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우재룡 한국은퇴연구소장]
우리 부부는 겨울마다 한두 달씩 해외여행을 간다. 직장인들은 노후에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여행이라고 말한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도 호주머니 사정이 가능하면 자주 여행을 가고 싶다고 한다. 이렇듯 여행은 모든 사람이 선망하는 일이다. 아내와 나는 춥고 할 일이 별로 없는 겨울은 해외에서 지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보름 이상 해외에 머무는 여행을 롱스테이(long-stay) 여행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롱스테이 전문 여행사가 개최하는 설명회에 중장년들이 수백 명씩 모이는 호황을 맞이하고 있다. 한때 나도 중년들의 모임에서 롱스테이 여행사를 창업하자고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우리 부부가 롱스테이 여행에 나선 것은 이번으로 세 번째다. 그동안 2014년에 미얀마, 2015년에 태국을 다녀왔다.
우리 부부의 여행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첫째, 가능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다닌다. 항공권은 마일리지로 무료로 끊거나 저가 비행기를 이용한다. 또한 적어도 3~4개월 이전에 얼리버드로 할인해서 발권한다.
둘째, 숙소는 1만~2만 원대로 최저가는 아니지만 비싸지 않은 곳을 이용한다. 숙소 예약용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서 저렴하면서도 깨끗한 곳을 찾아 장기간 머문다.
셋째, 한 지역에 최소한 일주일 이상 머물면서 현지인들의 생활을 깊이 느낀다. 식사는 현지인들이 먹는 로컬 식당을 찾아다니고 가능하다면 시장에서 장을 봐서 숙소에서 해 먹기도 한다.
넷째, 미리 상세한 여행 일정을 세우지 않는다. 여행가이드 북을 보면서 대략 계획을 세우지만 대부분은 현지에 가서 주위에 물어보면서 그때그때 결정한다. 만약 일정이 비면 카페나 숙소에서 독서나 휴식을 한다.
다섯째, 여행 대상 국가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알아보고 간다. 현지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에 역사, 경제, 종교, 생활습관을 알기 위해 책, 다큐멘터리, 여행기를 조금씩 읽어보고 간다.
2월 초 드디어 인도네시아 발리로 출발했다. 우리는 스미냑 지역에 작은 숙소를 잡고 일주일 정도 머물렀다. 매일 스미냑 전역을 거의 걸어서 돌아다녔다. 해변, 뒷골목, 시장을 다니다 지치면 카페나 음식점에 들어가서 쉬면서 독서를 하거나 음악을 듣는다. 발리 시내는 생각보다 너무 복잡했다. 해변 말고는 걸어 다니기 좋은 공원이나 주택가는 없었다. 4일 만에 스미냑을 떠나 우붓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우붓은 발리 시내에서 한두 시간 떨어진 산중턱에 있는 작은 도시다. 화가들이 많이 모여 있는 예술인 마을로 요가, 명상을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드는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나와 아내는 투어나 관광보다는 걷는 것을 더 좋아한다. 우리는 매일 우붓 곳곳을 걸어 다녔다. 천천히 걸으면서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웃고 대화하고 사람 사는 것을 보는 게 가장 즐겁다. 이번 여행에는 구글 지도(Google Map)를 휴대전화에 다운받아서 갔는데, 세상에 논두렁길까지 정확하게 알려준다. 여행자들이 한 명도 없는 시골구석을 구글 지도를 보면서 걸으니 현지인들이 오히려 놀라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며 다가온다.
우붓에서의 숙소는 호텔이 아니라 홈스테이를 이용했다. 자신이 사는 집에서 방 몇 개를 여행자들에게 세를 주는 방식이다. 주인 부부, 중학생과 고등학생 자녀들, 옆방에 머무는 여행자들과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여행은 눈에서 가슴으로 가는 여정이라고 했듯이 관광명소보다는 사람들에게서 더 많은 감흥을 느낀다. 공부보다 게임이 더 좋고, 대학을 가지 않겠다는 중학생 딸을 아무 잔소리 없이 미소로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에서 한국과 다른 가치관을 느낀다.
일주일을 발리에서 머문 후 우리는 비행기로 발리 옆의 롬복이라는 섬으로 이동했다. 발리보다 덜 발전해서 자연의 모습을 더 잘 간직하고 있다는 곳이다. 1인당 2만 원 정도인 저가 비행기를 이용해서 롬복으로 가서 마타람이라는 도시에 며칠 머물렀다. 여기는 관광명소가 없어서 여행객이 거의 없는 지방도시다. 우리 부부에게는 오히려 이런 곳이 더 여행하기 좋은 곳이다. 가장 먼저 재래시장에 들러 열대과일을 잔뜩 먹은 뒤 시내와 해변을 구석구석 걸어 다녔다.
며칠 후 롬복 북서부 쪽 끝에 있는 작은 섬으로 이동했다. 길리 트라왕안이라는 둘레가 6km 정도 되는 섬으로 젊은이들이 다이빙과 스노클링을 하기 위해 즐겨 찾는 곳이다. 현지인들이 타는 로컬 보트를 이용해서 우여곡절 끝에 섬에 도착했다. 숙소는 수영장이 딸려 있는 작은 호텔을 이용하는 호사를 누리기로 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섬을 한 바퀴씩 걸어서 돌고, 해변에 수건을 깔고 누워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지냈다. 그렇게 걷고 있는데 해변가 공사장에서 한국말이 들린다.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걸어볼까 하다가 며칠간 지켜만 보고 말았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TV를 보니 <윤식당>이라는 프로그램을 거기서 촬영해서 방영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이 여행 갔다 온 곳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하지 못하더니 이제는 ‘윤식당’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놀라면서 관심을 보인다.
아내가 불현듯 한국으로 빨리 돌아가자고 말한다. 이제는 여행이 옛날처럼 흥미롭지 않다고 한다. 사실 우리 부부는 지난해부터 귀촌을 준비하고 있다. 아내의 고향에서 친정 부모가 농사짓던 묵은 땅을 갈아서 나무와 화초를 심고 있다. 아내는 고향의 땅이 해외 어디보다 더 정겹고 마음에 든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나라를 여행했지만 자신의 고향으로 귀촌을 결심한 후에는 그곳이 더 좋다고 한다. 아내는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똑같고 경치보다는 제도, 종교, 관습에 억매여 사는 사람의 모습이 더 눈에 많이 들어온다고 한다. 그래서 원래 한 달 예정했던 여행은 일주일 일찍 끝이 났다. 귀국에서 정리해보니 총 비용은 200만 원 정도 들었다. 한 사람은 마일리지 항공권을 이용했지만 현지의 높은 물가를 감안하면 이 정도 비용이면 상당히 선방했다.
은퇴 후 여행은 단순한 패키지여행을 넘어 좀 더 진지할 필요가 있다. 현지 생활을 충분하게 이해할 만큼 한 군데서 오랫동안 머무는 롱스테이가 좋은 대안이다. 그래야 관광명소보다 더 의미 있고 감동스러운 사람의 삶이 보인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현지인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저렴한 숙소와 식사를 이용해야 한다. 좀 더 느리게 지내고, 경치보다는 사람을 보며, 불편한 여행을 지향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은퇴 여행이다.
우재룡 한국은퇴연구소장은…
국내 은퇴설계 대중화에 기여한 은퇴 분야의 최고 전문가다. 삼성생명 은퇴연구소장을 지냈으며, 현재 한국은퇴연구소장으로 재직 중이다. 수천 명의 은퇴자를 컨설팅한 경험을 바탕으로 <재무설계 무작정 따라하기>, <긴 인생 당당한 노후 펀드투자와 동행하라>, <오늘부터 준비하는 행복한 100년 플랜>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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