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은영 문학박사·서울하우스 편집장] 거미줄을 엮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거미는 숙명적인 죄의 굴레를 의미하는 한편 부지런함과 인내의 상징이며 그 놀라운 재주는 창작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아침나절 풀숲에서 스스로 줄을 뽑아 그물을 치고 있는 거미를 보았는가. 꽁무니에서 나오는 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나뭇잎 사이에 얼개를 만들고 날실을 차근차근 이어 붙여 자신의 몸집보다 수십 배나 큰 그물을 짠다. 주로 먹이를 잡고 알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짓는 거미줄인데 구조와 형태가 놀랍도록 체계적이고 치밀하다. 실로 거미는 자연의 빼어난 건축가요, 직조공이 아닌가.
구스타브 도레, 아라크네 부분, 1867년, 단테의 신곡 중‘연옥편’삽화
구스타브 도레, 아라크네 부분, 1867년, 단테의 신곡 중‘연옥편’삽화
거미가 된 아라크네의 운명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가 쓴 <변신 이야기>에 의하면 거미는 직조에 뛰어난 여인 아라크네가 변신해 생겼다고 한다. 리디아에 사는 아라크네는 어찌나 직물을 잘 짰는지 아무도 경쟁할 사람이 없었다. 교만해진 아라크네는 훌륭한 직조가인 아테나 여신보다 자기가 더 낫다고 장담했다.
그 소문을 들은 아테나는 아라크네를 찾아가 인간의 재주를 신과 비교하지 말고 용서를 구하라고 타이른다. 그러나 아라크네는 듣지 않았고 결국 이들은 직조 경합을 벌이게 된다. 아테나는 직물 속에 신에게 대항하다 벌을 받는 인간의 운명을 짜 넣은 반면 아라크네는 제우스가 인간 여성을 유혹한 일화들을 직조한다. 아라크네의 솜씨가 뛰어난 데다 감히 신을 조롱한 것을 보고 아테나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리고 만다. 여신은 베틀의 북으로 아라크네의 직물을 찢고 굴대로 그녀의 이마를 때린다. 아라크네가 수치심을 못 이겨 목을 매자 아테나는 그녀를 살려 거미로 만들어 버린다. 거미가 된 아라크네는 평생 줄에 매달려 거미줄을 짓게 된다.
아라크네의 신화는 인간의 재능이란 본래 신이 부여한 것인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교만에 대해 신이 내린 무서운 징벌을 보여주는 이야기로 해석된다. 단테는 <신곡>에서 베르길리우스와 함께 연옥을 지날 때 거미로 변해 가는 아라크네를 보고 이렇게 외친다. “오, 아라크네! 반쯤 거미가 된 네 모습이 보이는구나. 그대를 파멸로 이끈 거미줄을 고통스럽게 기어오르고 있으니.”
이 장면은 19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출간된 단테의 <신곡> 중 ‘연옥편’에서 그림으로 재현됐다. 구스타브 도레(Gustave Doré)가 그린 책의 삽화들 중에는 바닥에 눕듯이 신음하며 기어가는 아라크네가 있다. 상체는 젊은 여자의 몸인데 하체는 이미 다리가 여러 개 달린 징그러운 괴물로 변한 모습이다. 가장 큰 악덕의 하나인 교만의 죄로 인해 아라크네는 다른 죄인들처럼 연옥의 가혹한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와 반대로 아라크네의 신화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는 16세기 후반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의 천장에 <아라크네> 혹은 <변증법>이라 불리는 그림을 그렸다. 그곳에는 여덟 가지 미덕을 각각 의인화해 표현했는데, 그중 ‘변증법’에 대한 의인화로서 아라크네가 채택된 것이다.
변증법은 대화와 논쟁을 통해 서로 다른 관점을 종합하고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는 방법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변증법은 진리 탐구를 목표로 삼는 학자들이 따라야 할 미덕으로 여겨졌다. 베로네세의 그림에서 아라크네는 완성된 거미줄을 양손으로 잡고 높이 들어 만족한 듯 바라보고 있다. 그 거미줄은 전체가 날렵한 직선으로 구성됐는데, 양쪽 끝 부분에서는 줄이 무질서하고 서로 비대칭이지만 중심으로 갈수록 일정하게 질서가 잡혀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마치 모순된 것을 논리적으로 체계화해 한 단계 상승시키는 변증법의 원리를 나타내는 것 같다. 이러한 비유는 신화의 맥락보다는 거미줄 자체의 특징에 초점을 맞춘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점액질의 유동적인 물질로부터 형성된 논리적인 기하학이 거미줄이라면 그것을 완성한 거미의 능력은 당연히 미덕으로 수용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위) 파올로 베로네세, 아라크네 혹은 변증법, 1575~1577년, 베네치아 두칼레 궁 아래 좌) 오딜롱 르동, 웃는 거미, 1881년, 루브르 미술관 우)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1881년, 개인 소장
위) 파올로 베로네세, 아라크네 혹은 변증법, 1575~1577년, 베네치아 두칼레 궁 아래 좌) 오딜롱 르동, 웃는 거미, 1881년, 루브르 미술관 우)오딜롱 르동, 우는 거미, 1881년, 개인 소장
창조가 일어나는 정신의 어두운 심연

거미는 연옥의 음울한 골짜기를 떠도는 저주받은 괴물인가, 아니면 탁월한 두뇌와 재주를 가진 위대한 설계자인가? 거미의 상반된 속성은 상상을 즐기는 예술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불러일으키곤 했다. 상징주의 화가 오딜롱 르동(Odilon Redon)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르동은 작품 활동 전반부 20여 년 동안 주로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렸는데 그때 <웃는 거미>와 <우는 거미>라는 한 쌍의 검은 이미지를 제작했다. 검은색은 르동에게 있어서 보이지 않는 세계를 표현하는 데 가장 적합한 본질적이고 의미가 충만한 색이었다. 그가 그린 거미들은 열 개의 다리와 사람의 얼굴을 가진, 실제와 다른 비현실적인 거미다. 악동처럼 웃고 있는 거미는 음흉하게 술수를 꾀하고, 울고 있는 거미는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서러워하는지도 모른다. 거미들은 꿈이나 환상 속에서 불현듯 엄습하는 두려움과 슬픔을 보여주며, 은밀히 꿈꿔보는 교활한 장난이나 위반의 심리를 드러낸다. 거미의 원초적 어둠은 규정할 수 없는 인간 정신의 어두운 심연과 통한다. 거미가 놀라운 기술과 인내로 모순을 직조하듯이 이 화가는 창작을 위해 저 깊고 신비로운 정신의 어둠 속으로 기꺼이 빠져들어야만 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