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웰에이징연구센터장·석좌교수]
그리스 신화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신은 하데스다. 티탄족 중 시간을 관장하는 크로노스의 자식으로 형제인 제우스, 포세이돈과 힘을 합쳐서 10년에 걸친 싸움으로 세상을 정복한 다음, 제우스는 하늘, 포세이돈은 바다, 하데스는 명계를 지배하게 됐다.
죽은 자의 망령은 헤르메스에 의해서 명계에 인도되고, 생자와 사자를 가르는 스티쿠스 강 또는 아켈론 강을 건넌다. 이후 그곳을 지키는 뱃사공 카론에게 인계되면, 하데스의 집에서 판관에 의해 생전의 소행에 대해서 재판을 받고, 대부분의 망령은 부조화의 들판에서 방황하게 되며, 신들의 은총을 입은 영웅이나 선한 사람은 엘리시온(Elysion)의 땅에서 지복의 생을 영위하고, 극악한 자는 나락으로 떠밀려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고 상상했다.
우리나라에도 저승사자가 있어 염라대왕의 명을 받아 죽어야 할 자를 찾아가 저승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이때 그리스 신화에서도, 우리 신화에서도 죽은 자에게 노잣돈을 주어야 카론이나 저승사자에게 구박받지 않는다고 했다. 이러한 불가항력의 신들에 의해 결정되는 죽음이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어느 누구나 잘 숙지해 왔고, 차라리 어떻게 하면 저승사자의 눈을 피하거나 설득해 지연시킬 수 있을까 고민해 온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삼천갑자 동박삭(東方朔)’의 전설이다.
흔히 말하는 3대 거짓말로 장사꾼이 손해보고 판다는 말, 나이든 처녀가 시집가기 싫다는 말, 노인이 죽고 싶다는 말이 있지만 요즈음에도 이 말들이 거짓말인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100세 정도까지 사신 분들이 언제까지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매우 큰 관심거리였다. 정말 이런 장수인들은 아직도 생에 대한 집착이 클까? 아니면 달관하고 있을까?
전남 곡성군의 어느 백세인을 만났을 때, 대문을 들어서자 입구에 뻔질뻔질 윤이 나는 관 비슷한 것이 세워져 있어 아들에게 무엇인지 물었다. 바로 관이었다. 백세인인 아버지가 칠십이 되셨을 때 마침 뒷산에 좋은 나무가 있어 관을 짜서 준비해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을 짜 둔 뒤 벌써 오랜 세월이 지나 관이 썩지 않게 매년 관 안팎에 기름칠을 해 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어르신인 백세인은 그러한 자식들이 관을 소중하게 관리하는 모습을 보면서 만족스러워하신다고 했다.
더한 경우는 전북 진안군에서 만난 107세 할머니의 경우다. 자식들이 할머니 나이 육십이 됐을 무렵 좋은 나무로 관을 짜 두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러고 나서 20년이 지나 버려 관이 썩게 됐다고 했다. 그래서 자식들이 이번에는 석재로 관을 다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을 숨겨 놓지 않고 곳간 옆에 놓아두었다. 죽으면 들어갈 관을 아무런 망설임 없이 가족들이 모두 보는 자리에 두고 담담하게 바라보고 사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경계가 없이 당연하고 담담하게 살고 있는 태도를 가족이나 당사자들이 모두 지니고 있었다.
2005년 당시 우리나라 최고령자로 뽑힌 대전의 임옥군 할머니는 110세(1894년생)셨다. 임 할머니는 백수연(白壽宴) 때 춤추고 노래까지 하셨다고 했다. 더욱이 조사팀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머리까지 가다듬고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우리를 맞았다. 팔십까지 충남 홍성에서 살다가 팔십에 큰며느리 집으로 왔는데, 이제는 며느리도 팔십이 넘어 몸이 불편해 오십 넘은 손주며느리가 모시고 있었다. 지금도 통장관리를 직접하고 계셨고, 며느리가 목욕을 시켜주면 1만 원씩 용돈을 준다고 했다. 할머니의 별명이 ‘오뚜기할매’였으며, 할머니의 건강은 타고나신 것이라고 가족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할머니의 요즘 제일 큰 걱정거리는 큰며느리의 건강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조사팀에게 “하느님이 날 천국으로 데리고 가는 것을 잊었나 봐” 하며 하소연을 했다.
담담하게 저승사자를 기다리고 있는 백세인의 모습은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다. 전남 담양군에서 만난 백세 할머니도 매우 건강하셨다. 아직도 며느리를 구박하고 동네일에 참견도 하고 있기에 으레 생에 대한 집착이 클 것이라고 생각해 할머니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면서 장수를 축수하고 더 오래 건강하게 사시라고 인사를 하자 할머니의 답은 의외였다. “그런 소리 하지 마소. 저승사자가 나를 잊어버린 모양이네. 제발 저승사자에게 나 데려가라고 부탁 좀 전해주게.” 오히려 차라리 어서 세상을 떠날 수 있도록 부탁하는 것이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장수에 대한 소망이 매우 컸었다. 그래서 사람으로서 최고의 복으로 오복(五福)인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을, 그리고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여섯 가지 금기(六極)로 단명, 질병, 근심, 가난, 죄악, 쇠약을 새겨 왔다. 인간에게 중요한 행복의 조건으로 무엇보다도 장수가 첫째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고, 불행의 첫째도 단명임을 명시했다. 그래서 일상생활의 도구인 숟가락, 젓가락, 밥그릇, 밥상, 상보, 베개, 이불, 촛대, 장롱 할 것 없이 모두 수(壽)와 복(福)자 문양으로 장식했고, 해, 산, 물, 돌, 구름(또는 달), 소나무, 불로초, 거북, 학, 사슴으로 구성된 십장생 병풍을 집집마다 두었다. 또한 가족이나 친지의 장수를 축원하기 위해 무병장수, 만수무강, 수복강령, 연년익수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상례였다.
따라서 장수는 사람들의 기본 속성이고 당연한 바람이기 때문에 더 오래 사는 것에 대한 집념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는데, 백세인들의 경우에는 자신들이 이미 충분히 살았음을 깨닫고 적절하게 떠나야 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사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장수인들의 사생관은 이미 달관의 경지에 있었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들이 살 만큼 살았을 때는 더 살겠다는 집착보다는 자족감과 세상을 떠날 수 있다는 담담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상철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웰에이징연구센터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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