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자 할리우드가 사랑한 SF소설 작가, 필립 K. 딕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인조인간 사냥꾼이 인조인간에게 생명을 느끼면서 그리는 인간성에 대한 정의, 그리고 인간다움에 대한 고찰을 그리고 있다.
[Great Teaching] 인조인간도 더 나은 삶을 꿈꿀까
한 남자가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들어온다. 이 남자는 오늘 거금의 수당을 받았다. 그러나 왠지 마음 한편이 허하다.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지만, 과연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지 마음이 복잡하다.
돈으로 보상되지 않는 뭔지 모를 미심쩍음, 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의미’있고, ‘가치’ 있는 일에 수당을 쓰고 싶다. 그래야 돈을 계속 벌 수 있을 것 같다. 결국 한 상점에 들른다. 점원은 자꾸 ‘한 단계 위’에 속하는 것을 추천하는데, 할부금에 조금 머뭇거려지기도 하지만 이내 결심한다. 아내조차 이것이 과연 자신들이 누릴 만큼의 사치인지 분별하지도 않은 채 뛸 듯이 기뻐한다. 이 남자가 산 것은 살아 있는 ‘염소’다.
필립 K. 딕의 1968년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의 한 장면이다. 1968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인공지능(AI) 로봇이 만연한 세계를 그린 SF의 고전으로 1982년에 제작된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이기도 하다.

이 소설에서 지구는 세계 전쟁 이후 방사능 낙진의 후유증을 앓고 있어서, 동식물뿐만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기에도 힘든 환경이 됐다. 그래서 “이 양은 진짜인가요”를 묻지 않는 게 상식이 됐을 만큼 ‘살아 있는’ 동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대부분의 동물들은 기계-동물인데, 문제는 가짜와 진짜, 기계와 생명의 구별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몇몇 인조인간들이 마치 진짜 인간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인조인간들은 겉으로 보기에도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아서 구분하기 어려웠고, 심지어 구분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주인을 살해하는 등 폭력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 등 인간 세계를 교란시키고 있었다.
염소를 산 남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 ‘데커드’로 직업은 인조인간을 사냥하는 경찰이다. 데커드는 인조인간을 구분할 수 있는 여러 방법들 가운데 ‘감정이입 검사법’을 신뢰하는 편이다. 안드로이드 몇몇 기종은 인간보다 더 우월한 지능이나 신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감정이입의 질문을 해보면 어느 정도 감별할 수 있었다. 지능이 높은 인조인간조차 범접할 수 없는 계산이 상대방의 감정을 읽고 헤아리는 감정이입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단 소속 가수로 신분을 감춘 채 살아가는 루바 루프트의 사례가 그러하다.

인조인간에게 인간성이란
데커드는 루바를 인조인간이라고 짐작했다. 그녀가 냉정할 정도로 차가운 느낌을 풍겼기 때문이다. 루바를 붙잡는 과정에서 데커드는 뭉크의 복제화 그림 한 장을 루바에게 건넸다. 이 그림은 루바가 오랫동안 지켜본 복제화인데 루바의 행동을 기억하고 있던 데커드가 그것을 기억해 두었다가 루바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러자 루바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는 매우 이상하면서도 감동적인 뭔가가 있어요. 안드로이드라면 결코 하지 못하는 거죠.”
이와 비슷한 장면이 <블레이드 러너>에서 유사하게 변주된다. 사냥꾼(블레이드 러너)이 인조인간에게 “어린 아들이 채집한 나비표본을 보여준다면”이라고 묻자 “병원에 데려가겠다”라고 답하고, “사막에 거북이가”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거북이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지구의 역사를 알 리 없는 인조인간에게 살아 있는 거북이를 실제로 접한 일이 없기 때문에 거북이도 나비표본도 모르는 것이다.
감정이 일회적인 사건(자극)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삶의 총체적 기억’과 관련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그럴 듯한 감정이입이 인간의 삶 속에서 전승되는 공동의 기억 속에서 나온다는 것을 역설한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로 ‘종으로서의 인간’을 규정했다면, 이 소설에서 데커드는 “나는 타인의 삶에 감정이입할 수 있다. 고로 존재한다” 정도로 변주시켜낸다.

데커드는 오페라 가수 루바를 붙잡고 나서 오히려 더 혼란스럽다. 그가 루바(인조인간)를 마땅히 ‘퇴역(처치, 살해)’시켜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루바는 진짜로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인간이 아닌, 인조인간에게 감정이입하게 된 것이다.
데커드는 그전까지 차가운 기계에 감정이입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루바, 그녀에게서 진짜 인간이 가지고 있을 법한 생명을 느꼈다. 그렇다면 루바를 퇴역시키는 게 마땅한 일이었는지, 조금 헷갈린다. 생명의 느낌이 감지되는 무엇을 죽이는 것(퇴역)은 온당한 일일까. 오로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인조인간을 처치하는 일은 마땅한 일일까.
데커드는 또 다른 안드로이드 인조인간을 퇴역시켜야 하는 과제 앞에서 왜 인조인간들이 인간처럼 살고 싶어 하는지, 그리고 왜 도망쳐서 지구에 숨어들게 됐는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인조인간 바티가 농장에서 뛰쳐나온 이유가 혹시 그도 여느 인간처럼 더 나은 삶을 꿈꾸기 때문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안드로이드도 꿈을 꾸는가’라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데커드는 새삼 이런 짐작을 해보게 됐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는 기계문명의 발달이 가속화돼 인조인간과 인간의 구분조차 흐려진 세계를 그린다. 그런데 필립 K. 딕이 50년 전 상상한 세계와 제4차 산업혁명이 논의되는 현재가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알파고가 촉발한 딥러닝이 가능한 AI 로봇은 이 소설 속에서 재현되고 있는 안드로이드 로봇과 거의 흡사하기 때문이다.
이 속에서 데커드가 물었던 것은 인간이란 모름지기 타인의 삶을 공감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타인’의 범주 안에 인조인간이 속할지도 모른다는 짐작이다. 이런 의심과 공감은 안드로이드 로봇이 만연한 세계를 상상하며 딕이 인류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일지도 모른다. 또 이 물음은 제4차 산업혁명이 선사하는 기술 판타지 속에서 붙잡아야 하는 물음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인조인간의 신체적, 지적 능력에 못 미칠지도 모르지만, 혹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능력을 겨누거나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인간다움’을 물어야 한다는 것, 그것만이 ‘데커드/데카르트’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이다.


일러스트 전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