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를은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가 모차르트를 팔아먹고 살 듯 고흐를 팔아먹고 산다. 고흐의 <밤의 카페테라스>의 그 카페는 이름을 아예 ‘카페 반 고흐’로 바꿔 성업 중이고, 강가에는 론 강에서 별이 빛나는 밤을 보려는 연인들로 북적인다. 이제는 늘 열려 있는 도개교 랑그루아 다리에는 그 다리 하나 보자고 차를 끌고 찾아오는 사람들 천지다.
고흐는 이 도시에 겨우 15개월을 머물렀다. 인근 생레미 정신요양원을 거쳐 1889년 5월 정신병이 더 깊어진 채 파리 북서쪽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떠난 고흐는 1년 뒤 숨을 거뒀다. 하지만 고흐는 빛의 도시 아를에서 혼을 실은 2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도시 곳곳에는 고대와 중세의 유적들과 함께 고흐의 체취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오직 햇빛과 색채와 향기를 쫓아 왔고, 생애 가장 아름다운 그림들을 그렸던 아를에서 고흐는 행복했을까? 그의 자취를 쫓는 우리는 지금 이렇게 행복한데.
피카소의 스승, 세잔을 찾아
엑상프로방스로
폴 세잔. 미술사는 그를 ‘근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피카소는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아버지와도 같다”고 했다. 그런 세잔이 나고 자라고 죽어간 곳이 바로 엑상프로방스(Aix-en-Provence)다. 아를에서 남동쪽으로 달리다 보면 프로방스의 그윽한 향기를 머금은 크고 작은 마을을 지나게 된다. 빨리 움직이면 볼 수 없는 풍경들이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엑상프로방스는 미라보 거리의 투명한 플라타너스 나무와 수십 발자국마다 새로 등장하는 크고 작은 분수들의 영롱한 물빛들이 찬란하다. 그리고 곳곳에 세잔의 향기를 담은 거리가 있고, 그가 커피를 마시며 사색하던 카페가 있고, 죽음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부터 87점이나 그렸던 생트 빅투아르 산이 있다.
세잔은 아버지의 반대를 물리치고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다가 6개월 만에 때려치우고 엑상프로방스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리고는 다시 파리로. 비록 사는 동안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나중에는 화가들 모두의 스승이 됐다고 하니, 그나마 죽을 때까지 처참한 가난과 고독, 정신병 속에서 고통받았던 고흐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었으리라. 그래서일까. 엑상프로방스의 색은 아를보다 더 밝다.
미라보 거리 끄트머리쯤 녹색 차양의 카페 레 되 가르송(Les Deux Garçons)은 1792년부터 이 자리에서 영업을 했다. 세잔이 매일 저녁 들러 커피를 마시던 단골 카페다. 평생의 절친 에밀 졸라와 함께 미술과 문학, 정치와 혁명을 이야기하던 곳. 이후 이 카페에는 피카소와 마티스는 물론 사르트르와 에디트 피아프, 그리고 알랭 들롱까지 숱한 유명인들이 찾았다. 실내에는 피카소, 마티스 등이 그려 놓고 간 진품 그림들이 그냥 장식처럼 걸려 있다.
카페 레 되 가르송에서 천천히 북쪽으로 걸음을 옮겨 골목 구경을 시작한다. 분수가 있는 작은 광장을 지나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카페와 레스토랑, 그리고 향기로운 빵집을 지나다 보면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의 고색창연한 생 소뵈르 대성당(Cathédrale Saint-Sauveur)을 만난다. 이 성당에서 1906년 10월 22일 세잔의 장례식이 열렸다. 다시 제법 가파른 언덕이 나오고, 30여 분을 올라 숨이 헐떡이기 시작할 무렵 등장하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집, 세잔의 아틀리에(Atelier Ceacutezanne)다. 그가 죽기 전까지 이곳에서 실제 그림을 그렸던 공간이다. 이 작고 평범한 2층 건물은 세잔을 추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이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우울증과 자괴감에 고통받았고, 주류 미술계에서 대접도 받지 못하며 고통스러운 파리 생활을 하던 그에게 고향 엑상프로방스는 아무것도 없는 듯 모든 것이 있었고, 안식을 찾아서 들른 게 아닌 자신의 본질이 있어서 안식이 됐던 곳이었다. 그 깊은 푸름이 가득한 엑상프로방스에는 세잔의 향기가 늘 배어 있다.
샤갈을 찾아 떠나는 길은 멀다. 엑상프로방스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샤갈의 마을’ 생폴드방스(Saint paul de vence)가 있다. 해발 150m에 세워진 중세의 요새 도시. 그러나 유럽의 화가들이 가장 사랑한 곳. 그리고 95세의 샤갈이 평안한 영면에 든 곳 생폴드방스는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온 후에 거짓말처럼 눈앞에 드러난다.
이방인 샤갈을 영원한 친구로 만들어 준 생폴드방스
벨라루스에서 태어난 마르크 샤갈은 일찌감치 화가로 성공을 거뒀다. 러시아와 파리, 그리고 미국을 오가며 수많은 명화들을 남겼다. 살아 있을 때 가장 성공한 화가 중 하나다. 그림 하나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받고, 생존 화가로는 유일하게 루브르박물관에 그림이 걸리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그런 샤갈이 죽기 전 20년간 살았던 곳이 생폴드방스다.
샤갈, 르누아르, 마네, 마티스, 피카소, 미로, 모딜리아니…. 이름만으로도 가슴 벅찬 그들이 걸었던 자갈 깔린 좁다란 골목들은 지금도 70여 개의 갤러리와 아틀리에로 가득하다. 마을 꼭대기 팔순의 샤갈이 햇살을 받으며 그림을 그리던 성당의 종탑 주변에는 아이들의 재잘거림도 싱그럽다. 힘겹게 언덕을 오른 샤갈 또래의 노부부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서로 잡은 손을 놓지 않고 함께 기댄다.
드방스 산의 짙푸름을 닮은 앳된 여학생을 쫓아 다시 내리막길을 가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휴식이 몸을 드러낸다. 그리고 거기, 예쁘장하게 돌멩이들이 가지런히 놓인 평범한 무덤 하나. 거기에 위대한 초현실주의 화가 샤갈이 잠들어 있다. 유대인인 샤갈의 무덤을 찾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그의 무덤에 돌멩이를 놓으면 그를 기린다. 생폴드방스 초입에는 노란색 비둘기가 그려진 작은 간판의 식당이 있다.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 폴루라는 그 동네 농부가 운영하던 작은 여관을 겸한 식당이었다. 그 집 2층에 샤갈이 오래 머물렀다. 샤갈뿐 아니라 피카소와 마티스, 그리고 호안 미로도 머물렀다. 가난한 화가들은 1층 식당에서 맛있는 밥을 얻어먹고는 돈 대신 자신들의 그림을 선물로 주었다.
지금 이 식당을 운영하는 폴루의 손녀는 그 위대한 그림들의 진품을 소장한 컬렉터가 돼 있다. 프랑스의 배우 이브 몽탕과 시몬 시뇨레는 이 식당에서 결혼을 했고, 몇 해 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도 애인과 밀월여행을 왔다가 파파라치에게 걸리기도 했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중략…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오래전 김춘수 시인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때문에 한국에는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이라는 카페가 넘쳐난 적이 있다.
나도 그때 이화여대 앞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에 앉아 ‘거기가 어딜까’ 궁금해 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런 마을은 없다. 시는 김춘수 시인이 샤갈의 대표작 <나의 마을>을 보면서 지은 것이다. 그림이 1911년 그려졌으니 적어도 그 마을은 생폴드방스는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은 샤갈의 그 ‘마을’은 생폴드방스일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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