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국립오페라단 제공 | 참고 자료 <작품으로 보는 음악 미학>·<두길 서양음악사> 당신의 상상력을 자극할
음악과 언어의 하모니
매년 여름이면 이곳을 향해 전 세계 바그네리안(Wagnerian)들의 성지 순례가 시작된다. 바그너 오페라로만 무대를 채우는 독일 바이에른의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은 1876년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바그너 애호가들이 꿈에 그리는 음악 축제다. 140여 년 전 바그너가 직접 극장을 설계하고 3부작 <니벨룽의 반지>를 초연한 역사성을 바탕으로 지금도 사람들을 열광케 하고 있다.
거의 매해 공연되는 <니벨룽의 반지>는 나흘에 걸친 18시간짜리 여정이다. 최적의 음향을 고려해 만든 딱딱한 나무 의자와 좁은 통로, 충분치 않은 냉방이 기다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해 5만여 석에 50만 명 이상이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신청서를 보내온다. 자기소개서에는 왜 오페라를 보고 싶은지 독일어로 된 에세이를 첨부해야 하며, 5~10년씩 인내한 끝에 티켓을 손에 쥔다. 극장 측이 60대에겐 2~3년 후, 70~80대에겐 그 해 볼 수 있는 혜택을 주는 것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오페라’라는 이유에서다.
독일의 바이로이트가 있다면 모차르트의 고향 오스트리아에는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이목이 쏠린다. 영국에는 ‘에딘버러 국제 페스티벌’, 이탈리아의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 핀란드의 ‘사본린나 오페라 페스티벌’이 또한 한여름 밤을 달군다. 축제뿐 아니라 거의 1년 내내 오페라를 볼 수 있는 전용 극장이 주요 도시마다 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런던 로열 오페라, 밀라노 라 스칼라, 빈 국립오페라, 베를린 슈타트 오퍼 등이 최고로 꼽힌다. 당대 최고의 스타 가수들이 포진하고 새로운 라이징 스타가 탄생하고, 세계적인 연출가와 지휘자가 함께 하는 무대. 근대 이후 오페라는 유럽의 큰 도시와 도심 한복판에서 문화의 중심이었다.
소리, 우리를 정화시키는 그 무엇
푸치니의 대표작 <토스카> 2막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Vissi D’arte, Vissi D’amore)’는 소프라노들이 감정을 토하듯 노래하는 아리아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가 이 대목을 부를 때면, 특유의 호소력 짙은 음색과 연기로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20세기 최고의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의 인생 그 자체였다. 지금도 수많은 프리마돈나들이 감정을 이입하는 예술가를 위한 아리아다. 성악 가수가 멜로디 라인에 맞춰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며 기악 반주 없이 홀로 자유롭게 카덴차(cadenza)로 화려한 기교를 보여줄 수 있는 아리아는 ‘오페라의 꽃’에 비유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악기를 가진 사람들. 오페라 감상 포인트 첫째는 먼저 오페라 무대를 휘어 감는 가수들에게 있다. 오페라는 ‘스타 시스템’으로 작동된다. 그날의 가수가 누구인지에 따라 청중들의 반응도 크게 달라진다.
흥행 보증수표로 불리는 스타 성악가들은 대개 ‘벨칸토(bel canto) 창법’을 구사한다. 아름다운 소리라는 뜻을 가진 벨칸토는 마이크 없이 오케스트라의 연주를 뚫고 객석의 끝까지 노래를 전달하기 위해 개발된 창법이다. 맨 끝줄 청중의 귀에 도장을 찍듯이 단단하고 시원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소리를 전달할 때 좋은 평가를 얻는다. 소프라노, 메조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등 각 파트에 따라 음역, 음색, 음폭 등은 다르다. 영화 <파리넬리>에 등장하듯 거세된 남자 가수, 카스트라토도 있었다. 가진 소리에 따라 맡을 수 있는 배역도 나뉘는데 메조소프라노가 주역으로 뛰는 오페라는 비제의 <카르멘>, 생상스의 <삼손과 데릴라> 등으로 소프라노에 비해 적은 편이다.
특히 관객의 환호가 쏟아지는 대목은 고음의 향연에서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들이나 하이 C를 찌르는 테너의 아리아는 오페라 입문자들도 쉽게 전율케 한다. 콜로라투라의 경우 최고음은 1300헤르츠 이상으로, 일반 여성이 낼 수 있는 400헤르츠보다 3배 이상 높아 심금을 울리는 소리가 된다.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 2막 중 ‘광란의 아리아(Med Scene)’는 여주인공이 15분 이상 화려한 기교와 서정적인 선율을 선보이는 곡으로, 피 묻은 옷을 입고 드러누운 상태에서 하이 E플랫을 내는 고음의 정수를 보여준다. 조수미, 신영옥을 비롯해 조안 서덜랜드, 에디타 그루베로바, 나탈리 드세이 등 세계적인 소프라노가 필수 레퍼토리로 삼았다.
소리만 좋다 해 감동을 줄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페라에는 대사가 있는 만큼, 딕션(노래 발음)이 좋아야 하고 캐릭터가 담겨야 한다. 언어에 따라 단어 고유의 악센트와 장단이 있는데 가수들 사이에서는 “딕션이 좋으면 노래를 잘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특히 이탈리아어는 단모음과 장모음의 구분이 명확한 편이다. 작곡가들도 단어의 느낌을 살리는 리듬과 멜로디를 썼다. 일례로 베르디 <라트라비아타> 1막의 유명한 아리아, ‘아 그이인가(Ah! for’s e Lui)’는 첫 마디는 4분의 4박자 중 한 박자 반 후에 시작하고 있다. ‘에 스트라노(E strano)’의 악센트가 ‘a’에 있기 때문에, 이를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 ‘강, 약, 중강, 약’의 중강에 해당하는 부분에 맞춘 것이다. 이 단어를 번역하면 ‘이상해’가 되는데 한국어로 부른다고 할 때 ‘상’을 강하게 처리하게 된다. 느낌이 확 달라진다. 많은 오페라단들이 자막을 둘지언정 원어 그대로를 고집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청중들도 오페라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아리아뿐만 아니라 전체 음악과 가수의 연기와 표현 등을 종합적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의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에서 감동을 찾는 애호가들도 있다. 김홍승 한국예술종합학교 명예교수 겸 오페라 연출가는 “캐릭터에 맞게 성격을 표현해야 하는데 첫 등장 0.3초 안에 관중을 사로잡아야 한다”며 “한 마디를 하더라도 시선 처리와 동작과 대사 혹은 노래의 순서로 연기를 하면서 표정 하나에도 희로애락을 담아야 하고 걸음걸이에서도 성격이 나타나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 중에도 소리를 멀리 전달해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연기를 하면서도 말을 할 때는 관객을 향해 고개를 돌려야 한다.
이 밖에 오페라에는 성악가뿐만 아니라 연출가, 지휘자, 오케스트라, 합창단, 무용단이 필요하고 무대 디자이너와 의상, 조명 등 각 파트의 전문가들이 총출동한다. 특히 성악가의 시대를 거쳐 20세기, 1970년대 이전까지 오페라 제작은 지휘자에게 달려 있었다. 지난해 한국을 찾은 세계적인 지휘 거장 리카르도 무티만 해도 그의 데뷔는 오페라 무대였다. 재계 오페라 마니아인 김준 경방 회장은 “같은 오페라도 지휘에 따라 음악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 지휘자의 음악적 표현을 듣는 것은 중요한 감상 포인트가 된다”고 말했다.
오페라를 이해하는 미학의 세 가지 관점
오페라는 기악 음악과 비교할 때 ‘언어와 음악의 결합’이 큰 특징이다. 같은 성악곡 중 독일 가곡인 리트(Lied)의 경우 시가 음악과 결합한 것이라면 오페라에는 드라마, 즉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은 언어와 음악의 관계는 오페라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음악의 감동의 원천과 아름다움을 찾는 음악미학자들은 일찍이 음악과 언어의 세기의 라이벌 관계에 주목해 왔다. 오희숙 서울대 작곡과 교수는 “오페라 역사를 보는 관점 중 하나는 음악과 언어의 관계, 즉 누가 우위를 차지하느냐의 이슈였다”며 “오페라는 연극적 요소로 출발해 음악이 주도권을 잡았다가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과 바그너의 음악극으로 이어지며 음악과 극의 융합과 확장으로 변모해 왔다”고 말했다.
“좋은 영혼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방법 중에서 오페라(L’opera per musica)가
아마 가장 완벽하고 의미 있는
방법일 것이다.”
- F. 알가로티
“오페라. 격정적인 줄거리의
묘사에서 유쾌한 감성(sensations)의 도움으로 참여와 환상을 자극시켜 아름다운 예술의
모든 마법을 통일시키려고 하는 극적이며 서정적인 연극.”
- J. J. 루소
오페라의 시작은 예술사를 통틀어 분명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16세기 말 르네상스 피렌체의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았던 문인 귀족 모임, ‘플로렌스 카메라타’의 회원들은 고대 그리스의 연극에 코러스가 있었다는 것에 주목, 그리스 신화에 음악을 가미해 그 시대에 맞게 재현하려 했다. 이들은 이 새로운 예술 장르를 ‘음악적 이야기(Fabola in musica)’, 또는 ‘음악적 드라마(Dramma in musica)’라고 했다. 1597년 아코포 페리의 <다프네>, 페리와 카치니의 <에우리디체>와 1607년 몬테베르디 <오르페오>가 오페라의 시작이었다. 초창기 영주 중심의 궁정에서 결혼식 및 대관식 등에서 주로 귀족의 예술로 향유된 오페라는 불과 30여 년 만인 1637년 최초로 공공 오페라 극장이 만들어진 이후 17세기 이탈리아에서 크게 확산됐고 프랑스, 독일 등 유럽 전역에서 대중적 장르로 퍼져 갔다. 오페라의 전성기인 19세기에는 이탈리아의 베르디, 로시니, 벨리니, 도니체티 등 중요한 작곡가들이 하나의 경향을 만들었다. 비슷한 시기 독일에선 바그너가 음악극을 창시했다.
시대와 국가에 따라 언어와 음악 중 어느 쪽에 비중을 두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오페라가 나왔는데, 특히 18세기 나폴리 오페라는 화려한 음악적 기교와 함께 아리아와 콜로라투라가 중심이 되는 음악을 중시했다. 19세기 독일 낭만주의 오페라를 대표하는 바그너는 음악과 극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가운데 결국 ‘음악극(Musikdrama)’을 탄생시켰다. 음악과 극의 총체적인 결합을 이루면서 음악과 언어가 동등하게 결합하는 것을 중시했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 주로 성악가가 아리아를 부르고 기악이 반주의 역할을 한다면, 바그너의 오페라는 ‘라이트 모티브’라는 기악 음악 선율을 만들어 오케스트라의 역할을 격상했다. 또한 그가 직접 극본을 쓰며 스토리가 있는 오페라를 강조했다.
400여 년의 오페라사에서 이탈리아의 베르디, 독일의 바그너가 ‘양대 산맥’으로 꼽힌다면 이 둘은 명확한 차이를 보인다. 특히 베르디는 총 26편의 오페라를 쓴 50년이 이탈리아 음악사 자체라고 할 만큼 명성이 대단했다. 분명하고 뚜렷한 리듬과 단순하고 표현력이 강한 선율을 통해 이탈리아 고유의 음악적 특성을 지키면서도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인간 사회를 주제로 인간의 성격과 상황, 운명 묘사에 치중했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작품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푸치니의 <라 보엠>과 같은 19세기 이탈리아 오페라다. 바그너는 그에 비하면 작품 수는 적지만 바그네리안이라는 독특한 애호가 집단을 형성할 만큼 강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오페라의 스토리 라인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표현했는지 살펴보면 좀 더 풍부한 감상이 가능하다. 오페라의 대본은 주로 문학이나 신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특히 사랑과 연애, 짝사랑, 복수, 권력, 질투 등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오페라가 인기를 누렸다. 이와 같은 주제와 주인공의 캐릭터, 구체적인 심경이 대사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반영됐다. 일례로 <카르멘> 1막에는 돈 호세의 독창에 이어 카르멘과의 듀엣 파트가 나온다. 돈 호세는 처음엔 머뭇거리지만, 점차 카르멘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는데 이런 상황을 돈 호세의 독창 파트 마지막 선율을 듀엣에서 같이 부르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오페라의 감동은 때로 ‘역설의 미학’에 있다. 푸치니 <나비 부인>의 2막 중 ‘허밍 코러스’가 그렇다. 미국으로 떠난 핑커턴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초초상이 3년 만에 그가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어느 날, 속이 타들어 가는 수년간의 기다림을 생각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다. 이때 나오는 음악이 가사 없이 담담히 멜로디를 풀어 놓는 허밍 코러스다. 핑커턴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하녀 스즈키의 걱정에 들떠서 부르는 아리아 ‘어느 갠 날(Un bel di vedremo)’에 대비되며 더욱 처연한 심경을 자아낸다.
오페라 인문학 강의를 하는 홍승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경영학과 교수는 “심리적으로 긴 시간을 표현하는 데 역설적으로 장면을 정지하고 소박하고 단순한 멜로디로 허밍 코러스가 진행된다”며 “소리를 지르면서 주인공의 비참한 심경을 표현할 수도 있었는데, 타들어 가는 속을 닫은 문에서 촛불이 꺼지고 가사도 필요 없이 담담한 음악으로 풀어놓는 게 기가 막힌 대목이고 멜로디를 떠올릴 때마다 명작 중 명작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개인적으로 예전엔 아리아를 먼저 들었는데 최근엔 스토리에 방점을 찍고 있다”며 “오페라의 대본이 원작과 비교해 어떻게 바뀌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등장인물을 사회적 배경과 더불어 탐구하면 오페라의 이해가 한층 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오페라에는 음악과 이야기 이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오페라=종합예술’이라는 공식이 나온 것은 바그너가 제안한 ‘종합예술작품(Gesamtkunstwerk)’ 이후 미술, 조명, 무대, 의상 등 모든 영역이 상호작용을 하면서다. 서로 다른 요소들이 한데 모여 시너지를 이룬다는 융합이다. 최근의 화두는 단연 테크놀로지와의 융합에 있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가 가장 선두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태양의 서커스>를 연출한 로베르 르파주는 <니벨룽의 반지>를 위해 움직이는 무대를 설치했다. 알루미늄 기둥 판에 고화질 3차원 영상을 투사해 물, 불, 숲, 바위 등을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무대 테크놀로지를 보여줬다. 국내에서도 국립오페라단이 지난해 10월 선보인 바그너 <로엔그린>에서 영상이 가미된 무대를 선보인 바 있다.
오페라를 이끄는 총책임자로, 지휘자에 이어 연출가의 역할을 강조하며 오페라를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이른바 레지테아터(Regietheater) 개념도 독일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확장되고 있다. 국립오페라단의 <로엔그린>의 경우 주인공을 원작과 달리 사기꾼 선동가로 바꿔 지금 오늘날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고자 했다. 국립오페라단 관계자는 “오페라에서 다루는 드라마는 자칫 진부하고 뻔한 얘기일 수 있지만 어떤 콘셉트로 어떻게 재현하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무대를 만들 수도 있고 재미없는 공연을 올릴 수도 있다”며 “오페라의 드라마는 단순한 인물과 사건이지만 핵심은 보편성의 미학에 있다”고 말했다.
400년을 거쳐 검증되고 살아남은 오페라에는 시대가 지나도 변치 않는 가치와 보편성을 담고 있다. 마치 양념을 섞지 않는 최고급 음식처럼 순수 자연음향을 지향하는 최고의 성악가들과 각 분야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보편적인 이야기. 옛 신화를 통해서도, 문학 속 드라마를 통해서도 결국 인간에 대한 공감을 끌어내고 있다. <모차르트 호모 사피엔스> 저자인 김진호 영남대 교수는 “음악은 현대인의 가장 중요한 특성인 통합적 마음의 산물로, 인류의 문명과 함께 음악적인 종인 호모 무지쿠스가 있었고, 통합적 마음을 바탕으로 음악을 이해하는 길은 곧 인간의 이해의 길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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