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현재 송정역 인근은 전혀 다른 곳 같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룬 좋은 예로 꼽히며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누리는 시장으로 위상이 달라졌다. 40~50년 된 노포들과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시장에 뛰어든 청년 상인들이 한데 어우러지며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잇따르는 장터의 제 기능을 완전히 회복했을뿐더러 지역의 자랑이 됐다.
눈에 띄는 변화는 수치로 확인된다. 지난해 4월 시장 재개장 이후 한 달도 되지 않아 일평균 방문객 수는 하루 200명에서 평일 기준 2000명, 주말 기준 4000명으로 많게는 20배가량이 폭발했다. 어찌된 일일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전통시장 부활의 키워드는 바로 디자인, 그중에서도 타이포그래피다.
전통시장 변화 이끈
타이포그래피의 힘
시간의 나이를 바라보는 두 관점은 전혀 다른 결과로 이어졌다. 100여 년 시간을 품고 있는 풍경은 쇠락하고 늙어 가는 것일까.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익어 가고 있는 것일까. 오래된 시장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 그리고 이와 같은 정체성을 가장 정확하고 간결하게 표현하는 도구가 바로 타이포그래피, 즉 활자였다.
‘관점의 변화’를 일으킨 타이포그래피란 무엇이며 그 힘은 또 어떻게 발휘되나. 타이포그래피란 글자를 다루는 기술과 미학이다. 활자, 서체, 폰트 등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쇄 매체에서 많이 쓰이다가 오늘날 쓰임새가 다양해져 글자에 대한 모든 것으로 통용되곤 한다. 활용 사례를 좀 더 살펴보자.
송정역 시장의 경우, 타이포그래피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는 간판을 통해 대성공을 이끌었다. 송정역 시장의 타이포그래피는 전통시장이 주는 흔한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느낌을 자아낸다. 이곳 간판의 역할은 오브제이면서 조명이며, 콤팩트한 메시지다. 시장 초입임을 알리는 ‘1913송정역시장’ 글자는 하나의 상징이 됐다. 밤이 되면 시장을 밝히는 조명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로 인해 전에 없던 야시장의 기능이 활성화될 수 있었다.
시장 안쪽으로 진입하면 특색 있는 가게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개별 상점들의 달라진 풍경에서도 역시 간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가게마다 비슷한 듯 모두 다른 간판을 갖고 있는데, 로고나 서체에서 상점의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독특하다. 거리 곳곳에는 ‘히스토리 월’ 등에 스토리가 담겨져 있고, 바닥에는 동판에 숫자가 새겨져 있다. 이 모든 것들에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전문가 집단이 시장의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 고민 끝에 만든 결과물이다.
송정역 시장의 변화는 전통시장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광주 창조경제혁신센터와 현대카드가 함께 만든 결과물이다. 현대카드의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프로젝트를 이끌었고, 시장을 하나의 상품으로 보고, 지속 가능한 무기를 만들고자 머리를 맞댄 끝에 나온 콘셉트가 바로 역사를 간직한 시장이었다.
오래된 시간이라는 무형의 키워드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데 ‘숫자+글자’는 유용한 도구였다. 이때 글자는 ‘의미’를 담고 있는 ‘형태’로서, 지시적 디자인 요소가 된다. 프로젝트를 이끈 김영관 현대카드 창업지원센터장은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를 전달하고 싶은데 수단이 마땅하지 않을 때 타이포그래피는 효과적인 수단이다”라고 말했다. ‘1913송정역 시장’ 타이틀은 시장이 태동한 1913년을 강조하는 의미로 기존의 송정 매일 시장에서 보다 직관적인 이름으로 바꾼 것이다. 남들이 주목해 보지 않는 글자를 통해 변신을 꾀했다는 점은 새로운 경쟁력이 어디에서 생겨나는지를 들여다보는 케이스 스터디로도 유용하다. 키워드는 틈새, 그리도 디테일이다. 김 센터장은 “어디에서든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이어서 사람들이 글자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지만, 요즘 시대의 경쟁력은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틈새에서 생긴다”며 “어떻게 디자인하느냐에 따라서 극과 극의 결과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타이포그래피는 곧 디테일의 싸움이다. 작은 차이를 통해 차별성을 확보하는 섬세한 작업이기에, 타이포그래피를 연구하다 보면 예민하게 구별하고 미세한 차이를 통해 다른 퀄리티를 만들어내는 안목이 길러진다는 설명. 이곳 타이포그래피의 핵심은 획일화된 간판이 아닌, 상점마다 히스토리에 따라 각각의 개성을 살려 디자인한 것이다.
또한 ‘빼기 전략’이 유효했다는 분석이다. <타이포그래피 미학>의 저자 김동빈 동덕여대 시각디자인전공 교수는 “오늘날의 도시 디자인에서는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게 더 중요하다”며 “간판을 정리함으로써 낡은 풍경의 시각적 공해를 걷어내고, 나아가 도시의 이미지를 바꾸며 도시 브랜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고 말했다.
장황한 텍스트보다
간결한 이미지로
시장뿐만 아니라 도시의 풍경을 자아내는 데도 타이포그래피는 힘을 발휘한다. 도시 디자인의 핵심은 건축, 그리고 타이포그래피라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세계적인 도시에 가면, 거리의 글씨들을 볼 수 있다. 김 교수는 “유럽의 풍경 가운데 벽돌에 글씨를 새겨 놓은 것을 보면 한 자 한 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며 “우리처럼 그저 간판을 갖다 놓는 것과는 인식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비단 도시 디자인뿐일까. 수많은 브랜드 경쟁력을 만들어내는 데서도 타이포그래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폰트의 비밀, 브랜드의 로고는 왜 고급스러워 보일까>라는 책이 있다. 잘나가는 브랜드의 로고는 뭐가 다른지, 그 차이를 글자의 품격을 통해 들여다본 책이다. 럭셔리 브랜드들에서 사용하는 로고와 서체에는 그만큼 깊은 고민과 철학이 묻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타이포그래피가 주목받는 배경 중 하나는 기업들의 전용 서체가 마케팅 코드로 부상하면서다. 개성 있는 자기만의 서체를 갖고 싶어 하는 기업들이 타이포그래피를 활용하고 있다. 일찍이 애플 창업자 고(故) 스티브 잡스는 타이포그래피의 힘을 알아봤다. 그가 대학 시절 타이포그래피에 천착한 끝에 디자인 경영이 시작됐다는 일화는 이미 유명하다. 어떻게 소비자에게 각인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이 디자인에서 나온다고 생각한 것이다.
현대카드, 아모레퍼시픽, 네이버 등이 이 열풍에 앞장섰다. 노민지 안그라픽스 연구원은 “2004년 현대카드 전용 글꼴이 발표되고,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타이포그래피 아이덴티티’라는 개념이 대중에게 인식됐다”며 “비슷한 시기 아모레퍼시픽에서도 ‘아리따’가 만들어졌고, 13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꾸준히 글꼴 프로젝트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했다.
타이포그래피의 다양한 활용은 오늘날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데 장황한 텍스트보다 간결한 이미지가 더 효과적이라는 시대적 흐름을 보여준다. 최문경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 교수는 “한때는 글자가 아니면 타이포그래피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요즘은 글자의 끊임없는 변신이 이뤄지고 있다”며 “지시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않은, 화려한 이미지의 타이포그래피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꼭 명필이어야 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B급 정서’를 드러내는 데 있어 잘 쓴 글씨보다 못 쓴 글씨가 더 선호되고 있다고 한다. 스타트업 ‘배달의 민족’이 만든 서체들이 대표적이다. 배달의 민족은 서체를 무료로 배포하고 있는데, 글씨가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써 활용되고 있다.
전문가의 영역에 머물렀던 타이포그래피는 이제 그 쓰임새와 활용 분야가 전천후로 번졌다. 대중적인 인기를 확인할 수 있는 장은 타이포그래피 전시회다. 그중 ‘타이포잔치’는 타이포그래피를 매개로 하는 세계 비엔날레다. 문화역서울284에서 2년마다 전시를 연다. 지난 2015년 전시에서 무려 4만17명의 인파가 몰려 성황을 이뤘다. 이름도 생소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에 일반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올해 7회째를 맞는 타이포 잔치의 주제는 몸이다. 몸으로 표현되는 타이포그래피의 가능성이 곳곳에 전시된다. 서울시와 연계해 지하철과 버스 정류장에 타이포그래피의 다양한 면모들을 9월 중 볼 수 있을 것이다.
타이포그래피의 시작은 매우 기능적인 목적, 즉 ‘가독성’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이후 예술적인 실험이 지속되면서 표현적인 타이포그래피들이 쏟아져 나왔다. 소통의 창구로, 재미있는 놀이로, 틈새 경쟁력을 만드는 무기로. 지금도 글자의 변신은 지속되고 있다. 김동빈 교수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을 ‘진리’라고 하듯이 타이포그래피에서 어떤 시대에도 변하지 않을 ‘진리’는 ‘글자를 통한 정보와 지식, 사상의 전달’이라는 고유의 책무”라며 “이는 타이포그래피가 지니고 있는 미학의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타이포그래피 활용 사례
자료 및 도움말 안그라픽스·김동빈 교수
타이포그래피의 활용은 기업의 경우 무엇보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의 기본 요소로서 기능한다. 또 소비자들에게 오픈 소스로 제공함으로써 기업의 사회적 공헌을 강조하기도 한다. 도시에서는 브랜드 가치를 높이고 도시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커뮤니케이션에 정확성과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1. 아모레퍼시픽 ‘아리따’
‘아리따’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다. ‘아리따’라는 이름은 중국 <시경>의 첫 시인 ‘관저’ 중 한 구절 ‘아리따운 아가씨-요조숙녀’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랑스럽고 아리따운 여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2004년 ‘아리따 돋움’을 시작으로, 2012년 영문 글꼴인 ‘아리따 산스’, 2014년 ‘아리따 부리’, 2017년 중국어 글꼴 ‘아리따 흑체’를 발표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오랜 기간에 걸쳐 타이포그래피 아이덴티티를 구축해 왔고, 글꼴을 전략적 마케팅으로 활용하고 있다. 2. 조계종 ‘석보체’
‘석보체’는 지난 2013년 <석보상절>(1449년)에 쓰인 글꼴을 모티브 삼아 디자인한 조계종의 전용 글꼴이다. <석보상절>은 한글 창제 이후 첫 번째로 활용한 서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유교 사회였던 조선은 한글 창제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컸는데, 그들의 관심이 적은 불경을 먼저 언해하면서 한글을 활용할 기회를 얻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스토리를 엮어 조계종의 전용 글꼴을 <석보상절>에 쓰인 ‘석보상절 놋쇠활자체’를 기반으로 현대적인 미감에 맞추어 디자인했다.
3. 신세계백화점 ‘신세계체’
‘신세계체’는 신세계백화점의 전용 글꼴로, 2016년 발표됐다. 신세계백화점이 갖는 헤리티지를 잇고, 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이상향을 디자인 콘셉트로 잡고 진행했다. 또한 드보르작의 ‘신세계교향곡’을 모티브 삼았는데, 이는 새로운 세계를 향한 우아하고 도회적인 감수성을 의미한다. 처음으로 ‘반부리’라는 용어를 만들어 글꼴에 적용하거나, 제목용과 본문용을 하나의 가족으로 묶어서 디자인한 것이 특징이다.
4. 현대카드 ‘유앤아이체’
타이포그래피 마케팅 개념을 처음 도입한 곳이다. 한글과 영문을 하나의 패밀리 폰트 개념을 적용해 형태적인 괴리감 없이 시각적인 통일성과 완성도를 높였다. 한글과 영문을 일체감 있게 디자인했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형태적인 측면에서 아방가르드한 실험적인 경향을 더해 시각적 차별성을 확보하고 있다. 동시에 형태적, 구조적 완성도를 높였다는 평가도 얻는다. 5. 서울시 ‘한강체’·‘남산체’
서울을 대표하는 남산과 한강의 이미지를 서체 디자인에 반영하고 있다. 남산체는 견고하고 강직한 이미지로 디자인돼 있지만 기존의 고딕체보다는 좀 더 부드러운 형태를 띠고 있다. 한강체의 경우 남산체에 비해 좀 더 장식적이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기존의 명조체보다는 좀 더 강직해 보인다. 서울시는 남산체, 한강체 모두를 서울시의 모든 행정 서류나 거리 안내 사인 등 정보 그래픽에 적극 사용함으로써 서울의 도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는 한편 다른 도시와의 차별성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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