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
LIFE & ● Book Talk
장석주 시인의 독서 예찬

나는 평생 ‘읽는 인간’으로 살아왔다. 내 독서 이력의 시작은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대 초반에는 시립도서관을 다니며 책을 읽었다. 그 시절 뭘 쓰고자 하는 욕망과 인식에 대한 욕망으로 불탔는데, 늘 한계와 지적 결핍으로 허덕거렸다. 책이 있는 곳이라면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았을 터다.

인생의 난제를 푸는 해답을 책에서 구했다. 책으로 인간을 더 알게 되고,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능력을 키웠다. 사는 데 유용한 지적 자본을 쌓은 것도 책을 통해서였다. 산다는 것은 곧 읽는 일이다. 오늘의 나란 존재는 바로 그런 읽기를 통해 빚어진 것이다.

10대에는 잘 알려진 소설들을 읽었다. 여러 종류의 한국문학전집을 독파하며 문학 언어의 아름다움을 배우고, 아울러 피침자로 살아온 우리 정서와 무의식, 기질과 병리적 현상에 대한 이해와 함께 타인과의 공감 능력을 키웠다. 악은 사유의 무능에 깃들어 활개를 친다.

한나 아렌트가 1961년 예루살렘 법정에서 나치 하수인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면서 깨달은 것도 그 점이다. 아이히만의 말은 한결같이 공허하고 피상적이며 진부했다. 반면 문학과 그것을 이루는 단어들은 공허하고 판에 박힌 말에서 벗어나 현실을 선취한다. 문학 언어는 새로운 현실의 함의 속에서 깊어진 말, 새로 발견된 현실이다.

“틈새, 구멍, 보이지 않는 사이로 무엇보다도 먼저, 가장 멋진 형태로 들어가는 것이 단어이기 때문이다. 삶에 관하여, 세상에 관하여 진정 궁금했던 것들도, 먼저 이 보이지 않는 틈새에서 나타나고, 무엇보다도 문학이 가장 먼저 발견한다.” 오르한 파묵이 <다른 책들>(이난아 옮김, 민음사)에서 한 말이다.

20대에는 시립도서관을 드나들며 문학에대한 꿈을 키우며 시와 철학에 빠져들었다. 시와 철학의 언어에 내 삶의 고달픔을 겹쳐냈던 것이다. 아무래도 독서의 고갱이는 현실에서의 도피다. 독서는 현실의 괴로움과 난제에서 벗어나는 한 방편이다. 나는 무위도식하는 처지와 현실의 답답함에서 벗어나려고 책 속으로 도피했다.

젊음은 늘 불안을 동반한 혼란 그 자체였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갈팡질팡하며 정규교육에서 이탈한 내게 어떤 미래가 있을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다. 나를 끌어줄 스승도 없었다. 나는 자유라는 형벌을 받고 음악감상실 따위를 떠돌며 만난 친구들과 잘 마시지도 못하는 막걸리에 대취해 낯 모르는 이의 집에서 깨어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씁쓸한 자괴감을 되씹어야만 했다. 젊음을 낭비하며 지낸다는 부끄러움 속에서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 단단해졌다. 넘치는 자유는 다른 한편으로 구속이다. 어쩌다가 국립도서관이나 시립도서관을 다니며 ‘고전’이라고 말하는 책들을 꾸역꾸역 읽을 수밖에 없었다.

고은 시집이나 김현 평론집, 김승옥과 최인호의 초기 단편 소설을 찾아 읽고, T. S. 엘리엇과 보들레르, 발레리의 번역 시집이나 카프카, 카뮈,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으며 몽상에 빠지고, 니체와 바슐라르의 책을 읽었다. 시인 르네 샤르는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뒤흔들지 않는 사람은 존경도, 관대한 대접을 받을 자격도 없다”고 했다지만 내 안에 무엇이 있어 세상을 흔들 수 있으랴!

나는 공단에 취업을 해서 잔업을 하거나 막노동판에서 노동을 한 경험이 없다. 육체노동을 감당하며 생계를 세우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백수로 시립도서관과 음악감상실 등지를 떠돌 때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왜 책에 그토록 탐닉했을까? 물론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책보다 더 좋은 친구가 없었다. 책을 읽을 때 내면의 잡다한 소음들이 잦아들며 깊은 고독에 빠져드는 것을 좋아했다. 책을 읽으며 고독한 평화 속으로 침잠했는데, 그 고독한 평화 속에서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어떤 책들은 재독(rereading)을 하고, 그 뒤로도 여러 번 읽었다. 처음 책을 읽을 때 “언어의 라비린스(labyrinth), 즉 미로를 헤매듯 독서”를 하고, 두 번째 읽을 때는 “방향성을 지닌 탐구”를 하는데, 그것은 “무언가를 찾아 나서서 그것을 손에 넣고자 하는 행위로 전환”하는 것이다.(오에 겐자부로, <읽는 인간>, 정수윤 옮김, 위즈덤하우스)

결국 책 읽기는 내 생업의 한 부분이 됐다. 책 읽고 글 써서 번 돈으로 쌀을 사고, 아이들을 키웠으며, 세금과 공과금을 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친구와 어울려 술 마시고 노는 것보다 혼자 구석에 처박혀 책 읽는 즐거움이 더 컸다. 모호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머물던 인지(認知)는 책을 읽을 때 또렷한 형태와 윤곽을 얻는다. 또한 책 읽기는 상상과 기억들을 확장하는 일면이 있다.

오르한 파묵은 “독서는 또한 자기 자신이 심오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독서는 앎의 기쁨을 주는 한편 독서 행위를 하는 자신이 ‘심오한 일’을 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측면이 있다. 그 착각으로 우리는 행복해진다.
어쨌든 나는 읽는 것을 좋아한 탓에 일종의 활자 중독 상태에 빠졌다. 책이 없다면 하다못해 전자제품 설명서 따위라도 따져 읽을 지경이었다. 많은 작가들이 책을 좋아했다. 오르한 파묵, 오에 겐자부로, 움베르토 에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같은 세계적인 작가들은 다 소문난 독서광들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마다 책이 있었다는 점이다.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의 도구들은, 인간이 만들어 온 도구들은 단순히 손을 연장한 것일 뿐이니까요. 칼이 그렇고, 쟁기가 그렇죠. 망원경이나 현미경은 눈을 연장한 것이고요. 그러나 책의 경우 그보다 훨씬 많은 게 담겨 있어요. 책은 상상력의 연장이고 기억의 연장이에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윌리스 반스톤, <보르헤스의 말들>, 서창렬 옮김, 마음산책)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말처럼 “새로운 형태의 기억저장장치”로 그 유용성을 획득했을 터다. 책은 인간 기억의 연장이다. 책은 기억을 연장함으로써 우리 수명을 연장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책은 생명 보험이며, 불사(不死)를 위한 약간의 선금이다.”(움베르토 에코, <책으로 천년을 사는 방법>, 김운찬 옮김, 열린책들)

나는 책을 읽으며 즐거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기억을 연장하고 책을 읽지 않는 사람보다 여러 겹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또한 책을 읽으며 거기서 밥을 구하고 명예를 얻었다.

고려원 편집장을 거친 뒤 비교적 이른 나이인 20대 후반에 출판사를 등록하고 독립했다. 후배 한 명을 데리고 시작한 출판사는 뜻밖에도 번창했다. 1980년대 정치 격동기에 운이 좋아 베스트셀러를 몇 종 내면서 돈도 벌었다.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대지 661.1㎡를 사들여 사옥을 지었다. 우연히 부(富)를 일궜으나 그것을 오래 유지하지는 못했다. 1992년 10월 29일, 마광수 교수의 장편 소설 <즐거운 사라>를 펴내고, 마 교수와 나는 서울지검에 끌려가 검찰신문을 받은 뒤 구속됐다. 우리에게 씌워진 죄목은 ‘음란문서 제조와 반포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지루한 법정 싸움 끝에 그해 12월 30일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지 61일 만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고 나왔다. 이듬해 출판사 창업 13년 만에 600여 종의 책을 내고 출판사 문을 닫았다. 출판사 문을 닫은 뒤 나는 전업 작가의 길로 방향을 바꿨다.

전세(傳貰)로 이곳저곳 떠돌다가 식솔을 끌고 경기도 안성 금광저수지 주변 고추밭 6611.5㎡를 밀고 마사토를 쌓아 지대를 높여 그 자리에 전원주택을 짓고 들어앉았다. 2000년 여름, 금광농협에서 땅을 담보로 잡혀 돈을 빌리고, 홍원표라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조립식 경철골 구조의 집 두 채를 지은 것이다.

한 채는 살림집으로, 다른 한 채는 서재로 썼다. 거기에서 노자의 <도덕경>, <장자>, <주역> 따위의 책을 읽었다. 그 사이 사들인 책으로 책이 3배에서 4배쯤 늘었다. 처음 시골로 갔을 때 생계 대책이 없었을뿐더러 새 책 사볼 형편도 안 됐는데, 한 기업체 대표가 조건 없이 달마다 책값 50만 원씩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몇 년 동안 그 도움으로 책을 사 읽었다. 세상에는 이런 믿기 힘든 미담이 있다. 나는 24년째 남에게 밥을 빌지 않고 전업 작가로서 밥벌이를 하며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다.

전업 작가로 나서며 부지런히 책을 썼다. 어느덧 쓰고 펴낸 책 목록이 100권이지만, 뭐, 요즘같이 책이 흔하고 책을 기피하는 세태에 그것이 가문을 빛낼 영예도 아니겠다. 하지만 원고와 책을 써서 생계를 꾸려온 뿌듯함을 깡그리 부정할 수는 없다. 책을 쓰려면 열정과 건강이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원고를 책으로 내줄 출판사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내 뇌는 ‘책 읽는 뇌’에서 ‘책 쓰는 뇌’로 바뀌었다. 내 뇌는 ‘책 쓰는 뇌’, 즉 책을 미친 듯이 집어삼키고 다시 그것을 토해내는 미친 뇌다. 새벽 4시 전후로 일어나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 날마다 8시간 이상을 읽고 쓰는데, 그 시간의 충일감은 그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나는 읽는다. 고로 나는 행복하다.’ 나는 책을 사들여 부지런히 읽는다. ‘읽는 인간’이라는 운명을 후회하지 않고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는 증거다.
‘읽는 인간’으로 산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