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사이인 클라이브와 버넌은 약속을한다. 두 사람 중 누구라도 몹쓸 병에 걸리면 그를 데리고 암스테르담에 가자고. 그리고 그곳에서 병에 걸린 친구가 안락사하도록 해주기로 말이다. 안락사가 법으로 인정되는 그곳에서 두 사람은 약속을 지킨다.
영국 소설가 이언 매큐언의 작품 <암스테르담>에 등장하는 클라이브와 버넌도 암스테르담에 처음 도착했을 때 아마 여기에 서 있었을 것이다. 암스테르담 중앙역. 비행기이건 기차이건 암스테르담에 도착하는 사람들이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곳이다. 또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역이라는 호평과 더불어 아름다운 아이(Ij)강과 암스테르담을 갈라놓은 흉물이라는 혹평을 동시에 받는 곳이기도 하다.
‘빛의 마술사’ 렘브란트 반 레인(Rem-brandt van Rijn)을 찾아가는 길 또한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시작된다. 중앙역 앞 여러 갈래로 얽힌 트램들과 그 건너 암스텔강 위에 떠 있는 수많은 배들. 중앙역 앞의 첫 풍경은 혼잡하다. 그러나 19세기 말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들이 17세기 길드 하우스와 어우러진 채 파노라마 왼쪽의 웅장한 성 니콜라스 대성당까지 아우르면 암스테르담은 17세기 황금시대를 구가하던 오래된 상업 도시가 아니라 렘브란트와 고흐를 품고 있는 예술의 도시로 바뀐다.
렘브란트는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생 대부분을 암스테르담에서 살다가 죽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20여 분 정도 천천히 걸어가면 렘브란트가 찬란한 인생의 전성기와 나락의 경험을 함께 했던 집 ‘렘브란트 하우스(Rembrandthuis)’를 만난다. 이 집은 17세기 초부터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상인과 금융인들이 모여 살던 지역에 지어진 호화 주택이다. 렘브란트가 이 집을 구입하기 10여 년 전, 암스테르담 왕궁의 설계자이기도 한 야콥 반 캄펀이라는 사람이 리모델링을 한 건물이니 오죽할까? [암스테르담의 실핏줄과도 같은 운하. (사진 이석원 기자)] [어디서든 암스테르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암스테르담의 상징과도 같은 중앙역. (사진 이석원 기자)]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렘브란트 하우스. 오른쪽 건물까지 2개의 건물이 합쳐진 공간이다. (사진 이석원 기자)]
이 집에는 렘브란트의 영광과 오욕이 공존한다. 이 집을 구입할 당시 렘브란트는 귀족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면서 벌어들인 돈뿐 아니라 미술상으로 활동하면서 벌어들인 돈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렘브란트의 집 2층은 그에게 그림을 배우고자 유럽 전역에서 몰려든 문하생들로 늘 붐볐다. 여기서 최고의 걸작인 <야경>이 제작되기도 했다. 렘브란트로서는 그야말로 최고의 황금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 집은 렘브란트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아름다운 부인 사스키아가 죽음을 맞더니 할부로 구입한 집값을 다 갚지 못한 렘브란트는 파산한다. 채무자들은 집에 있던 렘브란트의 작품과 렘브란트가 수집한 작품까지 모두 가져가 팔았고, 결국 1658년 집은 경매에 넘어간다. 호화 생활을 누리던 렘브란트는 맨몸으로 쓸쓸히 월세방으로 이사했고, 10여 년 후 참담한 죽음을 맞는다. 그러니 지금은 렘브란트를 기념하는 곳이지만 이 집이 그에게는 아픔이었을 수도 있다.
‘북구의 베네치아’라고 불리는 암스테르담에는 총 연장 100km의 운하가 90개의 섬을 만들고, 그 섬들은 1500여 개의 크고 작은 다리로 연결된다. 시내 가장 번화한 담락 거리와 담 광장을 중심으로 조금만 걷다 보면 크고 작은 운하가 나온다. 그 운하 사이사이를 천천히 걷다 보면 암스테르담의 알몸이 드러난다. [반 고흐 박물관과 마주보고 있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사진 이석원 기자)]
다닥다닥 붙어서 손톱만큼의 틈도 보이지 않는 건물들의 질서정연함과는 달리, 거리의 상점과 카페, 기념품 가게와 길거리 음식점들은 무질서해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는 가족이 산책하는 길에 느닷없이 대낮부터 시뻘건 조명의 홍등가가 불쑥 튀어나와 아이를 데리고 길을 걷던 부모들을 놀라게도 한다. 암스테르담의 속살들이다.
암스테르담의 속살들을 음흉스레 구경하다가 발길이 멈춰진 곳은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Rijksmuseum Amster-dam). 드넓은 잔디와 수상 정원을 거느린 이곳에는 <야경>을 비롯해 렘브란트의 대표작들이 전시돼 있다. 작지 않은 미술관 안에서 <야경>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차피 사람들 모두 2층 222번 방에 있는 <야경> 앞에 모인다. 그리고 거기에는 <야경>뿐 아니라 <사도 바오로의 모습을 한 자화상> 등 렘브란트의 대표 작품들이 모여 있다.
<야경>이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그림의 진짜 제목은 <프란스 반닝코크 대위의 민병대>다. 1640년 렘브란트가 당시 민병대를 지휘하던 반닝코크 대위에게 직접 그림을 부탁받고 그린 것이니 확실하다. 그런데 왜 <야경>(영어 제목은 Night Watch)이라고 불릴까?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 소장된 <야경>은 363×437cm 크기다. 그러나 렘브란트가 그린 것은 450×500cm였다. 그런데 민병대본부 벽에 걸기에는 그림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민병대원들이 렘브란트에게는 얘기도 하지 않고 그림을 잘랐다. 렘브란트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또 이 그림이 걸린 민병대본부에는 석탄 종류인 이탄을 사용하는 난로가 있었다. 이 난로에서는 엄청난 그을음이 나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림의 가장자리 부분이 차츰 어둡게 변한 것이다. 나중에 사람들은 이 그림이 야음을 틈타 기습을 하는 장면이라고 생각하고 <야경>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렘브란트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이다.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생활을 하며 제법 편안하게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은 렘브란트를 지금도 네덜란드에서는 국보로 여긴다. 64세까지 산 그는 당시로는 꽤 장수한 편이다. 비록 말년에 파산하며 불행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삶을 위대한 작가로, 가장 비싼 그림을 팔았던 화가로 살았다. 그런데 의도된 것일까? <야경>이 걸려 있는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바로 건너편에는 일생을 가난과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스럽게 살다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진 또 다른 국보가 있다. 바로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다.
고흐의 걸작을 한눈에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앞은 암스테르담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곳이다. 어느 날 갑자기 암스테르담의 랜드마크가 돼 수많은 젊은이들의 인증 샷 명소가 된 ‘아이 암스테르담(I amsterdam)’ 조형물을 지나 보기만 해도 시원함이 느껴지는 수상 정원에서 잠시 눈 호강을 하고 나면 이내 등장하는 짙푸른 잔디 광장 ‘뮤제움플레인(Museumplein)’. [반 고흐 미술관은 1973년 네덜란드의 건축사 리트펠트가 설계한 본관(오른쪽)과 1999년 일본의 건축가 구로카와 기쇼가 설계한 신관(왼쪽)으로 이뤄져 있다. (사진 이석원 기자)]
해가 좋은 날이면 이곳에는 암스테르담의 젊은이들은 물론, 암스테르담을 찾은 외국의 젊은이들이 모두 쏟아져 나온 느낌이다. 연인끼리 제법 ‘야한’ 데이트를 즐기는가 하면, 가족이 소풍을 나오기도 하고, 긴 걸음에 지친 여행자들은 그저 편안한 몸짓으로 쉬기도 한다.
그렇게 푸른 잔디밭을 거닐다 보면 오른쪽에 등장하는 범상치 않은 건물이 바로 반 고흐 미술관(Van Gogh Museum)이다. 이 미술관에는 연 평균 140만 명의 관람객이 몰린다. 이유는 단 하나. 세계에서 빈센트 반 고흐의 진품 컬렉션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흐의 유명한 작품들 가운데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에>나 <밤의 카페 테라스> 등 일부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다 모여 있다.
초기의 걸작 <감자를 먹는 사람들>, <신발>을 시작으로 아를 시절의 <고흐의 침실>, <노란 집>, <열두 송이 해바라기>, <랑그루아 다리>, <고갱의 의자>를 비롯해 생애 마지막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까마귀 밀밭>, <피에타>, <흐린 하늘과 밀밭> 등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그래서 반 고흐 미술관 앞은 1년 365일 표를 사려는 사람들과 입장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미술관을 세운 일등 공신은 고흐다.
뭐 그의 그림으로 세워진 미술관이니 당연한 것일지 모르지만, 실제 이 미술관에 고흐의 그림을 기증한 사람은 고흐의 조카, 즉 평생의 후원자인 동생 테오의 아들 빈센트 빌렘 반 고흐다. 어머니 요한나로부터 백부의 그림들을 물려받은 조카는 암스테르담 시와 함께 백부의 미술관을 만들기 시작했다. 시 미술관 여기저기에 분산, 전시하던 작품은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이 설립되면서 한곳에 모였다. 그리고 그 덕에 지금 우리들은 힘들이지 않고 세기의 걸작들을 한번에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암스테르담 왕궁. (사진 이석원 기자)]
미술관을 돌아다니는 내내 세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향에 취한다. 한 층, 한 층 계단을 오를 때마다 고통 속에서도 환희를 만들어낸 고흐의 물감 냄새에 정신이 혼미해진다. 네덜란드와 벨기에 시절 시커먼 석탄 냄새로 시작해 가난한 농민들의 힘겨운 삶으로 옮겨간 붓질, 그리고 파리를 거쳐 프로방스의 빛을 쫓아간 아를과 정신병원에 갇힌 생 레미, 결국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와서 자신의 머리에 총을 쏘았던 그 10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세월이지만 찬란한 빛으로 살다 간 고흐의 숨결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곳. [암스테르담의 상징인 ‘I amsterdam’ 조형물. (사진 이석원 기자)]
사실 고흐는 암스테르담과는 거의 인연이 없다. 신학대 진학을 위해 잠시 머문 적은 있지만 화가 빈센트와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여 점의 회화와 500여 점의 소묘, 그리고 750여 점의 편지 등의 기록까지 사실상 고흐의 거의 모든 것이 암스테르담에 있다. 어떤 이들은 억울해한다. 고흐가 그 고통의 시간 속에서 허덕이고 있을 때 아무런 위로나 안식이 되지 못하던 암스테르담이 지금은 고흐 덕분에 지나치게 배가 부르고 있다고.
또 어떤 이들은 고흐의 그림 한 점 사주지 않았던 암스테르담은 비싼 관람료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도 외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조카와 암스테르담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우리는 고흐의 자취를 찾아 더 많이 방황하고 걸어야 했을 것이라며 고마워도 한다.
렘브란트를 찾아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을 찾고, 빈센트의 향기를 좇아 반 고흐 미술관을 만끽한다고 해서 암스테르담을 다 봤다고 할 수는 없다. 도시를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숱한 운하들을 따라 물길도 경험하고, 하이네켄 공장에서 세계 최고의 맥주 맛도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은 호기 어리고 자신만만한 렘브란트와 평생 지독한 가난에 피해의식과 정신분열증까지 앓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을 남겨준 고흐에게 바쳐진 도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도 암스테르담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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