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흔히 비를 눈물에 비유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비 하면 대개 슬프고, 우울한 정서를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비가 늘 우리를 슬프게 할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비는 때론 기쁨이자, 유희이며, 위로의 매개체가 된다. 인류가 비를 보며 심리적 변화를 겪게 되는 이유는 뭘까.

1841년 서호주 북부 킴벌리 지역에서 한 동굴 벽화가 발견됐다. 연구 결과 이 벽화는 약 4000년 전에 그려진 것으로 확인됐다. 아보리진 원주민은 이 암벽화를 완드지나(Wandjina)라고 불렀다. 사실 호주에는 아보리진 원주민이 남긴 동굴 벽화가 꽤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에 그 자체로 대단한 고고학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완드지나는 이후 수많은 인류학적 저작과 예술작품에 인용되는 가장 유명한 암벽화 중에 하나가 됐다. 왜일까? 그 문양이 아주 기이해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암벽화의 상징이 뜻하는 바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있었는데, 심지어 호주에 착륙한 외계인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인류의 원초적 대상, 비
완드지나 암벽화와 같은 형태의 문양은 약 3800~4000년 전에 처음 등장했다. 학자들이 당시 킴벌리 지역의 기후를 재구성해보았는데, 약 1000년 동안 지속되던 엄청난 기간의 가뭄이 끝나던 시기와 일치했다. 이후 호주 북부 지역은 일정한 몬순기후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아마도 당시 킴벌리 지역의 원주민들은 비를 처음 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즉, 완드지나 암벽화는 그들이 처음 본 ‘비’를 상징한다.
비는 인류 생명의 근원이었다
[완드지나 암벽화. 계란형의 둥근 얼굴은 턱 부분에서 끊어져 있다. 눈과 코는 하나로 붙어 있는데, 눈썹이 눈 전체를 감싸고 있다. 머리 주변에는 방사상으로 뻗은 선들이 보이며, 입은 없다. 마치 추상화 같은 문양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인류학자들은 오랫동안 고민해 왔다. © 2014. Robyn Jay all rights reserved.]

기괴한 모양의 완드지나는 외계인이 아니라 비와 홍수를 몰고 오는 초자연적 존재였다. 머리 주변에 삐죽거리며 나온 선들은 천둥, 번개로 보인다. 얼굴 아래로 이어진 여러 개의 선들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다. 입이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입이 있으면, 비가 영원히 그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완드지나 문양은 생명과 재생을 의미하지만, 또한 화가 나면 홍수와 번개, 태풍을 일으키는 초월적 존재를 뜻한다.

인류에게 있어서 비는 생명의 근원이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초목이 마른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차례로 사라지고, 나중에는 마실 물조차 모자라게 된다. 햇빛, 땅과 함께 비는 가장 중요한 생명의 원소라고 할 수 있다. 완드지나 암벽화가 학계의 큰 관심을 받은 이유는, 신석기 농업혁명 이전 원시 인류의 삶에도 비가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풍요의 근원, 비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원시 부락을 상상해보자. 아마도 홀딱 젖은 원시인들이 동굴 속에서 우중충하게 모여 있는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 구석기 시대에 우산이나 우비가 있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비오는 날에 구석기인들은 진흙탕이 돼 버린 움막에서 버럭버럭 짜증을 부렸을까? 혹은, 가죽 옷이 물에 젖는다면서 잔뜩 예민해져 있었을까?

들판에 비가 내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들풀에 씨앗이 맺히게 된다. 풀을 손으로 비비면 씨앗을 얻을 수 있는데, 이를 잘 갈아서 반죽해 구우면 맛있는 빵이 된다. 게다가 초목이 자라면 새와 동물이 모여든다. 불어난 계곡에는 물고기가 많아진다. 곧 비가 그치면 신나는 파티가 시작되는 것이다. 아마 촉촉하게 내리는 비를 보며 구석기인들은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비는 인류 생명의 근원이었다
[폭우가 온 뒤 불어난 계곡, 호주 퀸즈랜드. 비는 홍수를 몰고 오는 무서운 존재지만, 동시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 2006. Rob and Stephanie Levy all rights reserved.]

비가 오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너무 당연한 이야기여서인지 이에 대한 심리학적 연구는 찾을 수가 없다. 빗소리를 이용한 음악의 효과를 다룬 연구에서도, ‘빗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안정된다’는 전제는 아무런 선행연구 없이 제시된다. 배가 부르면 행복하다는 것처럼 증명이 불필요한 명제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따지자면 아마도 긴 진화적 역사 동안 인류가 반복적으로 경험한 비와 풍요의 관련성 때문일지도 모른다.
비는 인류 생명의 근원이었다
[들풀의 씨앗을 갈아 반죽한 후 불에 구우면 부시브레드(Bush Bread)를 만들 수 있다. 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갈색 빵의 이름도 부시브레드인데, 바로 호주 아보리진의 전통 빵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 2003. Nachoman-au all rights reserved.]

비와 두려움
그러나 비가 늘 ‘촉촉’하게 내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태풍이나 사이클론처럼 강풍을 동반한 폭우는 엄청난 피해를 유발한다. 아보리진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부족의 규율을 어기면, 완드지나가 노해 벌을 내린다고 생각했다. 완드지나의 머리에서 나오는 천둥, 번개, 그리고 열린 턱에서 쏟아지는 엄청난 열대성 폭우가 바로 그것이다. 흔히 호주를 더운 사막의 나라로 생각하지만, 비가 한번 내리면 한반도 면적보다 훨씬 넓은 지역이 온통 물바다가 돼 버린다.

폭우뿐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둥, 번개를 극도로 두려워한다. 이를 아스트라포비(astraphobia)라고 하는데, 사실 사람보다 개와 고양이 등의 동물에서 더 흔하게 관찰된다. 아스트라(ἀστραπή, astrape)는 번개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안전한 집 안에 있으면서도 극도의 두려움을 느끼며 마치 죽을 것 같은 불안을 경험한다. 평소에도 늘 일기예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데, 심해지면 침대 밑이나 옷장 속에 숨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아스트라포비아 즉, 천둥공포증은 비교적 쉽게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은 뇌벽이 치는 날, 아무렇지도 않게 편안하게 있는 동료를 관찰하는 것이다. 모닥불을 피우거나 도란도란 모여 정다운 대화를 나누는 것도 방법이다. 사실 천둥, 번개가 우리에게 위해를 주는 경우는, 정말 ‘벼락에 맞을 확률’만큼이나 낮다. 간단한 인지적 교정으로도 동물적 두려움을 제거할 수 있다.
비는 인류 생명의 근원이었다
[아보리진의 ‘무지개 뱀’ 신화를 묘사해 전통 방식으로 그린 작품. 아보리진에게 무지개 뱀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물, 즉 생명의 자연스러운 순환 현상을 의미한다. © 2009. loloieg all rights reserved.]

비 온 뒤, 무지개
호주 아보리진의 신화, 꿈 이야기(dreaming stories) 중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무지개 뱀(rainbow serpent)’ 신화다. 무지개 뱀은 생명의 창조자로 묘사된다. 호주 북부에서 일정하게 반복되는 우기와 건기의 순환을, 뱀과 무지개의 모습으로 상징한 것이다. 그래서 하늘에 무지개가 뜨면 아보리진 원주민들은, 무지개 뱀이 하나의 물구멍에서 나와 다른 물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순환의 과정을 통해서 물구멍(waterhole)이 영원히 마르지 않는다고 믿는 것이다.

가장 두렵고 끔찍한 순간, 모든 것이 절망으로 가득해 구원의 희망마저 없어진 그 순간에, 전혀 예상치 못한 소중한 통찰과 돌파구를 얻는 경우가 있다. 극과 극은 서로 만나기 때문이다. 모든 극단은 오히려 그 반대의 극단과 더 밀접하고 본질적인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프 융은 에난치오드로미(enatiodromie)라고 했다.

에난치오드로미를 상징하는 전형적인 자연현상이 바로 비와 무지개다. 비는 한편으로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가는 무서운 자연재해지만, 동시에 만물에게 단물을 축여주는 생명의 원천이기도 한다. 폭풍우가 심할수록 비 온 뒤 찾아오는 무지개의 아름다움이 더 큰 법이다. 며칠이고 지속된 심한 폭우 뒤에 나타나는 색색의 무지개는 바로 이러한 삶의 진실을 우리에게 시현해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머리 위로, 혹은 당신의 삶 위로 쏟아지는 밧줄 같은 장대비는 분명 봄날에 잠시 찾아오는 촉촉한 단비는 아닐 것이다. 여름을 넘기려면 사정없이 몰아치는 비바람,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한 폭풍우도 겪어야 한다. 그러나 언젠가 폭우는 그치고, 하늘은 맑게 갤 것이다. 천둥이 치던 하늘에는 아름다운 무지개가 걸릴 것이다. 그리고 주위를 돌아보면 세상은 온통 흘러넘치는 풍요로 가득할 것이다. 영원히 순환하는 생명의 진리다.

자연의 역설적 진리를 깨닫고 전율하는 당신 앞에 큰 칠판이 있다면,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아마도 어떻게든 이러한 진리를 적어, 다른 이에게 영원히 남기고 싶을 것이다. 4000년 전 킴벌리 지역의 한 동굴에서 긴 우기를 마치고 기쁨에 취해 암벽화를 그린 아보리진 원주민들도 이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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