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g story 상상력의 보고, 신화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인간의 지력에서 상상력은 새로운 창조로 향하는 줄기에 해당한다. 익숙한 것에서 탈피해 세상을 새롭게 보는 데서 창의적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신화란 무엇이고, 왜 지금 신화를 말하나. 과거의 신화를 오늘로 연결하는 키워드는 ‘신화의 귀환’, 그리고 ‘신화적 상상력’이다. 먼저 간단한 세 개의 이야기를 만나보자.# 신라시대 선덕여왕을 흠모한 지귀라는 젊은이가 있었다. 그는 평생 여왕을 한 번 만나보는 게 소원이었다. 절 앞에서 여왕을 기다렸는데 결국 만나지 못했다. 잠깐 조는 사이에 놓쳐버린 것이다. 선덕여왕은 팔찌 하나를 놓고 갔다. 지귀는 불귀신이 돼 버렸다.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심장에 불이 붙어 몸 전체가 탄 것이다.
# 최항은 부모의 반대에 상사병으로 죽었다. 죽어 혼이 된 최항은 여자를 찾아간다. 꽃 한 송이를 따서 자신의 머리에 꽂고 여자에게도 건네주며 꽃이 시들기 전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아침이 되자 여자는 남자가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관을 열어보니 남자의 버선에 흙이 묻어 있고, 머리에는 꽃이 꽂혀 있다. 여자의 눈물에 남자는 다시 깨어나고, 둘은 30년을 해로하다 한날한시에 죽는다.
# 서라벌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화녀에겐 이미 남편이 있었다. 신라 진지왕은 아름다운 도화녀를 사랑해 결혼하자고 애원했지만 도화녀는 남편이 죽으면 결혼을 승낙하겠다고 답한다. 그러나 상왕이 먼저 죽고 그 후에 남편이 죽는다. 진지왕은 귀신이 돼 다시 도화녀를 찾아와 이제 남편이 없으니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 후로 도화녀와 진지왕은 일주일을 같이 살았다.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귀신과 도깨비를 잡는다는 비형랑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우리 전설과 신화들이다. 공통점이 하나 있다. 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남자들이 정 때문에 신이 되고, 사랑에 목숨을 건다. 심지어 죽었다 다시 깨어나고, 죽어서도 다시 나타날 정도로 끈질긴 애정을 표현한다. 머리에 꽃을 꽂고 죽은 남성의 모습을 그린 이유는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그 시대 그토록 많은 여성들이 바랐던 현실에 없는 남성상이든지, 실제 순정적인 남성들이 많이 살았다는 사실의 반영이든지. 어느 쪽이든 자유연애라는 개념이 17세기 이후에 들어온 근대의 산물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우리 신화 속 애정의 원천적 구조는 상당히 로맨틱하다.
그러한 신화 속 지고지순한 남성상이 오늘날 현실에 다시 돌아왔다. 사랑 때문에 신이 돼서 900년을 달려오는 구조는 바로 우리가 열광했던 케이블TV tvN 드라마 <도깨비>에서 재현됐다. 실제 신화 속 도깨비의 모습도 혼자 사는 여자, 과부를 유난히 좋아하고 성심성의껏 돕는데 오히려 여자는 도깨비를 떼어내기 위해 여러 방법을 다 쓴다. 먼저 애정을 느끼는 쪽도, 더 많이 고생하는 쪽도 도깨비다. 얼마 전 종영한 tvN 드라마 <하백의 신부>에서도 초월적인 능력을 지닌 수신이 등장해 여자를 위해 신의 지위까지 포기하려 했다.
과거에도 비슷한 형태가 있었다. 몇 년 전 방영된 MBC TV 드라마 <구가의 서>에서는 400년 동안 자신의 짝을 찾아다니는 야수가 등장하고, <밤을 걷는 선비>에는 200년 전 죽은 애인을 찾아 길을 떠나는 남자 주인공이 그려졌다. 문현선 인문연구모임 문이원 연구원은 “사랑에 목숨을 거는 원천적 구조가 오래전부터 있었고, 억눌렸던 남자들의 정념이 표출되면서 신화의 원형이 대중매체에 발현되고 있다”고 말했다.
신화 속 애정의 구조가 돌아오다
우리 신화 속 존재했던 저승사자는 요즘 뜨는 캐릭터가 됐다. 배우 이동욱이 표현한 저승사자가 낭만적인 모습으로 그려진 이후, 케이블TV OCN 드라마 <블랙>에서 송승헌이 다시 한 번 저승사자에 도전했다.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그러했듯이 저승사자 하면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호러에 가깝다. 그런데 인간적이면서도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저승사자가 재해석되고 있다.
실제 우리 구비신화에서도 저승사자는 꽤 인간적이다. 가장 대표적인 저승사자인 강림도령의 경우 수완 좋은 부인의 도움을 얻어 저승사자를 골탕 먹이고 쫓아내게 된다. 그래서 나중에 저승사자가 된다. 글공부는 많이 했지만 인간관계나 처세술에 있어 박약했던 강림도령은 인간적인 정서를 가지고 있다. 이 원형은 오늘날 낯설면서도 친숙한 코드로 되풀이된다.
웹툰 속에도 대중적 인기를 누리는 저승사자가 있다. 주호민 작가의 웹툰 <신과 함께> 3부작(저승, 이승, 신화)은 네이버 웹툰의 대표 콘텐츠로 한국의 신화 속 인물들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했다. 2010년 연재를 시작한 이후 꾸준히 인기를 얻어 현재 재연재를 시작했다.
문화 콘텐츠로 돌아온 신화는 강력한 콘텐츠 파워를 자랑한다. 특히 문화 콘텐츠의 부가가치는 웹툰, 영화, 게임, 음반, 애니메이션, 캐릭터 상품, 출판, IPTV 등으로 진출 가능한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인 데 있다. <신과 함께>는 일본에서 리메이크돼 단행본이 출간됐고, 모바일 게임으로 변신해 새로운 유저들과 만났다. 뮤지컬에 이어 최근 영화로도 만들어져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이미 해외 12개국에 선판매되며 화제를 뿌렸다.
신화, 사람들의 갈망과 믿음을 담다.
문화 산업으로서의 신화의 힘은 해외 사례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할리우드의 영웅들은 <해리 포터> 시리즈(켈트 신화), <반지의 제왕>(북유럽 신화), <토르> 시리즈(북유럽 신화), <아바타>(중국 신화) 등으로 대개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올해로 20년을 맞은 <해리 포터>는 아직도 두터운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일본은 요괴들의 천국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미즈키 시게루는 작가이면서 요괴 연구가이기도 하다. 일본의 국민 만화 <게게게노 기타로>에 등장하는 요괴는 도시를 부활시키는 데 기여했다. 미즈키 시게루의 고향인 인구 3만5000명에 불과한 사카이미나토시는 요괴 덕분에 연 관광객 300만 명이 방문하는 인기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게임 분야에서는 증강현실(AR)과도 만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까지 게임의 세계로 끌어 모은 ‘포켓몬고’가 대표적이다. 바로 중국의 고전 신화 <산해경(山海經)>에 등장하는 캐릭터가 포켓몬고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김윤아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는 “포켓몬고의 인기 요인은 신화의 형태를 따르는 진화 과정과 함께 다양한 캐릭터에 있다”며 “잠만보나 야돈같이 무위도식하는 캐릭터가 ‘세상엔 꼭 1등만 있는 게 아니다’라는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만나 설득력을 얻은 것이다”라고 분석했다.
신화의 현대적 캐릭터는 반전 매력을 입힌 스토리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신들의 이야기에서 신성의 특징을 뽑아내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한 것이다. 요괴 자체는 끔찍한데 이미지는 귀엽게 표현된다. 또한 각각의 캐릭터에는 성격이 부여되고, 서사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 정서가 사람들의 시대적인 ‘갈망’, ‘믿음’과 통하면서 고부가가치 상품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신화는 인류의 상상력의 결정체로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신화는 수천 년의 긴 세월 동안 사람들의 입을 거치며 살아남은 이야기의 원류에 해당한다. 거기엔 인류 보편의 철학과 정서, 세계관과 인간관을 담고 있다. 조지프 캠벨은 신화를 ‘육체적 에너지로부터 부추김을 받은 상상력의 노래’라고 정의했다. 미르치아 엘리아데에게 신화는 ‘창조의 보고서’다. 상상의 눈으로 바라보고 이야기와 이미지로 구현한 삶의 갈망이 곧 신화다.
그리고 이러한 신화적 상상력의 핵심은 바로 ‘접속’에 있다. 나 아닌 다른 존재와의 자유로운 접합, 접속, 변신이 상상력이 구현되는 방식이다. 인간이 신이 되고 동물이 될 수 있다는 상상, 두 개의 이질적 요소를 은유적 상상력으로 하나로 엮어내는 능력. 이러한 신화적 하이브리드 상상력은 문화 콘텐츠를 뛰어넘어 다가오는 제4차 산업혁명의 ‘융합의 시대’에 혁신 성장의 키워드가 될 수 있는 이유다.
조현설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인지과학에서는 독립적인 좌뇌와 우뇌에 통로가 생기면서 물질 기반의 두뇌가 만들어지며 이후 상상력이 폭발했다고 본다”며 “벽화 동굴에 그림을 그림으로써 더 많은 동물을 얻을 수 있다는 상상을 한 것은 종교의 발생과도 관계있는 것으로 신화는 곧 인류사적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지금부터 '동양 신화'의 세계로 안내한다. 신화의 모티브는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그중에서 특히 동양 신화에 주목한 이유는 ‘새로운 상상력’의 자극이 될 수 있는 요소들이 동양 신화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신과 창조, 영웅과 리더십, 이방인과 타자, 요괴와 캐릭터의 키워드를 통해 각각 창조의 속성, 리더의 자격, 공존의 조건, 신화의 현대적 변용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길 바란다. 또한 전문가 좌담회를 통해 이러한 신화의 현대적 의미에 대해 파고들었다.
이현주 기자 char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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