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제조업 비중이 국내총생산(GDP)의 10% 남짓한 국가로 환율이 미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력은 극히 제한적이다. 환율이 미국의 무역적자를 크게 호전시키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과연 트럼프가 노리는 속내가 무엇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그간 미국 환율정책이 지나온 길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세계는 1930년대 대공황 이래 4차례의 큰 환율전쟁에 휩싸여 곤혹을 치러야 했다. 1930년대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에 의해 촉발된 1차 환율전쟁, 1970년 브레턴우즈 체제를 붕괴시킨 닉슨 쇼크로 촉발된 2차 환율전쟁,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촉발된 3차 환율전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촉발된 4차 환율전쟁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4차례 환율전쟁의 공통점은 모두 미국이 주도했다는 점이다. 특히 당시 미국 대통령과 그의 각료들이 앞장서서 주도했다. 대공황 이래 미국은 자기들의 경제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의도적으로 환율전쟁을 촉발했다. 그간 모든 환율전쟁은 미국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이로 인해 달러 가치는 1934년 이래 80년 동안 의도적으로 93%나 훼실(毁失)됐다. 이제 세계 최강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 있는 미국의 실체를 환율정책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대공황 때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은 경기를 살려내기 위해 유대 자본과 유대인들을 끌어들였다. 당시 루스벨트 정부의 초대 재무차관이 유대인 헨리 모겐소 2세였다. 루스벨트 전 미대통령과 모겐소 2세는 시중에 돈이 돌게 하고 미국 상품의 수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달러의 평가절하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1933년 4월 미국은 통화량 확대를 위해 금본위제를 이탈했고 모겐소가 재무장관에 취임한 1934년 1월 달러의 평가절하를 공식적으로 단행해 온스당 20.67달러였던 금값을 35달러로 끌어올렸다. 이로써 달러 가치는 무려 69%가량 떨어졌다. 그 덕분에 미국의 산업 생산이 연간 10%씩 늘어났다. 대공황 연구의 대가로 알려진 벤 버냉키가 이끌었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추진한 대책이 바로 대공황 시의 성공을 참고로 한 것이다.
게다가 금은복본위제였던 미국은 국제시장에서 은을 대량 구매하기 시작해 통화량을 늘려 나갔다. 이로써 국제시장 은 가격을 폭등시켜 은본위제 국가들을 초토화시켰다. 이 통에 중국이 은본위제를 포기하면서 혼란에 빠져 공산화되는 계기가 됐다. 이것이 세계 환율전쟁의 시작이었다.
그 뒤 갈등의 정점은 1971년 8월의 ‘닉슨 쇼크’였다. 리처드 닉슨 전 미 대통령은 달러를 금과 바꿔주는 금태환의 정지를 전격 선언해 ‘브레턴우즈 체제’를 무너뜨렸다. 미국은 당시 변동환율제로 이행하면서 엔화 가치를 달러당 360엔에서 250엔으로 절상시킴으로써 상대적으로 달러 가치를 그만큼 절하시켰다. 그 결과 충격과 혼란으로 세계 외환시장이 폐쇄됐다. 위기가 점증하면서 2년 동안이나 심한 혼란이 지속됐고, 이러한 혼란을 거쳐 금본위제는 결국 달러본위제로 바뀌었다. 이로 인해 달러의 신뢰도가 추락하면서 금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국제 원유가를 2달러에서 10달러로 올리는 계기가 됐다. 일명 ‘오일 쇼크’였다.
닉슨 쇼크 시점 4개월 전부터 7년 7개월간 지속된 달러약세기(1971년 4월~1978년 10월)에 달러화의 가치가 엔화와 마르크화에 대해 각각 39%와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이후 갈등의 산물은 1985년 9월의 ‘플라자 합의’였다. 주요 선진 5개국(G5)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은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모여 달러화 약세 유도를 결정했다. 환율전쟁 이후 달러화는 일본의 엔화와 독일 마르크화 등 주요 통화에 대해 큰 폭의 약세를 보였다.
환율 마찰로 일본의 ‘읽어버린 20년’
1985년 2월부터 10년 3개월간 지속된 달러약세기(1985년 2월~1995년 4월)에 달러 가치는 엔화에 대해 3분의 1, 마르크화에 대해서는 절반 수준으로 각각 급락했다. 이로써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을 견뎌야 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미국의 유동성 살포가 시작됐다. ‘헬리콥터 버냉키’라는 말이 상징하듯 마치 공중에서 돈을 살포하듯이 미국의 유동성 살포는 무제한, 무대포 식이었다. 금융위기 초기에 유대 자본가들의 반대로 부실채권을 걷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공적자금을 부실 제거에 집중적으로 투입하지 못하고 전방위로 유동성을 뿌려댄 것이다.
여기에 대응해 유럽과 일본도 금리를 낮추고 유동성 확대에 참가했다. 이를 학자들은 4차 환율전쟁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2010년 10월, ‘더블딥(Double Dip, 이중 침체)’ 우려가 커지면서 미 Fed가 2차 양적완화(QE)를 발표하고 중국에 대해 환율 절상을 촉구하면서 이른바 ‘환율전쟁’이 시작됐다. 당시 서울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있던 시점이었다.
당시에 환율전쟁을 두고 미국과 신흥국들 사이에 입장이 엇갈렸다. 미국은 중국, 한국 등 신흥국이 인위적으로 환율을 절하해 수출경쟁력을 키우고 있다고 비난했다. 반대로 중국, 브라질 등 신흥국들은 미국의 양적완화로 인해 대규모 유동성이 신흥국으로 유입돼 신흥국의 환율을 절상시키고 있다고 비난했다. 같은 현상을 자기들 입장에서 설명한 것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결과 2012년 8월 말까지 브라질 헤알화가 75% 급등(2002년 말 대비)한 것을 비롯해 일본 엔화(46%), 중국 위안화(30%) 등 모두 통화가치가 올랐다. 우리 원화도 2012년에만 미국 달러화 대비 8%가량 절상돼 세계 주요 통화 중에서 절상 폭이 가장 컸다. 미국의 양동작전, 달러의 곡예
달러는 금리 기조와 외환시장에서의 수급 결과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 단기적으로 볼 때는 일견 맞는 말이다. 또한 선진국 가운데 미국 경제가 유일하게 살아나고 있으며 여기에 더해 유럽과 일본의 경기 침체와 재정 적자 우려로 달러화가 홀로 강세를 보이면서 약달러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다고 전망할 수도 있다. 중기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달러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저 깊숙한 속내는 시종일관 ‘약달러 정책’이었다.
그래야 미국 경기가 힘을 받고 빚 탕감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간 미국의 환율정책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약달러 정책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알게 모르게 화폐 발행을 늘려 달러 가치를 서서히 떨어뜨리는 인플레이션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아예 드러내놓고 하는 무대포 평가절하다.
그러나 여기에도 미국의 고민은 있다. 미국은 약달러 정책을 지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기축통화로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 동시에 강달러를 지지한다. 여기서 강달러란 돈의 실질가치가 높아서가 아니라 국제결제통화 곧 기축통화로서의 강한 힘을 뜻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장이 달러를 요구하게 만들어야 한다. 방법은 여러 가지다. 우선 유동성 확대로 달러를 많이 풀어야 한다. 그래야 기축통화의 장악력이 유지된다. 미국은 기축통화의 권력이 주는 엄청난 시뇨리지(seigniorage) 효과를 양보할 수 없는 입장이다.
따라서 미국이 재정정책상 약달러 정책과 국제기축통화로서 강달러 정책을 동시에 유지해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누가 약한 통화를 보유코자 하겠는가. 이 모순된 딜레마를 가능한 눈치 채지 못하도록 끌고 나가는 과정이 교묘한 달러 곡예의 역사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유로화, 엔화, 위안화를 윽박질러 달러의 평가절하에 목매는 까닭도 마찬가지 이유다. 그는 대놓고 약달러를 외치고 있다. 달러는 그 자체로 평가절하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주요 상대국들의 통화들을 절상시켜야 달러 가치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그래서 주요 통화 상대국들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의 속내는 사실 미국 재무부와 월스트리트의 속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재무부로서는 달러 가치가 높게 형성되고 금리가 많이 오르면 실질 국가채무 가치와 국채 이자 부담이 너무 커진다. 그럼 월스트리트는 왜 달러 가치 하락을 원하고 있을까.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IB)과 헤지펀드들은 통화 상품으로 큰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달러 가치가 한 방향으로 고공비행을 하면 그들이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크게 제한된다. 그들은 비쌀 때 돈을 빌려 레버리지 작업을 하고 쌀 때 이를 갚아야 이중으로 돈을 벌 수 있다. 그들이 레버리지 작업을 위해 빌리는 돈은 달러든 유로화든 엔화든 가리지 않는다. 하지만 기본 원칙이 비쌀 때 빌려 쌀 때 갚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통화가치의 오르내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달러 가치는 지난 3년간 강세 일변도를 지속해 왔다. 더구나 미국은 현재 경제가 살아나는 유일한 선진국이다. 게다가 미국은 올해 금리 인상이 2~3차례 예고돼 있다. 달러가 강세로 갈 수밖에 없는 처지다. 지금도 달러인덱스가 100을 넘나들고 있는데 이를 시장에 맡기면 달러는 앞으로도 더욱 강세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국 처지에서는 강달러로 가는 게 반가울 리 없다. 그래서 시장 밖의 힘 곧 트럼프의 무대포가 발동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는 과연 달러를 어느 정도까지 절하하려는 것일까. 6개 주요 통화 대비 달러 가치를 환산한 달러인덱스는 2월 초 현재 100 내외에 걸쳐 있다. 그런데 글로벌 금융위기 전 오랜 기간 달러인덱스는 항상 80에 수렴하는 추세였다. 평상시에 미국이 내심 선호하는 달러 가치가 바로 달러인덱스 지수로 80인 걸로 추정되는 이유다.
유로화와 엔화 절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트럼프와 월스트리트의 견해가 일치한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외환시장이 오픈된 유로화와 엔화는 그 세력 면에서 달러를 이겨낼 수 없다. 미국 정부가 앞장서면 월스트리트의 헤지펀드 행동대들이 이들 통화가치의 절상 방향으로 유로화와 엔화 외환시장을 맹폭할 수 있다. 또 유럽연합(EU)과 일본은 통화절상을 피하기 위해 금리 인하 정책을 쓸 수 있는 형편도 못된다. 지금도 거의 제로금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유로화와 엔화는 절상을 피할 수 없음을 뜻한다.
그런데 문제는 중국이다. G2 간의 환율전쟁이 어느 쪽으로, 얼마큼, 어떤 형식으로 치달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가 중국은 외환시장이 열려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로 더 큰 문제는 근본적으로 위안화를 바라보는 트럼프와 월스트리트의 시각차가 크다는 점이다. 트럼프는 위안화의 절상을 외치지만 월스트리트는 위안화의 절하가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왜 그럴까.
중국은 그간 미국 등 선진국으로부터 무역 흑자를 많이 내왔다. 그 당연한 결과로 상대국들로부터 위안화 절상 압력을 받아 1995년 이래 20년간 위안화 실질실효가치가 70% 넘게 높아졌다. 반면 엔고에 허덕이던 일본은 침체된 경제를 살려내기 위해 같은 기간 엔화의 가치를 50% 넘게 절하했다. 그러다 보니 20년 사이에 양국 간의 화폐가치가 3배 이상 차이가 나 버렸다.
이제 중국은 미국과 한판 승부를 벌일지도 모른다. 미국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위안화의 본격적인 평가절하로 중국의 실질 인건비를 낮추고, 수출경쟁력을 높이려할지도 모른다. 사실 중국이 살아날 수 있는 방법은 현재 그 길밖에 없다. 위안화 절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다른 경쟁국들이 가만히 앉아 당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진짜 본격적인 환율전쟁이 시작되는 것이다.
환율전쟁에 대처하는 법
중국이 과도한 무역흑자로 인해 이러한 통화절상 전철을 밟아온 게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원화도 그간의 무역흑자로 많이 평가절상 됐다. 우리 원화가 지난 2009년 9월부터 5년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절상된 통화다.
그럼에도 지난해 우리 무역흑자가 904억 달러, 경상수지 흑자는 986억8000만 달러로 집계됐다. GDP의 8%에 달하는 경상수지 흑자로 인해 앞으로 미국 등 선진국들의 원화에 대한 절상 압력이 더욱 거세질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 차원의 인위적인 외환시장 개입은 위험하다. 이는 외환보유고를 헛되이 까먹는 짓이다. 1990년대 초 대영제국을 공략한 조지 소로스, 1997년 우리나라 IMF 사태와 동남아 외환위기 등의 예에서 보듯, 역대 외환시장에서 벌어지는 환율전쟁에서 정부가 시장을 이긴 적이 없다. 그리고 시장에 맡기는 것이 오히려 외환시장의 혼란을 빠르게 수습하는 길이기도 하다.
다만 수출기업은 비상한 각오로 대처해야 한다. 관련 품목의 일본 기업이 그 시절을 어떻게 극복해 왔는지 철저히 연구해 환율대별, 단계별 실행 계획을 세워 둬야 한다. 현재 달러 일변도의 무역결제통화를 현지 통화로 다변화해야 한다.
홍익희 세종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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