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리어왕>
<맥베스>, <햄릿>, <오셀로>와 함께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으로 꼽히는 <리어왕>은 그중에서도 가장 처절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늙은 왕 리어와 그의 세 딸을 둘러싼 이야기는 배은(背恩)을 주제로 인간의 다양한 내면을 예리하게 그려내고 있다. ‘리어(lear)’라고 불린 왕이 있었다. 그는 말 한 마디에 몇백 명의 신하를 벌벌 떨게 했던 브리튼 왕국의 최고 권력자였다. 하지만 80세를 넘긴 그도 노구의 몸을 이끌고 왕위를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다. 이제 그만 왕위를 내려놓고 싶었다. 그래서 세 명의 딸과 신하를 모두 불러놓고 왕위를 이양한다는 말을 대신해서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다.첫째 딸 고너릴과 둘째 딸 리간, 그리고 셋째 딸 코딜리어가 참석했고, 브리튼 왕국의 충직한 신하들이 그 곁을 지켰다. 첫째 딸 고너릴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한계를 다 넘어 전하를 사랑한다”라고 얘기했고, 둘째 딸 리간은 “전하의 귀중한 사랑 속에서만 행복해진다”고 답했다. 리어왕의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셋째 딸 코딜리어에게도 같은 대답을 기대하며 물었다.
그런데 코딜리어는 “없습니다. 전하”라며 자신은 진실에 어긋난 말을 하지 않겠노라고 덧붙였다. 리어왕은 격노했다. 코딜리어의 말은 그날의 사건이 됐다. 이 사건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첫째와 둘째는 예상대로 왕국의 지분을 둘로 나눠 가졌으나, 코딜리어는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왕국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코딜리어를 옹호한 신하들 역시 코딜리어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됐다.
이것이 <리어왕>의 발단이다. 이후 어떻게 됐을까를 예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사건만 봐도 대개의 사람들은 짐작한다. 첫째 딸과 둘째 딸은 ‘약속(말)’과 무관하게 리어왕을 극진히 모시지 않았으리라는 것, 이 때문에 리어왕은 자신의 유일한 바람인 편안하고 평안한 노후를 즐길 수 없었으리라는 것, 결국 코딜리어와 충직한 신하들이 왕국을 지켜낼 것이라는 기대 등이다.
이와 같은 결말을 예상할 수 있는 것은 ‘발단, 전개, 절정, 결말’과 같은 극의 구조를 놓고 계산한 결과가 아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에 대한 믿음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러나 이 사필귀정은 생각보다 더 비극적이다. 리어왕은 허허로운 벌판에서 코딜리어의 진실과 대면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코딜리어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그조차 명을 달리했다.
그렇다면 리어왕이 잘못한 것은 무엇인가. ‘누가 짐을 가장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던 것이 그리 잘못된 일인가.
아니면 코딜리어의 진심을 알아보지 못한 것이 실수였단 말인가. <리어왕>은 아마도 후자에 힘을 싣고 있는 듯 보인다. 첫째, 둘째와 달리 진실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코딜리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리어왕은 시간을 되돌려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일반적인 왕이라면 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지 묻지 않는다. 특히, 권력의 지분을 나누는 과정에서 사랑을 증명하라는 물음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면 가능하지도 않다. 오로지 사람들의 마음이 리어에게 속해 있음을 고백하라는 물음이기 때문이다. 리어가 두려운 것은 ‘사랑 없음’, 즉 ‘배신’이다. 양위 이후의 약속이 필요한 것이다. 배신하지 않을 것에 대한 확언, 일종의 충성 서약 정도의 맹세를 원한 것이다. 절대 권력의 이면이다.
진실을 의심한 왕의 비극
따라서 코딜리어의 ‘없다’라는 말은 리어왕이 종전에 해왔던 문답과는 다른 말로써, 말해질 수 없었던 말이었다. 리어왕이 코딜리어의 말을 거부나 저항 정도로밖에 읽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리어왕이 원한 것은 첫째와 둘째가 했던 그런 답변이었다. 첫째와 둘째가 리어왕이 기대한 그 모범 답안을 영특하게 짐작하고 이를 답한 것처럼, 그런 말을 당연하게 듣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셋째 코딜리어는 짐작과는 다른 말을 한다.
원래 코딜리어에게 ‘없다’라는 말은 마음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아부의 말’이나 ‘거짓’ 없이 말하겠다는 말이었다. “없습니다”라고 말한 직후 진실에 대해 언급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만일 말이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나누는 소통의 매개라고 한다면 코딜리어는 유일하게 말하고 있는 자다. 말을 독점한 왕이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은 너무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날의 사건은 리어왕의 물음이 아니라 어쩌면 ‘코딜리어의 말이 있었다’는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이 세계 속에 리어왕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인물이 하나 더 있다. 글로스터다. 그도 리어왕처럼 아들의 배신 끝에 결국 시력을 잃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그에게도 에드거와 에드먼드라고 불린 아들이 있었다. 에드먼드는 아버지 글로스터를 속여 권력을 찬탈하는 인물이다. 아버지 글로스터는 에드먼드의 입에 발린 반질반질한 말을 그대로 믿었고, 결국은 앞을 보지 못하게 된다.
실제로 글로스터는 시력을 잃었고 리어왕은 광기로 사람을 분간하지 못하게 된다. 이 ‘볼 수 없음’의 사태는 모두 ‘말’과 관련돼 있다. 그 말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첫째와 둘째 딸은 ‘사랑·의심’에 눈이 멀어 죽음을 자초했다. 아버지의 권력을 이어받아 결국은 아버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말을 가두고, 말을 독점한 권력이 뒷담화와 배신, 모략을 키우다가 결국 그 복종하던 권력에 스스로 갇혀서 자멸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왕국은 누가 계승했을까. 리어왕의 말을 흉내 낸 두 딸은 자기 욕망에 어두워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고, 이 권력에 기댄 에드먼드도 결국에는 살아남지 못했다. 또 리어왕이나 코딜리어조차 살아남지 못했다. <리어왕>의 결말이 연출자에 따라 다양하게 각색되는데, 아마도 코딜리어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고 생각한 관객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어찌됐든 <리어왕>의 비극은 눈뜬 봉사처럼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는 권력, 거울의 방 속에 들어가서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권력, 바로 그곳에서 싹텄다. 사람을 살리는 권력이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권력에 취한 왕, 세습과 재산에만 눈독 들이고 있는 왕, 말을 독점해서 결국 자기 말에 갇힌 왕의 비극이다.
글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일러스트 민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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