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임 빈티지킹 대표

[한경 머니 = 김수정 기자]독일의 소설가 장 파울(Jean Paul)은 말했다.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다. 어리석은 이는 그것을 마구 넘겨 버리지만, 현명한 이는 열심히 읽는다. 인생은 단 한 번만 읽을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빈티지 인테리어 소품 숍 ‘빈티지킹(Vintage King)’의 이경임(55) 대표는 누구보다 열심히 인생이란 책을 탐독하는 사람이었다. 화려한 그의 필모그래피 면면마다 ‘도전’과 ‘열정’이 촘촘히 새겨져 있었다. 이 대표의 인생 이야기와 남다른 빈티지 소품 사랑에 대해 들어봤다.
<쥬라기공원 2> CG 담당에서 빈티지 숍 오너까지
1997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은 역작 <쥬라기공원>의 속편인 <쥬라기공원 2: 잃어버린 세계>를 개봉, 또다시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요즘은 한국 영화에서도 정교한 컴퓨터그래픽(CG)을 쉽게 접할 수 있지만, 당시만 해도 <쥬라기공원>의 CG 특수효과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신화’ 같은 존재였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영화의 CG 작업에 참여한 스태프들 중 한국인 여성이 있었던 것. 바로 이경임 빈티지킹 대표다. 그는 영화의 메인 예고편의 CG 작업을 맡았는데, 그 결과물을 본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회사 상영실의 스피커가 고장 날 정도로 수십 번을 되감아 봤다고 할 정도다.

그러나 1988년 27세의 나이로 미국 유학길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 대표는 컴퓨터의 키보드조차 제대로 만져보지 못한 ‘컴맹’이었다고 한다. 되레 이화여대에서 생활미술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주)화승에서 약 3년간 그래픽·광고디자이너로 활동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삶은 평범하기만 했다. 그러던 중 당시 미국 유학 중인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났다. 이때부터 이 대표의 삶은 대변화를 맞는다. 미국에 가자마자 처음 1년간 국내 굴지 언론사의 뉴욕지사에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했다.

하지만 공부를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컸던 이 대표는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로 CG로 유명한 뉴욕 아트스쿨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의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면서 3년간 컴퓨터그래픽을 공부했다. 결코 쉬운 도전은 아니었다. 제대로 영어 공부할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컴퓨터를 처음 다뤄본 그에게 미국의 대학원에서 컴퓨터그래픽을 공부한다는 것 자체가 ‘무한도전’이었던 셈.

그러나 첫 학기에 수강한 ‘타가’ 수업을 접하면서 그는 자석처럼 컴퓨터의 위력에 빠져들었다. 식사시간도 잊고 하루 12시간 이상 컴퓨터에 매진하면서 졸업 논문을 완성했다. 그렇게 완성된 그의 작품은 1993년 컴퓨터그래픽 전시회 ‘시그라프’에서 주목받으면서 그를 찾는 러브콜이 잇달았다.

1993년 1년간 알 그린버그(R/Greenberg)라는 포스트 프로덕션에서 본격적인 컴퓨터그래픽디자이너로서 일을 시작한 그는 이듬해 가을 거주지를 뉴욕에서 캘리포니아로 옮겨 디지털 도메인(Digital Domain)의 테크니컬 디렉터로 처음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영화 <아폴로 13>, <트루 라이즈> 등이 그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다. 특히, 이 시절 그가 작업에 참여했던 롤링스톤스(Rolling Stones)의 ‘Love is strong’ 뮤직비디오는 1994년 그래미와 MTV 최우수뮤직비디오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그해 가을, 세계적인 영화감독 조지 루카스가 설립한 특수효과 회사 ILM(Industrial Light & Magic)의 테크니컬 디렉터 자리를 제안받아 <쥬라기공원 2>의 예고편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7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그는 세종대, 아주대에서 후배 양성에 나서며 틈틈이 발명품을 개발하고 특허를 냈다. 그리고 이제는 그가 취미삼아 모았던 빈티지 인테리어 소품들을 판매하는 빈티지 숍 경영에 나섰다. 전 세계 1%의 컴퓨터그래픽디자이너에서 빈티지 숍 오너로 변신한 이 대표의 인생 3모작 이야기를 들어봤다.

범상치 않은 경력을 지녔습니다. 학창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그야말로 조용하고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지금의 제 모습과는 전혀 딴판이랄까요. 보수적인 가풍의 영향이 컸죠. 오죽하면 젊음의 메카인 이화여대에 다니면서도
4년 내내 이렇다 할 추억 하나 없이 정말 학교만 열심히 다녔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지루하고 답답한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딱히 공부를 열심히 하진 않았어요. 다만 굳이 남달랐던 점이 있다면 여러 종류의 책을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시시때때로 뭔가를 그리고, 만들고 하길 좋아했죠. 패션에도 관심이 많아서 자연스럽게 생활미술과로 전공을 택한 것 같아요.”

변화의 계기는 언제부터였나요.
“남편을 만나면서죠. 당시 유학생이었던 남편이 방학 중 한국에 왔을 때 만나게 됐어요. 그렇게 인연을 맺고 결혼하면서 1988년 남편의 학업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어요. 처음엔 언론사에서 광고디자이너로 일했는데 공부를 더해보고 싶더라고요. 어떤 걸 할까 고민하던 참에 남편이 ‘컴퓨터그래픽’을 권유했죠. 앞으로는 이 분야가 유망하다며 절 설득했어요. 근데 그때만 해도 전 컴퓨터를 사용해본 적이 거의 없던 사람이었거든요.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고민도 됐지만, 그동안 해 왔던 광고디자인 일에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뉴욕 아트스쿨 프랫 인스티튜트의 대학원 과정에 입학하면서 3년간 컴퓨터그래픽을 공부했어요. 여러모로 힘든 일도 많았지만 그때의 선택이 제 삶의 큰 변화를 이끈 계기가 됐죠. 무엇보다 첫 학기에 들은 ‘타가’라는 수업에 흠뻑 빠졌어요. 수천 가지의 색깔을 만드는 소프트웨어인데 지금은 쓰지 않는 프로그램이지만 모든 게 생소했던 제겐 경이로웠어요. 그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무섭게 컴퓨터그래픽에 몰입했습니다.”

<쥬라기 공원 2>의 CG 작업에 참여했는데 어땠나요.
“알 그린버그와 디지털 도메인에서 일을 하던 중 1995년 루카스 감독이 설립한 특수효과 회사 ILM의 테크니컬 디렉터 자리를 제안받아 1999년까지 근무했죠. 그러면서 <쥬라기공원 2>의 예고편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잘 짜인 각본을 제가 CG로 구현하는 일이죠. 당시 콘셉트가 ‘칠흑 같은 어둠 속 곧이어 심장이 멈출 듯한 포효 천둥소리와 함께 공룡 티렉스가 관객들에게 튀어나온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걸 정밀하게 CG로 표현했죠.

후일담으로 들었는데 완성된 예고편을 본 스필버그 감독이 정말 좋아했다고 해요. 회사 상영실에서 수없이 예고편을 돌려본 나머지 스피커가 고장 났다는 얘기까지 나왔거든요(웃음). 무엇보다 당시만 해도 한국은 물론 외국에서도 CG 분야가 낯익은 시절은 아니었는데 제가 그 분야에 참여할 수 있었던 건 보람도 있고, 의미 있는 경험이었습니다.”

1999년부터는 교수직을 맡았더군요.
“네. 1997년부터 2년간 세종대 예체능대학 영상만화과 교수로, 1999년 9월부터 5년간 아주대 정보통신대학 미디어학부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열심히 제 강의에 귀를 기울이고, 배우려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 분명 보람된 일이었어요. 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교수직에 큰 재미를 느끼진 못했어요. 수업 준비를 해야 하는 부담감도 있었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이 조금씩 지루해졌거든요. 그래서 2004년 이후로는 교수직을 접고,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간간히 특허를 내기도 했고요. 꼭 대단한 발명품은 아니더라도 제가 만든 물건으로 사람들이 편의를 추구하는 일이 꽤 매력적이었죠. 2004년 누드양말 특허 등록을 시작으로 2011년 미국 특허, 2013년엔 입체 생리대 중국 특허를 받았어요. 요즘도 시간이 날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정리해 두고 있어요.”

빈티지 소품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나요.
“제가 디자인에 관심이 많다 보니 꽤 오래전부터 빈티지 소품에 관심을 갖고, 기회가 될 때마다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물론, 우리나라는 아직 빈티지 문화가 제대로 자리 잡히지 못해, 그저 보여주기 위한 장식적 요소나 액세서리 개념이 많은데 미국이나 유럽 등 외국에서는 빈티지 속에 담긴 역사적인 이야기, 헤리티지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거든요. 투박할지라도 빈티지 소품에 깃든 시대적 배경, 문화, 당시의 향수, 그리고 만든 이의 예술혼 등 빈티지는 외관의 아름다움 그 이상의 가치를 논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각박한 현대사회 시시각각 새로운 것들이 쏟아지는 홍수 속에서 옛사람들의 뜨거운 열정이 담긴 물건들이야말로 따뜻한 정서적 위안을 받을 수도 있고요. 이런 연유로 저 혼자 보고 즐기기보다는 남들에게도 이 문화를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올해 6월 평택에 ‘빈티지킹’이란 인테리어소품 가게를 내게 됐습니다.”

빈티지킹의 매력을 꼽자면요.
“보시다시피 저희 가게가 아직 큰 규모는 아니죠. 하지만 대량으로 수입하지 않는 만큼 제가 1년에 2번 꼼꼼히 외국 빈티지 숍을 방문해 직접 고르고, 한정된 수량만 수입해 오고 있습니다. 짧게는 30~40년 된 빈티지 제품부터 오래된 건 150년 이상 된 물건들도 있어요. 그렇다 보니 손님들 가운데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제품들이 많다’고 말하는 경우도 더러 있죠. 앞으로도 더 많은 분들이 저희 가게를 통해 빈티지를 통해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을 향유했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앞으로 목표나 꿈이 있다면요.
“지금 시작한 빈티지 숍을 잘 운영하는 게 단기적 목표겠죠. 근데 전 이것 외에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요. 기회가 된다면 꼭 ‘드라마 작가’의 꿈도 실현해보고 싶습니다. 누군가 인생 2모작 시대라고 하는데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인생 3모작을 위해 계속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이웃과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쥬라기공원 2> CG 담당에서 빈티지 숍 오너까지
이경임 대표가 경기도 평택에서 운영하는 빈티지 숍 ‘빈티지킹’에 진열된 소품들.

이경임 대표는…
1989년부터 3년간
미국 뉴욕 아트스쿨 프랫 인스티튜트 Master of Fine Art in Computer Graphics석사를 거쳤다. 이후 1993년 알 그린버그 컴퓨터그래픽디자이너·애니메이터, 1994부터 2년간 디지털 도메인 테크니컬 디렉터·디지털 아티스트, 1995년부터 1999년 까지 ILM 테크니컬 디렉터로 활약했다. 이 밖에도 1997년부터 2년간 세종대 예체능대학 영상만화과 교수, 1999년부터 5년간 아주대 정보통신대학 미디어학부 교수를 역임했다.

빈티지킹
경기 평택시 비전9길 83 빈티지킹/ 031-691-2567

글 김수정 기자 hohokim@hankyung.com
사진 이승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