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는 6월 말이나 7월 초에 우기가 시작된다. 비는 대류성, 지형성, 전선성, 수렴성 비로 나뉘는데, 대류성 비는 우리나라 여름철에 가장 흔하게 나타나는 강우 현상이다. 대기의 상층과 하층의 온도 차로 말미암아 대류현상이 일어나면서 비가 내리는 것이다. 여름철 우기의 날씨는 변화무쌍해서 기상청 일기예보는 자주 빗나간다.
비 예보를 듣고 우산을 챙겨 나가면 비는 오지 않고, 우산 없이 나간 날엔 비가 내린다. 오늘은 아침부터 제비들이 지면에 닿을 듯 저공비행을 하더니 기어코 빗발을 뿌린다. 오후 들자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면서 사위가 어두워지더니 제법 많은 양의 비가 쏟아진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친다. 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거친 기세로 쏟아져 내린다. 비는 거세져서 마당의 모과나무와 후박나무 파릇한 이파리들과 웃자란 파초 줄기들이 휘청거릴 정도다. 내 고막에 사방에 차오르는 빗소리가 가득 고인다. 비는 금세 그칠 기미가 없다.
나는 비가 내릴 때 내면의 활동성이 깨어나 바깥으로 뛰쳐나가곤 했었다. 비의 단조로운 리듬이 심장박동을 뛰게 한다. 어쩐 일인지 비는 나를 뒤흔든다. 저 태초에 생명의 기원이 물이기 때문일까. 비는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향수를 맹렬하게 자극한다. 빗방울들은 하나하나가 작은 바다다. 비가 낭만적 노스탤지어를 발명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적다.
책을 읽다가 다음과 같은 문장에 눈길이 머문다. “병은 나름대로의 규칙과 절도와 침묵과 영감들을 갖춘 수도원과 같은 것이다.”(알베르 카뮈, 1942년) 빗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비가 나름대로의 규칙과 절도와 침묵과 영감들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는 무조음악(無調音樂)과 같이 마음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비와 병은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았다.
비, 문학의 성수
비는 시인과 작가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다. 비를 노래한 시들은 정말 많다. 그중에서 먼저 떠오른 게 김소월(1902~1934년)의 ‘왕십리’다.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레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 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 저 새야/ 울려거든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다오/ 비 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이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 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청년 김소월은 비를 얼마나 하염없이 바라보았던가. 이 시는 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는 화자의 답답한 심경을 전달한다. 이 시의 백미로 꼽히는 온다, 오누나, 오는, 올지라도와 같이 연쇄되는 동사의 변주와 활용에서 그치지 않는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비 맞아 나른한 벌새’의 이미지는 비에 갇혀 멀리 나가지 못하는 시인의 처량한 마음과 겹쳐지는 바가 있다. 이 시가 제출된 게 1920년대 일제강점기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김소월은 식민지 지식인 잔맹(殘氓)으로 살아가는 것의 답답함과 암울함을 ‘비’라는 이미지에 투사하고 있다. ‘왕십리’라는 장소가 그렇듯이 이 시에는 가망 없는 희망을 품은 자의 절망이 고스란히 배어나온다.
1980년대 시인 황인숙의 ‘비’는 김소월의 ‘비’와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저처럼/ 종종걸음으로/ 나도/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싶다…”
황인숙의 시에는 시대로부터 오는 억압이나 하중이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비의 이미지 역시 우울이나 우중충함과 연관되지 않는다. 이 짧은 시 속에서 비는 종종걸음을 친다. 이 비는 더 기쁜 일을 찾고 탐닉하려는 마음의 장력(張力) 속에서 제 존재를 또렷이 드러낸다. ‘비’의 종종걸음은 누군가의 영혼에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찾아 나서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황인숙의 또 다른 시편을 보자.
“아, 저, 하얀, 무수한, 맨종아리들,/ 찰박거리는 맨발들./ 찰박 찰박 찰박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맨발들./ 쉬지 않고 찰박 걷는/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들/ 맨발로 끼어들고 싶게 하는.”
앞서의 시와 마찬가지로 ‘비’에 단 한 점의 우울이나 암울함도 깃들지 않는다. 오히려 비는 생의 기쁨과 발랄함을 순수하게 드러내도록 이끈다. 보라, 비는 맨발로 ‘찰박 찰박 찰박’ 걷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비와 티눈 하나 없는 작은 발은 잘 어울리는 한 쌍이다. 비는 시의 서정적 주체를 맨발로 유희의 기쁨 속으로 참여하도록 유혹하는 이미지다.
전후 작가 손창섭(1922~2010년)의 단편 ‘비오는 날’은 비가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소설의 첫대목에서부터 비가 내린다.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에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이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이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1953년 <문예> 중에서)
비로 투영한 비의 메마름
비의 장막 저편에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과 쓰러져가 가는 목조 건물이 떠오른다. 손창섭은 한국전쟁이 끝난 뒤 폐허로 변해 버린 현실의 암담함이나 우중충함을 드러내기 위해 비를 자주 등장시킨다. 그의 작품에는 늘 비가 내리고, 작중 인물들은 닫힌 공간에서 무위도식하며 나날을 흘려보내는 잉여인간들이다. 이들은 비의 장막에 갇힌 채 굴속같이 침침한 방 안에 기거한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잃은 채 ‘비의 감옥’에 유폐된 존재들.
이들의 실존은 생의 최하 지점에 불시착한 불운과 절망에 서서히 침식당하고 무너진다. 손창섭 작품에서 ‘비’는 생의 무위에 갇힌 채 견뎌야만 하는 굴욕적인 현실과 내면의 우울을 표상하는 은유로 생생하다. 작가는 비를 통해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의 우중충한 소외와 고독을 그려내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다.
우리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작은 바다다. 비는 멀리서부터 온다. 비는 항상 무리지어 먼 거리를 이동한다. 무리 짓는 것, 그것이 비의 덕성이다. 비가 구름 속에 무리 지어 있다가 땅으로 내릴 때도 무리 지어 내린다. 비의 기원은 먼 곳의 강물이거나 호수, 아니면 바다일 테다. 비의 기원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비가 오면 사람들은 무심히 ‘비가 오는군’할 뿐이다. 그들에게 걱정할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비는 그들의 관심사 바깥에 있다. 비가 바람을 타고 얼마나 먼 거리를 이동해서 오는지, 혹은 비가 먼 해안과 산맥을 건너서 온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도 그들은 도무지 감명도 받지 못할 게 분명하다. 그들의 팍팍한 삶을 견뎌내는 동안 감정이 메말라 버렸기 때문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필요한 물감의 목록을 적은 편지의 끝에 “다시 태어난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기를”이라고 적었다. 1888년 5월의 일이다. 나는 고흐가 살던 시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고흐가 감당하던 불행과 고통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그는 ‘더 나은 삶’을 꿈꾸었는데, 젊은 시절, 나 역시 비가 내리면 자주 우울에 잠긴 채 허덕거리며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나는 유배 중인 왕처럼 비 내리는 극지(極地)의 밤에 유폐돼 숨이 막히곤 했던 것이다. 누구나 불행의 총량은 같다. 저마다 불행의 모습은 다르지만 운명 속에 깃드는 불행의 양은 엇비슷할 것이다. 고흐에겐 고흐의 불행이 있고, 내겐 내 몫의 불행이 있는 법이다. 내 불행은 너무 젊었던 탓이다. 나는 이 세계의 부조리함과 세계의 광대한 고독에 대해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되도록이면 많이 살고 싶었다. 질주하는 법을 배웠지만 멈춰서는 법은 알지 못했다. 자그마한 사업상의 성공들이 내 명석함이 가져온 당연한 열매라고 여겼다.
나는 작은 성공들에 도취돼 오만해졌다. 고로 내 크고 작은 시행착오들과 불행은 스스로 자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비를 맞으며 도시의 거리를 걸어가던 젊은 날, 나 역시 ‘다시 태어난다면…’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날이 저물면서 비는 주춤댄다. 빗줄기가 약해지자 모과나무 가지에 박새가 앉아 지저귄다. 박새도 빗속에서 모이를 구하는 일은 어려웠으리라. 나는 실내에 등을 켜고, 부엌으로 나가 쌀을 씻어 저녁밥을 안친다. 무릇 만물은 주린 배를 채워야 사는 법이다. 선사 운문이 한 승려에게 “어디서 오십니까?” 하고 물었다.
젊은 승려는 “찻잎을 따다가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선사는 “사람이 찻잎을 땁니까? 아니면 찻잎이 사람을 땁니까?” 하고 재차 물었다. 승려가 난처해서 머뭇거리자 선사가 말했다. “스님께서 이미 대답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습니까.” 나는 어디에서 온 사람일까. 내 생명의 기원에 대해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찰나, 내가 살아 있다는 것 말고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비와 관련된 아름다운 순우리말
가루비: 가루처럼 뿌옇게 내리는 비.
산돌림: 산기슭으로 내리는 소나기.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서 한 줄기씩 내리는 소나기.
는개: 안개보다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 조금 가는 비.
물마: 비가 많이 와서 사람이 못 다닐 정도로 땅 위에 넘쳐흐르는 물.
비이슬: 비가 내린 뒤 풀잎 따위에 맺힌 물방울.
소슬비: 으스스하고 쓸쓸하게 오는 비.
비거스렁이: 비가 갠 뒤에 바람이 불고 시원해지는 일 또는 그러한 때.
자드락비: 굵직하고 거세게 퍼붓는 비.
먼지잼: 비가 겨우 먼지나 날리지 않을 정도로 조금 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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