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현주 가든디자인스쿨 대표·<유럽의 주택 정원> 저자 유럽의 주택 정원에 대한 책을 쓰면서 그들의 정원을 방문하고 인터뷰하는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정원을 가꾸기 위해 식물원을 방문하고 정원 여행을 떠나고 스스로 작업하는 데서 기쁨을 찾고 있었다. 독일 유학 시절에 만난 한 이웃은 그리 크지 않은 국민주택을 가지고 있는데 늘 정원수를 손보거나 작은 의자에 앉아 차를 마셨다. 그렇다. 그들에게 정원은 하나의 취미를 넘어서 삶을 윤택하게 하는 생활이자 문화이자 또한 예술이었다.
서양 정원의 맥을 살펴보다
유럽인들은 그 시대의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감동과 기쁨을 정원에 담으며 향유해 왔다. 먼저 서양 정원의 기원은 이집트 문명과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 정원은 기원전 15세기경 나일 강 유역의 테베(Thebes) 지역 벽화에 그려진 귀족의 저택 정원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앙에 물고기와 수련이 있는 연못과 물가의 파피루스, 그리고 대추야자와 무화과나무가 있는 정원이 그려져 있다. 비슷한 시기에 유프라테스 강변의 바빌로니아에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 정원(hanging garden)의 유적이 남아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 정원이 크게 발달하는 시기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다. 유럽은 신 중심이던 중세를 벗어나 14세기 후반부터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 시대로 발전한다. 이 시대를 탄생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메디치(Medici) 가문은 정원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한다.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메디치 가문의 귀족들은 토스카나(Toscana) 지방에 정원이 딸린 12채의 빌라와 2곳의 플레저 가든을 조성한다.
이탈리아 반도는 우리나라와 비슷한 지형으로 태백산맥에 해당하는 아펜니노(Apennino) 산맥이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고 서쪽으로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지형에서 주택인 빌라는 경사지의 약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정원은 그 아래쪽에 계단식으로 조성돼 주변의 경관을 조망하며 자연을 즐길 수 있다. 이를 노단식 정원(Terrace-dominant Architecture Style) 또는 르네상스 정원이라 부른다. 이러한 노단식 정원의 대표적인 정원은 빌라 데스테(Villa d’Este)다.
1550년 추기경 이폴리토 데스테(Ippolito d’Este)는 로마에서 북동쪽으로 40km쯤 떨어진 티볼리(Tivoli)에 대저택을 조성한다. 빌라는 산기슭에 위치하며 정원은 명확한 축을 조성하고 경사면을 4단으로 조성해 화려하고 장대하게 펼쳐진다. 이곳에는 다양한 분수와 연못이 있으며 물을 이용하는 고도의 기술이 발달한다.
먼저 프랑스인들이 이 정원에 감동한다. 15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의 지배를 둘러싸고 원정을 떠난 프랑스인들은 비록 전쟁에서는 승리하지 못했지만 이탈리아를 오가며 르네상스의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정원을 들여온다. 그리고 프랑스의 평탄한 지형에 맞게 평면 기하학식 정원(Plane Geometrical Style)으로 발전시킨다.
영국 풍경식 정원 탄생
이 시대에 대표적인 정원이 루이 14세가 22년에 걸쳐 완성한 베르사유 정원이다. 이때 정원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앙드레 르노트르(André Le Nôtre)가 함께한다. 그는 수학, 미술, 건축을 공부하고 이탈리아 여행 후 화가나 건축가보다 정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왕립 정원 설계사가 된다. 정원은 더 이상 성이나 대저택의 부분이 아니라 전체 구성에 중요한 부분이 되고 아름다운 문양의 자수화단이 정원에 펼쳐진다. 한편, 18세기 영국은 식민지 개척, 산업혁명 등으로 경제적인 여유와 함께 중산층이 늘어나면서 이들 사이 그랜드 투어(Grand Tour)라는 유럽 대륙 여행이 유행한다. 이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등을 정원들을 보게 된다.
그들은 기하학적이고 정형적인 형태, 그리고 식물을 인위적으로 다듬어 모양을 만드는 토피어리(topiary) 등을 비난하면서 정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초원의 포근한 능선, 그 아래로 흐르는 시냇물, 물가에 놓인 작은 다리 등 자연 풍경 또는 전원 풍경을 정원의 아름다움이라고 역설한다.
이러한 경향으로 영국에서는 새로운 유형의 정원인 자연 풍경식 정원(Landscape Style in Naturalism)이 시작된다. 이미 영국에 조성돼 있던 평면 기하학식의 정원도 차츰 자연 풍경식 정원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는 영국 버킹엄 셰어에 있는 스토 정원(Stowe Garden)의 변천사를 보면 자연 풍경식 정원으로 바뀌는 과정을 볼 수 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루소가 순수한 자연을 극찬하고, 독일에서는 쉴러와 괴테가 신낭만주의 운동을 펼치고 있어 영국의 정원 스타일은 프랑스와 독일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이렇게 영국의 자연 풍경식 정원은 18세기의 낭만주의 사상과 맞물려 유럽 전역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영국의 윌리엄 로빈슨(William Robinson)은 1871년 주간지 가든을 창간하고 새롭게 공급되는 신종 식물들을 소개해 정원 가꾸기의 붐을 일으킨다. 이러한 붐으로 인해 희귀한 식물은 부의 상징이 됐고, 화려한 꽃이 피는 이국 식물들은 정원 마니아들에게 크나 큰 자랑거리가 됐다. 이렇게 정원수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이를 조달하기 위해 식물 사냥꾼(plant hunter)이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겨났다. 이들은 매력적인 식물을 노리고 온갖 대륙을 누비며 식물을 채취해 유럽에 새로운 꽃들을 들여놓는다.
다양한 꽃들로 유럽 정원은 더욱 화려해지고 정원사들은 정원에 식물의 배치, 형태, 꽃과 잎의 색깔 등을 디자인하게 된다. 더욱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영국에서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를 중심으로 일어난 아트 앤드 크래프트 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은 정원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예술 운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정원 디자이너는 거투르드 지킬(Gertrude Jekyll)이다. 이전까지는 식물을 줄 맞추어 일렬로 심거나 자수화단의 장식적인 수단으로 사용했다면 그는 정원에 계절, 색, 형태, 향기 등으로 감성적인 연출을 하는 것이다.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듯 예술적인 정원을 만들었다.
지금 유럽인들이 정원에 열광하는 것은 바로 이 예술적인 정원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에서 감동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정원은 정원사가 대지에 펼쳐놓는 창조적인 예술이다.
즉 정원은 각자의 취향에 따라 자연의 아름다움을 하나씩 내 정원에 그려 넣는 것이다. 또한 그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에서 더 많은 행복과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아마 이러한 기쁨이 많은 사람들을 정원에 오래 머물게 하는 것 같다.
가볼만한 유럽의 정원들
영국, 앤 해서웨이의 코티지 가든
16세기 영국의 대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아내인 앤 해서웨이가 결혼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의 정원이다. 아직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대표적인 영국 정원(English Flower Garden)인 코티지 가든(Cottage Garden)이다. 이 정원은 스트래퍼드 어폰 에이번(Stratford-upon-Avon)에 있다. 코티지는 농가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길가에 접한 생울타리 사이의 낮은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초가지붕의 건물이 있다. 영국, 위슬리 정원
RHS 위슬리 정원(RHS Wisley Garden)은 RHS(The Royal Horticultural Society, 왕립원예협회)에서 직접 운영하는 5곳의 정원 중에 가장 규모가 큰 대표 정원이다. 넓은 부지에 영국의 전통적인 자연 풍경식 정원이 펼쳐지고 그 속에 재배원, 과수원, 그리고 모델 정원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특히 입구에 다양한 정원수와 정원 용품, 서적 등을 파는 가든센터가 있다. 영국인들도 즐겨 찾는 정원이다. 이탈리아, 이졸라 벨라
이졸라 벨라(Isola Bella)는 <아름다운 섬>이라는 뜻으로 보로메오 궁(Palazzo Borromeo)과 아름다운 정원이 있다. 이 섬은 320m×400m 정도의 규모로 이탈리아 북부 마조레 호수(Lago Maggiore)에 있다. 카를로 3세(Carlo III )는 그의 부인 이자벨라 다다(Isabella d’Adda)를 위해 바위산을 절개하고 흙을 채워 40여 년간의 공사로 정원을 조성한다. 정원은 10단의 테라스에 조각, 오벨리스크, 분수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프랑스, 모네의 정원
파리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곳에 쥐베르니(Giverny)라는 노르망디풍의 작은 마을이 있다. 이곳에 인상파 화가인 클로드 모네의 주택을 보존하는 역사 유적지가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모네의 정원’이라고 부른다. 정원에는 다양한 꽃들로 혼합 식재된 화단이 있으며 모네의 그림 <수련> 연작에서 나오는 연못이 있다. 그가 찾고자 했던 빛의 변화에 따른 색채의 조화가 물 위에 반영돼 연못 위에 펼쳐진다. 문현주 대표는…
현재 양평 농원에서 ‘가든 디자인 스쿨’을 운영하고 있으며 정원 작가다. 이론보다 유럽의 평범한 가정의 정원을 소개하는 것이 정원 문화를 알리는 방법이라 생각해 독일, 프랑스, 그리고 영국 편으로 <유럽의 주택 정원 1·2·3>을 썼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독일에서 공부했다. 서울대, 서울시립대, 신구대 등 조경설계에 대한 강의를 했고 서울여대에서 세계의 정원에 대해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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