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우재룡 한국은퇴연구소장]
은퇴 후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흥미와 의미가 동시에 있는 활동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짧게는 20년, 길게는 30년 이상 영위하는 노후 생활을 지루하고 무의미하게 보낼 수는 없다.
외국의 은퇴자들을 살펴보면 다양한 여가 활동과 사회봉사를 하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우리나라 중년들과 크게 다르다. 선진국 주요국의 중년들은 은퇴 후에 약 40%가량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으며, 취미여가를 기반으로 하는 즐거운 자원봉사를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중년들은 7%만이 자원봉사에 참여하고 있고, 여가 활동을 자원봉사로 연결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노후에는 삶의 의미를 추구할 다양한 활동이 필요하다. 그래서 인문학이나 과학을 배우고, 사진과 악기를 다루고, 청소년이나 노인들을 위한 자원봉사를 하고 싶어 한다. 만약 이 모든 활동을 합쳐서 한꺼번에 한다면 어떻게 될까. 한 개씩 하기보다는 사진 찍는 기술과 영상 처리를 배운 다음 이것으로 봉사를 한다면 얼마나 재미있고 보람 있겠는가. 재미있는 여가인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와 봉사 활동인 볼런티어(volunteer)를 합친 즐거운 자원봉사인 볼런테인먼트(voluntainment)가 되는 것이다.
나종민(55) 씨는 외국계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수년 전에 퇴직을 했다. 노후 자금이 많지는 않지만 적당한 수준이 된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제부터는 즐겁게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평소에 사진을 즐겨 찍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애인단체의 행사에 사진을 찍어주는 자원봉사를 하다가 어느 아주머니가 가족사진을 부탁한 데서 영감을 얻었다. 사실 장애인 가족들은 가난하기도 하지만 몸이 불편해 이동이 어려워서 제대로 된 가족사진이 없는 경우가 많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여가인 사진으로 장애인들에게 봉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희망제작소의 모금 과정까지 이수하면서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고 주위 지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수년간 노력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 최초의 장애인 전용 사진관인 바라봄사진관을 세웠다. 소외된 계층인 장애인, 소년소녀가장, 어르신들 등 어디든지 사진이 필요한 곳이 있으면 달려가고 있다[꼭 바라봄사진관 블로그(http://blog.naver.com/tour9600)에 들어가 활동을 살펴보시길. 매월 기부를 해도 좋고, 사진관에 찾아가서 가족사진을 찍어도 좋다. 만약 가족사진을 찍는다면 그 수익금으로 장애인 가족에게 사진을 찍어줄 수 있다.
단순하게 혼자서 또는 동호회를 구성해서 즐기는 여가가 아니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여가라면 보람이 백배가 될 것이다. 요즘 중년들은 걷기를 좋아한다. 은퇴 후 꼭 하고 싶은 일로 백두대간 종주, 100대 명산 오르기, 지리산 둘레길, 제주도 올레길 등을 걷고 싶어 한다. 심지어 프랑스에서 스페인까지 이어지는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열풍이 불고 있다. 하지만 걷기만 하면 보람이 적다. 이를 사회봉사로 연결하는 볼런테인먼트로 발전시킨 사람이 있다. 바로 프랑스의 베르나르 올리비에라는 사람이다. 그는 기자 출신인데 은퇴 후 실크로드를 4년간 걸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중국 시안까지 텐트를 지고서 죽을 고비마저 여러 번 겪으면서 걸었다. 그는 이 경험을 살려서 문제아가 된 청소년들을 데리고 걷는 ‘문턱’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원봉사 단체(http://assoseuil.org)를 만들었다. 자원봉사자들이 범죄를 저지를 정도로 방황하는 청소년들을 데리고 3개월간 1800km를 걷는 프로그램이다. 참여했던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멋지게 사회로 복귀한다고 한다. 단순한 걷기가 사회봉사로 연결되면 얼마나 보람이 있겠는가.
한국의 중년들은 가족들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다. 뚜렷한 취미여가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은퇴 후에는 노후 자금보다 더 취약한 분야가 취미여가와 사회봉사다. 문화관광부의 <여가백서>에 따르면 우리 국민들은 지난 한 해 동안 여가 활동으로 TV 시청, 산책, 낮잠, 찜질방, 음악 감상과 같은 휴식(59%)을 가장 많이 하고 있다. 그다음으로는 쇼핑, 외식, 인터넷 검색, 등산, 음주, 게임, 독서, 낚시와 같은 취미오락(21%)을 선호하고 있다. 그 밖에 스포츠나 문화예술과 관련된 여가 활동은 낮은 비중을 보이고 있다.
이런 우리 국민들의 여가 활동을 은퇴 설계 시각에서 평가해보면 여러 문제점들을 발견할 수 있다. 휴식 위주의 여가 활동으로는 은퇴 후 삶을 충족시키기에 부족하다. 로버트 스테빈스 교수에 의하면 여가란 일상적 여가(casual leisure)와 진지한 여가(serious leisure)로 구분된다. 일상적 여가란 여가를 즐기기 위해 특별한 훈련이 필요하지 않으며, 즉각적이고 내적인 보상을 제공하지만, 상대적으로 단시간의 즐거움만을 제공하는 활동을 말한다. 여기에는 잡담, TV 시청, 산책, 낮잠, 독서, 운동, 등산과 같이 즐기기 위해 많은 노력이 들지 않는 활동들이 포함된다.
이에 반해 진지한 여가는 다음과 같은 요소를 가진 여가 활동을 말한다. 상당한 노력과 난관을 극복하는 노력이 필요하고, 장시간 지속되는 만족감을 얻을 수 있으며, 사회봉사, 타인과의 교류, 사업으로 연결될 정도로 확장되는 활동을 말한다. 즉 진지한 여가는 지식, 기술, 경험을 획득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경력을 갖게 되는 여가 활동을 말한다. 주로 아마추어, 애호가,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 상당히 실질적이고 흥미롭고 성취적인 행동들이 포함된다.
은퇴 후 적절한 수준으로 일상적 여가를 즐기면서, 하나 이상의 진지한 여가를 깊이 있고 만족스럽게 추구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진지한 여가일수록 삶의 질이 높아지고 삶의 의미를 발견하며 행복해 한다. 필자가 활동하는 단체에서는 진지한 여가로 디지털전문가, 집수리전문가, 원예전문가, 생태농업전문가, 해외 자원봉사여행 등을 지향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은퇴 후 텃밭 가꾸기를 좀 더 확대해 원예를 결합하고 이를 힐링캠프로 활용한다면 좋은 교육과 여가 기회로 활용할 수 있다. 고령자들이 불편하게 살아가는 낡은 집을 저렴하게 수리해주는 집수리라는 활동도 여가와 봉사를 결합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다. 해외여행과 현지에서의 자원봉사를 결합한 볼런투어도 좋은 대안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본격적인 고령사회를 맞이해서 좀 더 진지한 취미여가 위주로 은퇴 생활의 질을 높여야 할 필요가 있다. 지금부터라도 은퇴 후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여가계획(leisure planning)을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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