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 사진 엘베 어라운드(Rvé Around) 제공]
“제주에 살아보기로 했다.” 이 단출한 문장 속에 얼마나 으리으리한 현실이 숨어 있는지 일전엔 알지 못했다. 제주 롱스테이를 위한 리얼 버라이어티 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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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에서 살아보기로 했다, 허투루
여러 형태로 제주에 반했다. 일주일 간격으로, 계절별로 조각내며 여행을 했다. 동서남북이 첨예하게 달랐다. 바닷가와 중산간, 제주시와 서귀포시가 주는 지리적 구분의 체감 역시 달랐다. 자연과 더불어 있기에 늘 보던 풍경도 달랐다. 다름의 미학. 흉내 내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그 ‘다를 수 있음’에 몹시 흔들렸다.
자극이란 표현이 옳았을까. 제주에선 제법 익숙해진 길도 새 길처럼 걸었다. 공중 부양을 하는 지하철 속 출퇴근길, 친구와의 의식적인 수다와 커피, 영혼 없는 인터넷 쇼핑 등 늘 같던 도시 생활에서 둔감해진 감각에 날이 서곤 했다. 쉬이 웃고, 쉬이 감탄했다. 우와, 아름답다, 예쁘다, 좋다 등 잊었던 단어도 주책없이 터져 나왔다. 어쩌면 제주 여행을 쳇바퀴 생활의 인공호흡으로 삼았는지도 모르겠다. 늘 해외여행으로 일상의 갈증을 목축임 했던 20여 년. 뼛속까지 도시 여자인 난, 내가 손님이 아닌 주인으로서 여행지가 아닌 거처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지금 난 무엇에 그리 절절매고 사는 걸까.
길가에 핀 잡초에 웃는 삶이란 내게 허락되지 않는 걸까.
100세 시대에 잠시 스톱 버튼을 누른다고 인생이 꼬이는 걸까.
도망치듯 떠난 제주로부터 김포공항을 밟자마자 두통이란 손님이 어김없이 찾아왔을 때 결심했다. 그래, 한번 살아보자. 눈 질끈 감고 제주에서. 좋아하는 곳에서 좋아하는 풍경을 보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아니면 이대로 눌러앉을지 유통기한은 없었다. 다만, 행복할 수 있는 권리. 그것만큼은 포기하지 않겠다. D-40
제주의 동서남북, 나를 뉠 곳은 어디? “그나저나 어디에서 살지?”
1847k㎡ 면적의 본 섬과 8개의 흩어진 유인도. 제주가 605.21k㎡인 서울에 비해 3배가 넘는 면적임을 알고 뒷걸음질을 쳤다. 제주란 땅덩어리와 상대하자니 지레 겁부터 먹었다. 장기 체류가 데려온 현실적인 압박도 있었다. 빛의 속도로 계산기부터 두들기게 됐다. 숙박은 롱스테이의 근원이요, 숙박비는 체류 비용의 8할인 법. 통장 잔고를 울리지 않는 한 숙박만큼은 고집을 부렸다.
3가지 숙박 조건이 있었다. 첫째, 죽고 못 사는 바다에서 가까울 것. 둘째, 마당이 있는 제주 스타일의 집일 것. 셋째, 적당한 편의시설은 있을 것. 결론 내자면, 외지지 않은 바닷가 근처의 농가주택이었다. 아, 이 얼마나 야욕에 가까운 희망사항이었던가. 절망했다. 한 달여 제법 넉넉한 시간을 두었다고 여긴 (수지타산에 맞는) 숙박 찾기란 판타지 소설에 가까웠다.
우린 온·오프라인의 쌍방향 작전을 펼쳤다. 온라인상 롱스테이할 만한 집을 리스트업하고, 일주일간 이름하여 ‘나의 집은 어디인가’ 여행 프로젝트를 감행했다. 짐을 풀 베이스캠프는 한 곳으로 찜했다. 최저가로 지붕만 있다면 어디여도 좋았다. 오히려 이런 즉흥적인 결정으로부터 그 근방 어딘가에서 집이 얻어걸리길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동쪽에 있는 베이스캠프로부터 제주 일주는 시작됐다. 길이 끊기지 않는 한 해안도로를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았다. 변화무쌍한 바다 결 위로 판포리, 신창리, 금성리 등 동네 이름은 쌓여 갔다. 우리 동네다 싶으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두세 번 찾고, 그 언저리의 롱스테이를 할 만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러나 맘에 드는 동네가 있으면 공간이 마땅치 않거나 예약이 꽉 차 있고, 온라인상 찾은 숙소는 우리가 원하는 동네에 있지 않았다.
오기가 났다. 이거 행복해지자고 시작한 게 맞긴 맞아? 불시에 오춘기를 맞이한 우린 근원적인 질문마저 되뇌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포기해’라고 내뱉으려는 그 순간, 띠리링. 한 카페로부터 미리 숙박 키워드로 등록한 알람이 떴다. 요약하자면 ‘농가주택, 해안도로, 바닷가까지 도보로 2~3분’. 차의 시동은 순식간에 걸리고, 쿵쿵 뛰는 가슴이 진정되기도 전에 도착한 그곳이 답했다. ‘우리 집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이때까진 롱스테이를 위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D-25
버킷리스트로 마음의 소리를 듣다
숙소를 정했으니 한시름 놓나 싶었다. 뭐든 잘될 것 같은 예감이었다. 아니, 다른 고개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쁜 생각의 공격이었다. ‘어떻게 마련한 시간과 비용인데, 허투루 보낼 수 없지. 빚을 탕감하듯 쫀쫀하게 여행하는 거야.’ 또 일을 만들 심산인가? 가히 패키지여행도 울고 갈 법했다.
애초 우리의 롱스테이 목적은 격렬히 게을러지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한량이 롤모델이었다. 미션은 오직 하나, 스케줄을 통째로 지워 버려라! 의무감의 약속도 없고, 맘 가는 대로 제주가 원하는 대로 즉흥적인 행동이 우리의 일상이었다. 배고프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본능에 충실하게. 상상했다. 바람(wish)과 행동(do)의 혼연일체였다.
허튼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공책 하나를 마련했다. 이 공책은 제주살이의 책이 되는 꿈을 꿀 것이다. 돈이 들지 않으면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제주 경험의 결정체였다. 어깨 너머로 본 제주의 볼거리, 맛 집 정보는 적어두되 꼭 해야 할 리스트엔 끼워 두진 않았다. 대신 고약한 심보를 부렸다. 일명 ‘청개구리 되기’다. 평소 낮이라면, 도시에서라면, 언감생심일 일을 써 내려갔다. 가령 근처 오름에서 아침 해 맞이하기, 낮술 마시고 평상에 누워 낮잠 자기, 주중 도시락을 싸서 바닷가에서 피크닉 즐기기, 마루에서 빗방울을 보며 차 한 잔 하기, 오후 6시부터 바닷가에서 노을 기다리기, 집에서 삼시세끼 해 먹기 등 소소한 이상향의 주인공이 되고 싶었다.
머리맡에 둔 공책이 제법 손때가 탔다. 잠자다가도, 갓 일어나서도 눈으로 채워간 기록들. 무엇보다 좋은 건 그런 날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다. D+30
한 달도 좋다, 1년은 더 좋다
제주의 여름. 에어컨 한 대 없는 농가주택에서 한 달을 보냈다. 제주에서도 한바탕 에어컨 대란이 났던 무더운 올해였다. 어찌 보면 숙소 선택의 결정적인 실수로 여길 법하지만, 영 무심하지 않은 밤바람에 감사할 줄 알게 됐다. 그제는 용천수 아래 얼음 샤워를 하고, 오름에서 가슴 터질 듯한 황홀경을 맛보았다. 어제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다가 곤히 낮잠이 들었다. ‘내일은 뭐 할까?’란 의문엔 기대와 호기심이 차 있었다. 오늘은 한라산 소주도 시원하게 냉장고에 들여놓았으니, 제주도산 돼지고기를 사야 할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먹기 전 잠시 집 앞바다까지 산책하기로 했다. 강태공은 끝없이 낚싯대를 투척하고 있었다. 이렇게 사는 건 어떨까. 하나뿐이라 생각한 내 인생의 옵션이 생겼다는 든든함. 제주의 하늘은 마블링이 된 노을로 뜨거운 응답을 하고 있었다. 우린 잘 자고, 잘 먹고, 잘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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