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국정기획자문위원장은 지난 5월 15일 공정거래위원회 업무보고에서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설명하며 ‘상속자의 나라’라고 일침을 가했다.
이어 그는 “정권 초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올해 세법 개정안에 상속·증여세 부담 강화 방안을 담을 것이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가 현 정부에서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역할을 맡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결코 가볍게 넘길 말이 아니다.
앞서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고액 상속 및 증여재산에 세금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하 상증법)’ 일부 개정안을 지난 3월 8일 대표 발의한 바 있다. 이 법안은 이른바 ‘슈퍼상속세법’으로도 불리고 있다.
현행 상증법의 최고세율은 과세표준이 30억 원을 초과할 경우 50%의 세금을 부과하고 있는데, 과세표준 50억 원 초과 구간을 신설해 현행 50%의 최고세율을 60%로 인상하는 것이 법안의 요지다.
이 법안의 타깃은 대한민국의 극소수 슈퍼 부자다. 2015년 기준으로 상속세 176명, 증여세 404명을 포함해 총 580명이 이 법안의 조준경 안에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비용 추계에 따르면 이 법안이 통과될 경우 연평균 7687억 원, 향후 5년간 총 3조8433억 원의 세수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부자 증세는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의원들에 의해 좀 더 구체화되고 있다.
국정기획자문위원회 자문위원인 김정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 6월 5일 최고세율 구간을 3억 원으로, 최고세율을 42%로 조정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일부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으며, 같은 달 7일 양승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7억 원 이상 구간에 50%, 10억 원 이상 구간에 60%의 소득세율을 적용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일부 개정안을 발의하는 등 고소득자를 겨냥한 증세 고삐를 숨 가쁘게 조이고 있다.
◆부자 증세 주 타깃은 상속·증여세?
정권 초기부터 증세를 화두로 내걸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일까. 소득세와 법인세, 상속·증여세 등 직접세를 강화해 세수를 늘리겠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후보 시절 공약은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며 숨 고르기에 들어간 상태다.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6월 15일 취임 이후 가진 첫 기자간담회에서 “대통령 공약 사항 이행 등 재원 조달에 대해 여러 채널에서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면서도 “소득세와 법인세 명목세율 인상까지는 현재로서는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내년 6월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정권 초기부터 ‘증세 카드’를 꺼내 들기에 적잖이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일자리 정책 등 ‘문재인 노믹스’를 완성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중·장기적인 증세 로드맵’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정부에서 국민 여론을 업고 상대적으로 조세 저항이 적은 상속·증여세 강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이유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세법 개정을 통해 연평균 6조3000억 원, 5년간 31조5000억 원을 조달하겠다는 구상을 갖고 있는데 주로 거론되고 있는 방안이 바로 상속·증여세 신고세액공제의 축소(7%→3%) 또는 폐지다.
신고세액공제는 1982년 세원 파악을 위해 한시적으로 도입된 제도인데 상속·증여세를 자진 신고 시 10%의 세액을 공제해주었는데 지난해 세법 개정을 통해 올해 1월부터 공제율을 7%로 축소했다.
또 현행 30억 원으로 돼 있는 상속세 최고세율(50%) 과표 구간을 20억 원 초과로 조정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기획재정부는 신고세액공제율과 최고세율 과표 구간의 조정이 이뤄지면 연간 2900억~4000억 원의 추가 세수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더불어 과세표준 50억 원 초과, 최고세율 60% 신설하는 방안과 가업상속공제를 축소(매출액 3000억 원→2000억 원, 재산가액 100%→70%, 부모의 가업영위기간에 따른 공제한도 10년 이상 200억 원→100억 원, 15년 이상 300억 원→150억 원)하거나 폐지하는 방안도 여전히 거론되고 있다.
이 같은 상속·증여세 강화 방안은 6월 29일 ‘상속·증여세 공청회’ 등을 거쳐 의견을 수렴한 뒤 이를 토대로 7월경에 정부의 세법 개정안에 담길 것으로 보인다.
관련 전문가들은 정부에서 전체 세수의 1~2%에 불과한 상속·증여세를 강화하려는 것은 세수 증대 효과보다는 부자 증세의 상징성에 무게를 둔 행보로 보고 있다.
사실 상속·증여세는 여론의 집중도에 비해 재정 확보 효과는 적은 세금이다. 세수 증대를 위해서는 세금 누수를 방지하는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고의로 신고를 하지 않거나 내야 할 액수보다 적게 내는 세금의 규모를 나타내는 ‘택스 갭(tax gap)’의 경우 2011년 기준으로 부가가치세가 11조7000억 원으로 가장 컸으며, 소득세(8조302억 원), 법인세(5조9260억 원) 등의 순이었다. 상속·증여세는 9646억 원으로 상대적으로 적었다.
세금 공백 비율은 상속·증여세가 가장 컸다. 상속·증여세는 3조6148억 원이 부과돼 기한 내 신고세액은 2조7816억 원으로 택스 갭은 9646억 원(과소납부 갭 1314억 원 포함, 26.7%)이었다. 별다른 세제 개편 없이 세금만 제대로 걷었어도 4분의 1 이상의 세수를 추가로 확보할 수 있었다는 소리다. ◆고령화 닮은 한·일, 상속·증여 지원은 딴 판
국내 상속세는 최고세율이 50%다. 최대주주 주식에 대한 할증 평가까지 더하면 최고 65%에 달해 전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다. 한국과 함께 용호상박의 상속세율을 자랑하는 곳이 바로 일본(최고 상속세율 50%)이다. 다만 일본의 경우 최대주주 주식에 대한 상속세 할증은 하지 않는다.
세계 최초로 1972년 상속·증여세를 폐지한 캐나다, 1984년까지 단계적으로 폐지한 호주, 2005년 상속·증여세를 모두 폐지한 스웨덴, 상속세가 아예 없는 홍콩이나 싱가포르 등과 비교하면 두 나라의 상속세 과세 의지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정부의 과세 포지션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상속·증여세에 대한 감세는 부자 감세라는 인식이 강한 반면 상속세를 폐지한 나라에서는 기업들의 조세 회피 유인이 줄고, 가족기업에 대한 투자가 늘면서 장기적으로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됐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한국과 일본의 경우 세계 유례없는 고령화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상속·증여를 바라보는 시선은 상이하다. 한국은 부자들의 불로소득이라는 인식을 강하게 갖고 있는 반면 일본은 세대 간 소득이전이라는 틀로 접근한다.
이는 그대로 정부의 과세 포지션으로 이어진다. 한국은 지난해 상속·증여세를 자진 신고할 경우 일정 부분 세액을 줄여주는 신고세액공제율을 10%에서 7%로 축소하고 이를 3% 내지 폐지하는 방안이 모색되고 있는데, 일본은 60세 이상 부모가 20세 이상의 자녀와 손자에게 재산을 생전에 물려주면 증여받을 당시 냈던 증여세를 상속 시 공제해주는 제도를 시행하며 상반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일본은 조기 증여를 유도하고 기업 상속 분쟁을 차단하기 위해 40년 만에 대대적인 상속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유류분(遺留分: 상속인들에게 보장된 최소한의 상속 지분)을 손보려 하는 대목은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유류분은 상속인들이 법률상 반드시 취득하도록 보장한 상속재산인데 이를 두고 피상속인 사후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가장 민감한 부분은 유류분 청구 때 상속에 포함되는 증여를 어느 시기까지 포함할지 여부다. 우리나라의 경우 공동상속인의 증여재산은 그 증여가 이뤄진 시기를 묻지 않고 모두 유류분 산정을 위한 기초재산에 산입하도록 하고 있어 사실상 무제한으로 허용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은 상속에 포함하는 재산의 증여 기간을 사망 전 5년 이내로 제한토록 하며 유류분 산정을 둘러싼 상속인 간의 불필요한 신경전을 최소화했다.
자신의 소유 주식 90%(당시 평가액 180억 원)를 선의로 모교에 기부했다가 기부액보다 많은 증여세(225억 원, 연체 가산세 포함) 폭탄을 맞아 논란을 일으켰던 황필상 수원 교차로 대표의 사건이 최근 대법원까지 가는 지루한 법정 공방 끝에 과세의 부당성을 인정받았듯이 공익법인을 대하는 태도도 천지차이다.
한국에서는 공익법인제도가 재벌들의 편법적인 경영권 승계 및 재산 세습에 악용되고 있다고 봐 공익법인에 대한 주식 기부는 5%(성실 공익법인 10%)까지 비과세를 허용하고 있는데 일본은 50%까지 상한선을 둬 선의의 기부를 독려하는 분위기다.
일본은 기업들의 경영승계를 위해서도 팔을 걷어붙였다. 지난해 일본은 ‘경영승계 원활화법’을 통해 친족 이외 후계자도 회사 주식을 시가보다 싸게 인수할 수 있도록 했으며, 상속세 공제를 받기 위해 상속·증여 후 5년간 고용을 ‘매년 80% 이상’ 유지해야 하는 의무조항을 5년간 ‘평균 80% 이상’ 유지하면 되도록 완화했다.
하지만 한국은 매출 3000억 원 이하 중소·중견기업에 대해 500억 원 한도에서 상속세 과세가액을 공제해주고 있는데 상속받은 이후 10년간 가업에 종사해야 하고 직원 수를 줄일 수 없도록 사후 규정을 두는 등 요건이 까다로워 공제 혜택을 보기가 쉽지 않다.
더구나 가업상속공제를 바라보는 시선도 곱지 않다. 수백억 원대 재산을 세금 없이 물려주는 것은 ‘세금 없는 부의 대물림’과 다를 바 없다는 시각이다.
이 같은 따가운 눈총은 기업 경영인들에게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중소기업청과 한국중견기업연합회가 올해 1월에 내놓은 ‘2016년 중견기업 실태조사’에 따르면 중견기업의 78.2%는 가업승계 계획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가업승계 애로사항으로는 상속·증여세 조세 부담(72.2%)을 가장 우선적으로 꼽았고, 이어 복잡한 지분 구조(8.8%), 엄격한 가업승계 요건(5.6%) 순으로 답했다.
일본의 200년 이상 장수기업은 3113개이고, 한국은 100년 이상 기업 7개사(두산, 동화약품, 신한은행, 우리은행, 몽고식품, 광장, 보진재)에 불과하다. 양국 정부의 인식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현주소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 / 일러스트 허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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