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배현정 기자]
환율전쟁의 전운 앞에 대한민국은 바람 앞에 촛불이다. 약(弱)달러의 거센 공습이 시작됐다.
작은 폭격에도 충격파가 매우 큰 국내 금융 환경에서 자산 가치를 지키고 고요함을 얻는 방법은 역설적으로 ‘태풍의 눈’ 미국 달러에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아쇠를 당긴 환율전쟁의 포화 속에 한국이 휩싸일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에 의하면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시니어팰로 윌리엄 클라인은 “트럼프 행정부의 환율전쟁 다음 타깃으로 캐나다와 멕시코, 그리고 한국이 유력하다”고 진단했다.
중국 위안화, 유로화, 일본 엔화 등 주요 통화에 대한 ‘환율 조작’ 공격에 이은 다음 공격 대상이 한국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미 흑자 규모가 큰 ‘화약고’로 환율전쟁의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는 경고다.
4월·7월 위기설…불확실성의 함정에 빠지다
“달러화가 너무 강하다.” 지난 1월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환율전쟁의 선전포고를 던지자, 전 세계 통화의 흐름이 바뀌었다. 트럼프 행정부에 대한 기대감으로 지난해 12월 28일 1210.50원(종가 기준)까지 급등했던 원·달러 환율은 2월 초 1140원대도 무너졌다. 변동성도 커졌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1월 중 국제금융 외환시장 동향’을 보면 지난 1월 원·달러 환율 변동률은 평균 0.6%다. 지난해 12월 0.34% 대비 2배나 변동 폭이 커졌다. 극심한 출렁거림은 주요국의 통화도 마찬가지였다. 같은 기간 엔화는 0.57%에서 0.71%로. 유로화는 0.45%에서 0.72%로 확대됐다.
암운(暗雲)은 이뿐만이 아니다. 4월, 7월 위기설 등이 고개를 들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오는 4월 발표하는 환율보고서에서 한국을 환율조작국으로 지정할 것이라는 우려에 그리스 국가 부채 상환 만기에 맞춘 ‘7월 위기설’ 등이 잇따르며 대내외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물론 현실화 가능성은 미미하다. 하지만 경제도 심리에 따라 크게 위축될 수 있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현대경제연구원은 최근 국내외 불확실성 지수가 크게 확대됐다고 경고한다. 2016년 10월 37.7포인트에서 12월 48.0포인트로 두 달 새 10.3포인트나 급등했으며, 이러한 상황이 지속될 경우 유럽 재정위기(52.8포인트)를 넘어 글로벌 금융위기(87.6포인트, 2008년 11월) 수준으로 치달을 수 있다고 진단했다.
오준범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경기 부진 상황에서 불확실성이 확대될 경우 가계 및 기업의 소비와 투자가 지연되면서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는 이른바 ‘불확실성 함정(uncertainty trap)’에 빠질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손발 묶인 외환당국, ‘외화 곳간’ 우려
환율전쟁의 총성이 울리는데 한국 외환당국의 손발은 묶여 있다. 대통령 탄핵 정국으로 인한 컨트롤 타워의 기능이 약화된 데다, 환율조작국 지정 우려로 외환당국이 쏠림을 막는 ‘미세조정(스무딩 오퍼레이션)’조차 어려운 상황이다. 예고된 미국 금리 인상으로 외국 자금이 이탈할 경우 시장의 출렁거림은 더욱 심해질 수 있다.
우리나라는 ‘신흥국의 자동인출기(ATM)’라고 불릴 정도로 외부 충격 시 자금 유출이 심각하다. 자본시장이 발달해 있고 유동성이 풍부한 점이 양날의 검이다.
우리나라 외화 곳간에 대한 우려가 흘러나오는 것도 같은 이유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 외환보유고는 3740억4000만 달러로 세계 8위 수준이다. 한국은행은 외환보유고가 “충분하다”고 자신하지만 일각에서는 찜찜한 시선을 보낸다.
현재 외국인의 국내 증시 투자액은 460조 규모에 달해 갑작스런 외국인 자금 유출은 실물 경제를 얼어붙게 할 수 있다. 향후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채권가격 하락으로 외환보유고가 감소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에 따르면 미국 국채 금리가 0.25%포인트 오를 때 외국인 주식투자 자금은 석 달 뒤 3조 원이 유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약달러 공세 이후 외화예금 ‘U턴’
트럼프 시대 투자 전략에서 핵심은 달러 자산이다. 달러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자금 흐름도 급변하는 양상이다. 달러 약세는 달러 투자자들에게는 기회일 수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월 말 기준 국내 거주자(내국인과 6개월 이상 국내에 거주한 외국인 및 외국 기업) 달러화 예금 잔액은 552억3000만 달러로 전월보다 55억7000만 달러 증가했다. 지난해 8월 이후 5개월 만의 증가다. 지난 1월 트럼프의 약달러 정책 이후 뭉칫돈이 다시 외화예금으로 ‘U턴’ 조짐이다.
달러 상장지수펀드(ETF)의 흐름도 궤를 같이한다. 달러 강세일 때 수익을 내는 ETF 설정액은 크게 감소한 반면 달러가 약세일 때 수익을 얻을 수 있는 인버스 ETF 설정액은 약진했다. 제로인에 따르면 환율이 떨어지면 수익을 내는 ‘키움코세프(KOSEF)미국달러선물인버스 ETF’는 22억 원 늘었다.
박승안 우리은행 투체어스강남센터 센터장은 “과거에는 달러가 필요할 때마다 환전해서 사용했다면 근래에는 젊은 자산가들을 중심으로 달러 강세 현상이 완화되는 국면마다 달러화 표시 자산을 적극적으로 늘려 가는 경향이 높다”고 말했다.
높은 변동성이 한국인의 축복이다?
오세준 알펜루트자산운용 펀드매니저는 저서 <트럼프 시대의 달러>에서 원·달러 환율의 높은 변동성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축복’이라고 강조했다. 왜일까. 예를 들어보자. A는 10억 원을 국내 자산(국내 주식)으로, B는 달러 자산(달러 100만 달러, 원·달러 환율 1000원 가정)으로 보유했을 때 경제가 어려움이 닥칠 경우 그 차이는 상상 이상으로 벌어질 수 있다.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처럼 큰 위기로 국내 주가지수가 50% 하락하고 환율은 1500원으로 급등했다고 가정하면, A의 자산은 5억 원으로 반 토막이 나지만, B의 자산은 15억 원 상당으로 증가한다. B가 이때 달러를 매도해 폭락한 한국 주식을 매수하면 국내 경제 회복 시 더 큰 이익을 거둘 수 있다.
오세준 매니저는 “원화 자산의 일부를 달러로 보유하면 경기 하강 시 원화 기준 자산의 가치 훼손을 최소화하고 경기 회복 시 더욱 큰 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이를 ‘채찍효과’로 설명한다. 채찍의 손잡이를 조금만 움직여도 채찍의 끝부분이 몇 미터 움직이듯, 우리나라는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채찍의 끝에 위치한 덕분에 선진국의 작은 변화에도 늘 격심한 경기 변동에 시달리지만, 그 대신 자산 배분과 자산 증식의 측면에서는 큰 이점을 지닌다는 얘기다. 홍 팀장은 “원·달러 환율이 급등할 때는 외국인이 한국 주식을 파는 시기”라며 “달러 자산을 갖고 있으면 급격한 충격이 나타날 경우 저평가된 원화 자산을 취득해 리밸런싱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달러 가치가 하루가 다르게 급등락하는 요즘에도 달러화가 여전히 안전자산의 대명사로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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