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웰에이징연구센터장·석좌교수]
선종(禪宗)의 백장 회해(百丈 懷海) 선사의 유명한 일화는 그가 노령이 됐어도 끊임없이 계속 농사일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스승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한 제자들이 일을 하지 못하게 농기구를 숨겨 버리자, 공양 시간이 돼도 선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일하지 않으면 먹어서는 안 된다(不勞不食)”는 말씀을 하고 금식했다는 일화는 이후 큰 가르침으로 남았다.
노동 제일주의적인 삶의 자세는 실제로 백세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됐고 이들에게서 삶과 노동의 엄정한 관계를 엿볼 수 있었다. 백세인이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살고 있는 모습은 적어도 움직일 수 있는 백세인에게는 거의 예외 없이 당연하고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만 한다는 강박적인 모습에서 오히려 안타까움을 느낄 정도였다.
매일매일 하다못해 마당에 나가 텃밭이라도 가꾸어야만 하는 삶이었다. 시각이 좋지 못한 어느 백세인의 경우는 평상시 텃밭 일을 하다가 잡초 대신 작물을 뽑아 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쉼이 없었고, 심지어 비가 오는 날에는 방 안에서 텃밭 일을 하는 흉내라도 내어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가족들의 말을 들으며, 사람으로서 노동의 숭고한 의무를 수행하는 구도자의 모습을 백세인의 삶에서 새겨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 곡성군은 효녀 심청의 전설이 시작된 곳이라 군의 축제도 ‘심청제’라고 특별하게 기린다. 이곳의 백세인 박판례 할머니가 마을에서 떨어진 산비탈에 살고 있다고 해 찾아가는데 마침 밭두렁에서 일하고 있는 박 할머니가 있어 “박판례 님을 찾아가는데 아시느냐”고 묻자 바로 “나네” 하며 당신임을 밝혔다. 여름 낮 뙤약볕에서 일하기에 힘들지 않으시냐고 묻자 “무슨 소리야. 먹고 살려면 일해야 해” 하며 묻는 우리를 오히려 꾸짖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일을 열심히 안 해”라고 말씀하시는 박 할머니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자 박 할머니는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다가 귀국해보니 우리나라 노인들이 일본 노인들에 비해 나이 들었다고 자식들에게 맡겨 버리고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지적을 했다.
백세인 조사를 하면서 노인들이 일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했던 필자에게는 의외의 지적이었지만, 일본에서 살면서 그곳 노인들의 생활에 익숙한 박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우리나라 노인들의 일에 대한 열성과 집념이 일본 노인들에 비해 한참 부족해 보였던 것이다.
강원 횡성군에서 만난 백세인 추영엽 할아버지는 또 다른 감동을 주었다. 어르신 댁은 큰 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부농이었고 가옥도 시골풍이 아닌 여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댁을 방문해보니 문간 옆 창고에 바구니가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서 그 바구니들의 용도를 물었다. 그러자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그 바구니들은 모두 추 할아버지가 직접 만든 것이었다. 집안 농장은 감자 및 채소를 대량 생산해 판매하기 때문에 이들을 담거나 운반하는 박스가 많이 소요되는데 그때 사용하고 남은 끈들을 버리지 않고 모두 모아서 추 할아버지가 바구니를 짜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그 바구니는 어디에 사용하느냐고 묻자 “아버님이 소일거리로 만드시는 것이라 모두 주변에 선물로 나누어준다”고 했다. 백세인의 눈에는 버려지는 끈들이 아까워서였겠지만 당신의 노력으로 하나씩 하나씩 바구니를 만들어 활용하려는 의지는 필자에게 감동을 주었다. 조사 후 돌아가는 우리 팀원들에게도 모두 바구니 하나씩 선물로 주셨다. 백세라는 나이에 개의치 않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필요하거나 말거나 상관치 않고 끊임없이 몸을 움직이는 모습에서 노동과 삶의 엄정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경북 예천군은 전통적 삶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고, 장수도도 높아서 한국인 백세인 조사를 하면서 제일 먼저 찾았던 곳이었다. 예천군을 3년 만에 다시 찾은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준 사회복지사의 안내를 받았다. 예천이 바로 <정감록>에 나오는 십승지지 중 하나라고 자랑하며 예스러운 금당실 마을을 지나 상금곡리로 들어섰다. 허름한 집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에 가득 심어진 콩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당 한구석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백세인 권점녀 할머니가 보였다. 여든이 다 된 하나밖에 없는 따님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어 어쩌다 내려오지만 근자에는 몸이 불편해져 그나마도 오지 못한다고 했다. 텃밭에는 콩뿐 아니라 토란이며, 고추며 각종 작물이 자라고 있었다. 할머니가 소일 삼아 열심히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복지사가 의외의 말을 던졌다. “독거노인들에게 집 안에서 작물을 키우지 않도록 권장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나이 드신 분들이 운동 삼아 하는 일을 왜 못하게 하느냐고 반문하자 뜻밖의 답을 했다. “노인들이 집에만 있고 밖에 나가지 않으니까 나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는 집 안 작물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노인들의 복지를 위해 고심하는 현장 봉사책임자의 의견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권 할머니에게 오랫동안 혼자 지내시느라고 고생이 많았겠다고 여쭙고 무슨 생각들을 하느냐 물었다. “옛 생각을 하면 뭘 해! 생각하기 싫어서 낮잠도 안 자.” 혼자 오래 살다 보면 옛 생각도 나고 가족 친구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날 테지만 할머니는 과감하게 모든 과거를 떨쳐 버리고, 지금 자신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매일 열심히 일을 한다는 것이었다. 돌이켜봐야 어쩔 수도 없는 옛일들, 떠나 버린 사람들 생각한들 무엇하랴. 할머니는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오직 현재의 자신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계셨다.
이와 같이 백세인은 나이에 개의치 않고 언제나 열심히 지금의 일에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로 장수인은 오늘 최선을 다하라는 ‘카르페 디엠(Carpe Diem)’을 백 살이 돼도 실천하고 있었다. 이분들의 삶에서 “일을 하지 않은 날에는 먹지를 마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 선사의 가르침이 그대로 투영됐음을 느꼈고 이것이 바로 장수의 비밀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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