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법제화는 유야무야 되고 말았지만 고령화가 심각한 한국에서는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들 수밖에 없는 카드라는 게 중론이다.
지난 2014년 법무부 산하 상속법 개정특별위원회가 그 해 1월에 내놓은 최종안에 담긴 배우자 선취분 조항은 상속재산의 50%를 배우자에게 먼저 주고, 나머지 재산을 자식과 나눠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기존 법 규정에서는 배우자가 직계비속의 상속분보다 5할을 더 가산해 받아 배우자가 1.5, 자식들은 1씩을 받는다. 이 경우 100억 원의 상속분이 있다면 배우자는 60억 원, 자녀는 40억 원을 배분받는 것이 된다. 자녀들이 많을수록 배우자의 상속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개정안이 통과됐다면 배우자는 50억 원을 선취하고, 나머지 50억 원을 1.5:1의 비율로 나눠 자녀가 하나밖에 없는 경우 배우자는 80억 원, 자녀는 20억 원을 받을 수 있게 됐었다.
배우자 선취분 문제가 공론화됐던 이유는 평균수명의 연장에 따른 고령화와 무관치 않다. 평균수명이 길어짐에 따라 부부가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기간이 과거에 비해 늘었고, 자녀와 동거하지 않고 부부만 따로 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는 것.
이로 인해 배우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는데 일방 배우자가 사망할 경우 생존배우자의 생활 보장 문제가 불거질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던 것이다. 한마디로 노년층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 차원에서 추진된 제도가 배우자 선취분 제도였다.
이와 비슷한 취지로 앞서 지난 2005년 이계경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배우자 일방이 사망할 시 생존배우자로 하여금 혼인 중 취득한 재산에 대해 기여도에 따라 분할청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부부재산제 개정안을 제출했지만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또 2006년에도 혼인 중 재산분할이라는 제도를 도입하고 혼인 중 재산분할을 받지 않은 배우자의 상속분을 일률적으로 5할로 하고, 혼인 중 재산분할을 받은 배우자의 상속분은 공동상속인과 균분하도록 입법을 추진했지만 결국 무산됐다.
이처럼 배우자 상속분 확대를 추진하려는 입법이 번번이 무산된 것은 재계에서 경영권 승계에 어려움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명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재계의 이 같은 주장은 일면 타당했을까? ◆배우자 선취분 둘러싼 불편한 진실
재계의 주장은 상속재산에서 배우자가 절반을 가져가도록 선취분을 둘 경우 후계자에 대한 가업승계는 어려워지고, 기업지배구조 자체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자산 승계율이 낮은 기업의 경우 대주주 의도와는 다르게 자녀가 아닌 배우자에게 상당한 지분이 주어지고, 혹 배우자와 이혼을 하게 될 경우 기업 소유권도 넘어갈 수 있다는 논리다.
재계에는 재혼 오너들이 상당수 있다.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등이 대표적인데 엄살을 조금 더 보태면 자녀들에게 아직 승계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황에서 배우자 선취분 제도가 도입되면 자녀세대로의 원활한 가업승계는 상당 부분 제동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시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같은 배우자 선취분 논란은 기업 오너들이 상속·증여 문제에 관심을 높이는 계기가 됐다. 대형 로펌이나 회계법인, 금융사에서 내부적으로 전문 상속팀을 만들어 VIP 고객에 대한 컨설팅을 강화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하지만 재계의 이 같은 입장은 배우자 선취분에 대한 다소 과장된 거부감이라는 주장도 만만치 않다. 우리나라의 상속세 최고세율은 50%이고, 최대주주 주식에 대한 할증까지 더해지면 최고세율이 65%까지 치솟는다. 사실 애당초 가업승계는 세금이라는 벽에 부딪혀 있었던 셈이다.
또한 유류분(遺留分: 상속인들에게 보장된 최소한의 상속 지분)이라는 장애물도 있다. 자녀가 많다면 애당초 기업 오너가 보유한 회사 주식을 한 사람에게 몰아줘 경영권을 물려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마치 배우자 선취분 제도 때문에 가업승계를 하기 힘들어진다는 논리는 구시대적인 혈족 상속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다.
사실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남녀균분 상속이 대원칙이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재산상속을 호주상속과 연결 지어 장자상속이 관습법처럼 통용됐고, 이어 민법이 제정되면서 배우자 상속분의 경우 직계비속의 상속분보다 5할을 더 가산하는 방식으로 규정된 것이다.
부부가 이혼을 하면 재산을 반으로 나누는데 사랑하는 배우자가 사망하게 되면 배우자의 상속분을 엄격히 제한해 자식들과 그 재산을 다시 나누도록 하는 것은 다소 불합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김상용 부산대 법대 부교수는 ‘자녀의 유류분권과 배우자 상속분에 관한 입법론적 고찰’이라는 논문에서 “부부 재산관계의 청산이라는 면에서 볼 때 이혼에 의해서 혼인이 해소되는 경우와 사망으로 인해 혼인이 해소되는 경우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설명되기 어렵다”며 “사망으로 인해 혼인이 해소될 때에도 부부 사이의 실질적인 공유관계를 청산해 원래 각자에게 속한 것을 각자에게 귀속시키는 것이 논리적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가업승계 문제와 상관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고령화에 따른 생존배우자의 생활 보장 문제가 시급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1960년 민법 시행 당시 평균수명은 여자가 53.7세, 남자가 52.4세였지만 통계청의 추정치로 보면 2020년 기준으로 평균수명은 남자 77.5세, 여자 84.1세로 추정된다.
남편이 죽고 난 뒤에서 여성 배우자가 7년 정도는 더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고령화로 인해 상속 개시 시점은 점점 늦춰져 최근에는 자녀들이 40~50대에 이르러 상속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독립해 경제력을 갖추고 생계를 유지하는 자녀들에 비해 고령의 생존배우자가 경제력에 있어 더 취약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세계는 지금 배우자 상속권 강화 중
생존배우자의 상속분 확대는 전 세계적인 추세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고령화로 인해 기존 상속제도가 자녀 중심에서 부부 중심으로 바뀌고 있다는 진단이다.
미국의 경우 생존배우자의 상속 지분을 먼저 떼어 놓은 후 남는 부분을 피상속인의 자녀 또는 혈족에게 배분하고 있으며, 캘리포니아 주를 비롯한 미국 남서부 지역에서는 혼인 기간 중 취득한 재산은 원칙적으로 부부의 공동재산으로 보고 각자 2분의 1씩 지분을 갖도록 하고 있다.
유럽의 상당수 국가들은 법정부부재산제로서 혼인 중에는 별산제를 유지하되 혼인 해소 시에는 혼인 중에 증가한 재산을 절반으로 분할하는 형태의 부부재산제를 채택하고 있다.
사망으로 혼인이 해소되는 때에도 생존배우자는 사망한 배우자의 재산으로부터 우선 절반에 대해 분할을 청구할 수 있으며, 이 부분을 공제한 나머지 재산이 상속재산이 된다. 예를 들어 스위스의 경우 부부는 혼인 전부터 가지고 있던 고유재산과 혼인 중에 취득한 특유재산을 원칙적으로 각자 사용, 수익, 처분한다. 심지어 채무에 대해서도 각자 재산으로 책임진다.
이혼이나 배우자 일방의 사망으로 인해 혼인이 해소된 때에는 부부 각자가 혼인 중에 취득한 재산의 액수에서 채무를 공제한 후 남은 재산을 혼인 중에 취득한 재산으로 보고, 부부 쌍방이 각각 혼인 중에 취득한 재산의 가액을 더한 다음 이를 절반으로 분할한다.
유럽의 입법례를 보면 그 현상은 뚜렷하다. 1987년 개정된 스웨덴 상속법은 피상속인에게 배우자와 자녀가 있는 경우 배우자가 단독 상속인이 된다고 규정했다. 다만 생존배우자는 피상속인으로부터 상속한 재산을 유언에 의해 처분할 수 없으며, 생존배우자가 사망한 때에는 자녀들이 그 이전에 사망한 피상속인의 상속재산에 대한 상속권을 갖는다.
2003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네덜란드 신민법에 의하면 배우자는 피상속인의 자녀가 있는 경우에도 사실상 모든 상속재산을 단독으로 상속한다. 자녀에게는 상속분에 따른 금전지급청구권만 인정될 뿐이다.
단, 피상속인이 재혼해 그 자녀와 생존배우자 사이에 친자관계가 없는 때에는 곧바로 상속재산을 청구할 수 있다. 생존배우자가 친자관계가 있는 경우는 피상속인 사후 생존배우자가 재혼하는 때에도 자녀는 즉시 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내 전문가들도 앞으로 자녀보다는 노년기 생존배우자의 생활 보장이 상속법의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2014년 민법 개정 추진 당시 상속법개정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한 김상훈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는 “사실 경영권 승계를 배우자 상속분 문제와 연결시키는 것은 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며 “현재의 상속법 하에서도 피상속인이 상속재산의 반을 후계자에게 물려줄 수가 없는데 상속분의 비율로 가업승계를 해결하겠다는 것은 잘못된 접근이다”라고 강조했다.
이어 그는 “배우자 상속분을 지금보다 늘려야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법조계나 학계 모두 이견이 없으며, 단지 방법론적인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라며 “전 세계적으로도 배우자 상속분을 점차 확대하는 추세이고, 분명히 그 방향성이 맞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과거 2006년, 2014년과 같은 입법 추진 시도가 조만간 다시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고 전했다.
한용섭 기자 poem1970@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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