세 등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 삼국의 신화 속 영웅들도 한때는 소년이었다. 고구려 건국신화의 주인공 주몽의 일대기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영웅신화의 구조를 오롯이 재현한다.
주몽은 하늘의 아들 해모수와 강의 딸 유화를 부모로 삼아 태양과 같은 알의 형상으로 태어났다.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기에 여러 번 버려졌지만 날짐승과 들짐승의 보호를 받고 부화돼 사람으로 거듭났다. 신이한 탄생 때문인지 그는 일곱 살 나이에 벌써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쏠 줄 알았다. 그뿐만 아니라 쏘는 대로 명중시켰으므로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의 주몽이라는 명예로운 이름까지 얻었다.
해모수가 떠난 뒤 친정에서도 쫓겨난 유화는 동부여 금와 왕에게 의탁하며 주몽을 키웠는데, 왕자들이 주몽을 시기하고 해치려 하므로 하릴없이 어린 아들을 떠나보냈다. 쫓기던 주몽은 물가에 이르자 하늘을 우러러 부르짖었다. “나는 하늘나라 해모수의 아들이요, 강의 주인 하백의 외손자다. 오늘 도망하고 있는데 추격자가 뒤를 쫓아오니 어찌하리오?”
그러자 물고기와 자라, 거북 등이 나타나 다리를 놓았다. 주몽이 강을 건너가자 이 생명의 다리는 곧 흩어졌고 동부여의 군대는 더 이상은 그를 추격할 수 없었다. 나중에 졸본 땅에 다다른 주몽은 고구려라는 나라를 세웠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그때 주몽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삼국사기>에는 그래도 스물두 살로 적혀 있다). 주몽은 고향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의 가족들은 고구려의 왕족이 됐다. 그는 자신의 공동체에 ‘나라’를 선물한 것이다. 이처럼 문헌으로 기록된 동아시아 신화 속 주인공은 대부분 건국의 주역, 즉 건국 영웅들이다.
<고사기(古事記)>에 기록된 일본 신화 속의 스사노오도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건국영웅이다. 스사노오는 원래 하늘의 신 이자나기의 아들이자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의 남동생이었다. 그는 어머니가 그리워 눈물을 흘리다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누이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다가 하늘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땅으로 내려가서는 머리와 꼬리가 각각 여덟 개씩 되는 무시무시한 괴물 뱀 야마타노 오로치를 물리치고 제물로 바쳐지게 될 어여쁜 공주를 구했다. 구시나다히 공주는 생명의 은인인 스사노오와 결혼했고, 스사노오는 그녀의 부모가 다스리던 왕국을 얻었다.
‘괴물을 물리치고 공주와 결혼해 왕국을 얻었다’라는 명제는 영웅신화의 구조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자주 잊히기는 하지만 주몽에게도 소서노라 불리는 어여쁜 공주가 있었다. 신화 속의 공주들에게는 대개 왕국을 소유한 아버지가 있고, 또한 그 왕국을 계승할 아들이 있다.
주몽과 만나기 전에 이미 소서노에게는 비류와 온조라는 아들들이 있었다. 나중에 소서노는 이 아들들을 데리고 더 남쪽으로 가서 백제라는 이름의 다른 나라를 세웠다. 그 이야기는 또 다른 영웅신화가 된다.

그리고 소녀들이 있었다
소년들만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기록된 동아시아 신화의 영웅들은 대부분 소년이지만, 여전히 수많은 여성 영웅들의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때로는 영웅이 되는 소녀들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문헌도 존재한다.
고대 중국의 신화 컬렉션인 <수신기(搜神記)>에는 스사노오처럼 괴물 뱀을 퇴치하고 자기 가족에게 왕국을 선물한 소녀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기(李寄)다. 이기는 오늘날 중국 푸젠 지역에 해당하는 동월(東越)의 어느 딸 부잣집 막내딸이었다.
동월에는 길이가 몇 십 자나 되고 굵기는 한 아름도 넘는 커다란 구렁이가 있어서 사람들에게 해를 입혔다. 아홉이나 되는 소녀들을 제물로 바쳤지만 괴물의 기세는 누그러질 줄 몰랐다. 더 이상 아무도 딸을 바치려 하지 않는 최악의 상황에서 이기는 구렁이 소굴에 들어가겠다고 자진했다.
그녀는 품 안에 날카로운 비수를 품고 뱀을 물어뜯는 사나운 개를 앞세우고 구렁이 소굴로 갔다. 몇 섬이나 되는 떡을 빚어 진득한 꿀을 붓고 동굴 앞에 놔 둔 채 구렁이를 기다렸다. 달콤한 꿀 냄새에 이끌린 구렁이는 슬금슬금 기어 나와 떡을 몽땅 삼켰고 배가 부르자 꾸벅대며 졸기 시작했다. 이기는 개를 풀었고 몸이 무거워진 구렁이는 이 갑작스런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이어서 이기는 품 안에 든 날카로운 비수로 구렁이를 베어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동월의 왕은 이기를 궁궐로 불렀고 왕후로 삼았다. 나아가 아버지에게는 벼슬을 주고 어머니와 언니들에게는 후한 상을 내렸다. 소녀가 ‘괴물을 물리치고 왕과 결혼해 왕국을 얻은 것’이다.
우리 신화들 속에도 이기 못지않게 씩씩한 소녀들이 있다. 주몽 어머니 유화도 참 씩씩한 소녀였다. 하늘에서 내려온 해모수를 만나 첫눈에 반한 그녀는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엄한 아버지 하백의 허락도 받지 않고 그의 아내가 되기를 결심했다.
해모수가 기약도 없이 하늘로 떠나고 성난 아버지의 노여움 때문에 우발수 아래 갇혀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버텨냈다. 주몽을 낳은 뒤에는 주몽에게 의탁해 아들을 키우면서 사방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했고, 그를 떠나보낸 뒤에도 곡식의 씨앗을 날려 보내는 듯 조력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그러나 문헌의 기록 속에서는 은유와 상징으로 숨겨진 기호로만 존재한다.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구비신화 소녀들은 한층 더 발랄하고 깜찍하다.

우리 신화 속 여성 영웅들
우리나라의 농경신화를 대표하는 <세경본풀이>의 어여쁜 주인공 자청비는 부모가 하늘님께 빌고 빌어 얻은 무남독녀다. 하늘에 ‘스스로 청하여’ 얻은 딸이기에 ‘자청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란 자청비는 어려서부터 비범했다.
총명하고 활달한 자청비는 어느 날 집 앞 우물가에서 과거 공부로 하러 가는 하늘나라 문곡성의 아들 문 도령을 만나 그의 배우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남장을 한 채 함께 동문수학의 길을 떠난다. 재주 많은 자청비는 모든 면에서 동문들보다 탁월한 성적을 보인다. 문 도령은 자청비를 샘내면서도 이 어리고 똑똑한 동문에게 늘 감탄한다. 그러던 어느 날, 문 도령은 “이제 결혼할 때가 됐으니 천상으로 돌아오라”라는 아버지의 서신을 받는다. 다급해진 자청비는 자신도 집으로 돌아가겠다며 그를 따라나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자청비의 정체(!)를 알게 된 문 도령은 결국 자청비의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고하겠다며 떠나간다. 하늘로 간 문 도령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만 문 도령은 돌아올 기약이 없고, 자청비와 한 날 한 시에 태어나 그녀를 사모하던 노비 정수남은 나쁜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자청비는 꾀를 내서 그의 마수를 피하고 결국 정수남은 목숨을 잃는다.
예상치 못한 일은 여기서 발생한다. 세상에 하나 뿐인 귀한 딸임에도, 자청비의 부모는 사람을 죽인 그녀를 집 안에 둘 수 없다며 쫓아낸다. 집에서 쫓겨난 자청비는 그 뛰어난 재주로 정수남을 살려서 돌아가는데, 이번에는 사람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괴물이란 이유로 또 쫓겨난다.
집에서 쫓겨난 자청비는 진짜 모험의 길로 들어선다. 남장을 하고 서천꽃밭의 해악을 없애서 서천꽃밭의 부마가 되기도 하고, 직녀 할머니의 집에서 문 도령의 혼수를 장만하며 그가 오기를 기다리기도 하고, 시아버지 문곡성 앞에서 별별 어려운 시험을 다 통과하기도 하고, 서천꽃밭의 공주를 위로하라 보냈더니 망정수(忘情水)를 마시고 자신을 잊어버린 문 도령을 찾아오기도 하고, 세상 모든 시샘을 받아 죽은 문 도령을 살려내기도 하고 등 세상 모든 고생을 ‘자청’한 듯, 사랑에 살고 사랑에 죽는 이 소녀가 무릅쓴 위험은 차마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이 모든 시련의 과정을 다 이겨낸 소녀는 결국 하늘님의 인정을 받고 천상의 거주자, 즉 신이 된다.
흥미로운 것은 신이 된 소녀 자청비, 아니 새색시 자청비가 부귀영화를 누리게 해주겠다는 시아버지 문곡성의 특별한 배려를 뿌리치고 고생스럽게 농사를 짓는 농경신이 되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찌 그뿐이랴! 두 번이나 자신을 잊고 약속을 어긴 베필 문 도령은 상경신으로 삼아 농사를 주관하게 하고, 자신을 해쳤던 정수남은 너그럽게 용서해 하경신으로 삼아 목축을 주관하게 했으며, 자신은 중경신이 돼서 이 두 신을 돕기로 한다. 자신의 이름대로,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도 스스로 사람들을 뒷받침하는 2인자를 ‘자청’한 것이다. 자청비가 영웅이 된 것은 그 누구보다도 탁월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함께 사는 법을 알았기 때문인 셈이다.
생각해보면, 자청비만이 아니라 우리 신화 속의 모든 여신들이 그렇다. 자신을 버린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머나먼 서천서역국으로 생명수를 구하러 떠났던 바리데기는 되살아난 아버지의 왕국을 물려받는 대신 비참한 원혼들을 구원하는 무녀신이 됐으며, 자기 이름과 부모를 찾아 떠났던 오늘이는 가는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들의 문제를 들어주고 풀어주는 천상의 선녀가 됐고, 야속하게 다가와서 무정하게 떠난 제석님의 아이를 셋이나 낳은 당금애기는 홀어머니 신분으로 세상을 떠돌며 아이 낳는 여성들을 돕는 산파신이 됐으며, 누구 덕으로 부잣집 딸이 됐느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제 복으로 살아간다고 답했다가 쫓겨난 가믄장아기(감은장아기)는 가난하지만 착한 사내와 결혼해 갑부가 된 뒤 눈 먼 거지가 된 부모를 거두고 사람의 운명을 좌우하는 운명의 신이 됐다.
이처럼 우리 신화 속 여신들은 모두 한때는 소녀였다. 그것도 부모를 잃거나 집에서 내쳐져 의지할 곳 하나 없던 어린 소녀. 소년들은 모험을 끝내면 집으로 돌아간다. 아니면 누군가와 결혼해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적어도 왕국의 반을 얻는다. 그러나 소녀들에게는 돌아갈 집이 없다. 앞으로 살아갈 곳, 새로운 집을 구하는 것은 온전히 그녀들의 몫이다. 집은 쉽게 구해지지 않는다. 구하더라도 그냥은 지켜지지 않는다. 자청비가 그랬던 것처럼 끊임없이 생고생을 자청해 일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딸’이라는 이유로 버려졌던 아이 바리데기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서천서역국을 찾아갔다. 모르는 길이라서 바리데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부탁하는 일을 들어주며 물어물어 찾아갔다. 서천서역국에서 그녀는 생명수를 지키는 무장승을 만나는데, 무장승은 처음에는 나무를 해 오라, 불을 때라, 물을 길어오라 하더니, 일들을 다 해내고 난 뒤에는 여자인 줄 알았으니 자기 베필이 돼 아들 셋을 낳으라 한다.
이처럼 아버지를 구하러 갔던 딸은 알 길 없는 길을 가며 긴긴 시간을 거쳐 어느덧 남의 집사람이 돼 그 집 살림을 도맡아 갈무리한 뒤에야 낳은 아들들을 안고 업고 앞장 세워 돌아오는 것이다. 소년들은 혼자 돌아오지만, 소녀들은 누군가와 함께 온다. 돌아와서는 고생을 사서하며 남을 돕는다.
아버지의 왕국을 계승하는 대신 길 잃은 영혼들을 구제하고, 지아비의 복덕을 누리는 대신 아이 낳는 여인들을 돌보고, 천상의 전능을 누리는 대신 하늘과 땅을 오가며 사람들을 먹일 일용할 양식을 짓는다.
우리 신화 속 여신들은 이처럼 계단 위로 하나 더 올라가기보다 섰던 자리에서 하나 더 내려온다. 뒤로 물러나 지켜보고 등을 토닥이며 앞으로 가도록 밀어준다. 낮은 자리에서 세상이 보다 살기 좋은 곳으로 바뀌도록 든든하게 떠받쳐주는 영웅, 우리 신화 속 여신들은 이런 리더십을 발휘하는 소박한 리더들이다.
조선민화박물관, 한국민화뮤지엄이 소장한 민화 <바리공주도>.
조선민화박물관, 한국민화뮤지엄이 소장한 민화 <바리공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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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신화 속 '오늘이'는 들판에서 자랐다. 국내 애니메이션 <오늘이>로 재탄생.
우리 신화 속 '오늘이'는 들판에서 자랐다. 국내 애니메이션 <오늘이>로 재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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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영웅신화의 구조와 통과 제의
조지프 캠벨은 영웅이 치르는 신화적 모험의 전형적인 단계들이 통과 제의(rites of passage)의 도식과 일치하며 이러한 의례의 확장판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영웅신화는
‘통과 제의의 언어적 상관물’, 즉 통과 제의에 의미를 부연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출생, 명명, 결혼, 장례 등 다양한 통과 제의 가운데서도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의례를 꼽으라면 역시 관례(冠禮), 즉 성인식일 것이다. 여러 사회의 성인식에서 소년들은 ‘분리-고립-통합’을 경험한다. 소년은 어머니와 가정으로부터 분리돼 고립된 장소에서 일정 시간 동안 특정한 경험을 강요받는다. 이 상징적인 죽음,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시험을 거쳐야만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은 소년은 ‘영웅=어른 남성’으로서 원래의 세계에 통합된다.
이것이 통과 제의의 가장 일반적인 도식이다. 소년들뿐 아니라 소녀들도 혹독한 시련의 과정을 겪는다. 동아시아 신화 속의 수많은 여신들, 여성 영웅들은 모험을 성공적으로 마친 소녀들이다. 소녀들은 버려지고 길 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고난을 나누며 문제를 풀어 가는 과정을 통해 딸에서 아내로, 아내에서 어머니로, 한 사람의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한다. 동아시아 신화 속의 소녀들이 영웅이 되는 과정은 남의 속내를 들어주고, 남의 문제를 내 문제처럼 아파하고, 그래서 그 문제를 풀어보고자 노력하며, 하는 김에 겸사겸사 너나 없는 우리의 문제로 만들어 간다.
[영웅과 모험] ‘영웅’이라 쓰고 ‘리더십’이라 읽는다
box 은혜 갚은 두꺼비 이야기
영웅신화의 구조는 민담 속에도 살아 있다. 천애 고아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소녀는 부뚜막에 앉은 두꺼비를 가엾게 여겨 제 밥 한 술을 덜어주었다. 하루, 이틀, 일 년이 넘도록 소녀의 밥을 얻어먹은 두꺼비는 어느새 송아지보다 크게 자랐다. 먹는 것도 소녀보다 더 많이 먹었다. 가난한 소녀는 웃자란 두꺼비를 먹이느라 나날이 여위어 바람에도 꺾일 듯 가냘파졌다. 그래도 소녀는 두꺼비에게 밥 덜어주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뒤편 성황당에 괴물이 나타났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해치지 않는 대신 해마다 십대 소녀 한 명을 제물로 요구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의지할 뒷배도 없는 소녀는 덜컥 제물로 뽑혔다. 제물로 바쳐지는 날, 소녀는 뽀얗게 씻은 쌀로 따뜻한 밥을 한 솥이나 지었다. 여느 때처럼 지은 밥을 맛있게도 먹는 두꺼비를 보고 있자니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오늘 제물로 끌려가 죽고 나면, 내일부터 네 밥은 누가 챙겨 줄까.” 착하디착한 소녀는 오늘 괴물의 밥이 될 제 운명보다 두꺼비의 내일 끼니를 더 걱정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한 솥 밥을 다 먹어치운 두꺼비가 소녀의 운명을 알기라도 한 것처럼 앞장을 선 것이다. 소녀는 두꺼비가 걱정되면서도 마음이 든든해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마을 뒤편으로 갔다. 성황당은 괴괴한 정적이 감돌았고 곧이어 고약한 비린내 같은 것이 확 끼쳤다. 아찔한 독 기운에 소녀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소녀는 눈앞에 펼쳐진 처참한 광경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천 년 묵은 지네 요괴와 두꺼비가 한 덩어리로 뒤엉킨 채 널브러져 있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소녀는 자세한 경위와 정황을 알 길이 없었지만, 두꺼비가 자신을 위해 지네 요괴와 사투를 벌였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 수 있었다. 두꺼비는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자신을 거두어준 소녀의 은혜를 목숨으로 갚은 것이다. 모두가 잘 아는 <은혜 갚은 두꺼비> 이야기다.
이 이야기는 엄밀하게 말하자면 신화가 아닌 민담이다. 그러나 수많은 민담들처럼 영웅신화의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동아시아의 영웅신화는 이처럼 다르지만 같은 듯 기묘한 유사성을 지닌다. 그래서 궁금해진다. 이 이야기의 영웅은 도대체 누구인가? 소녀인가, 두꺼비인가?
소녀도 두꺼비도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그리 대단한 선물을 안기지는 못했다. 적어도 다른 영웅들처럼 ‘왕국’을 안겨준 것은 아니다. 소녀는 두꺼비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었고, 두꺼비는 보답으로 소녀의 목숨을 구했을 뿐이다. 물론 두꺼비의 행위가 부수적으로 그들의 세상에 자그마한 평화를 선사하기는 했다.
어쩌면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소녀의 착하디착한 마음씨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목숨을 건졌어도 소녀는 여전히 가난하고 의지할 데 없는 천애 고아다. 아까운 밥을 뺏어먹는 두꺼비가 없어서 예전보다 살진 일상을 누린다고 해도 더 많은 시간을 홀로 쓸쓸하고 외롭게 지내야 할지 모른다.
많은 신화와 전설과 민담 속에서 ‘두꺼비’와 같은 양서류는 종종 신분이 낮아서 걸칠 것이 없는 젊은 남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야기 속의 두꺼비는 어쩌면 소녀보다 더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고 어린 소년이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생각하건대, 이 영웅신화의 주인공은 우리에게서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사회의 변화에 따라 리더십도 변화한다. 사회가 요구하는 리더십을 실행하는 사람이 그 시대의 리더인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아무도 자기 머리 위에 서 있는 누군가를 원하지 않는다. 항상 곁에 있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고 언제든지 넉넉한 마음으로 손을 뻗어 당겨주고 밀어주는 리더를 원한다. 서번트 리더십이니, 멘토 리더십이니 하는 새로운 리더의 상이 끊임없이 요구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