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국왕의
정치와 인문학 소양

18세기 여러 변화들의 꼭짓점에는 그 시대의 통치자, 왕이 있다. 영조와 정조는 다른 왕들에 비해 왕다운 왕으로서 신하들을 누르고 뜻을 펼쳐 나간 군주로 기록된다. 그들은 어떻게 인문학적 식견을 바탕으로 정국을 장악해 나갔을까.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왕으로는 단연 영조와 정조가 으뜸이다. 이들은 난마처럼 얽힌 당쟁의 한복판에서 어렵게 즉위해 왕권을 성공적으로 구축했고, 스스로도 끝없이 학문을 닦아 군사(君師)로서 입지를 굳혔다. 또한 당시 조선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의미 있는 해결책을 강구했다. 두 국왕의 구상이 정치 현실에서 그대로 구현되지는 않았지만, 그런 구상에 골몰한 점만으로도 다른 왕들보다 뛰어났다.
영조의 구상 중에서 어느 정도 가시적 성과를 거둔 것으로는 탕평책을 우선 꼽을 수 있다. 조선의 고질병인 당쟁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에는 역부족이었지만, 그래도 여러 붕당을 공존시키면서 국왕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그것을 통해 몇 가지 민생안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탕평정치가 놓여 있었다. 양반 신료들의 반대에 부딪혀 반쪽짜리 개혁으로 끝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군포(軍布) 두 필을 한 필로 반감해 백성들이 허리를 펼 수 있게 도와준 균역법(均役法)도 영조의 치적 가운데 하나다.
정조의 구상에서도 의미 있는 결과를 일부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시전상인들의 독점판매권을 상당 부분 폐지해 자유경쟁 체제를 도입한 신해통공(1791년)은 미래지향적인 제도의 변화라는 점에서 역사 전문 용어로서의 ‘개혁’으로 부를 만하다. 서얼과 노비를 대상으로 세습신분제의 완화를 시도한 점이나 서학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취한 점도, 비록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는 못했을지라도 조선 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의미 있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당쟁으로 찌들고 갈래갈래 찢긴 정치 지형을 국왕 중심으로 대승적으로 재편하기 위한 탕평책도 그 성공 여부를 떠나 나름대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그렇다면 18세기의 영조와 정조가 다른 왕들에 비해 정국을 제대로 장악하고 민생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기틀은 무엇이었을까? 특히 중국에까지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로 알려진 조선에서, 특히 국왕이 친위대조차 보유하지 못하던 조선에서, 영조와 정조가 신하들을 누르고 왕다운 왕으로서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 두 국왕의 인문학적 소양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권력의 메커니즘을 알고
‘문사’가 돼 조정을 휘어잡다
조선이 유교사회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유자(儒者)의 학문과 삶의 정수는 흔히 말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안에 들어 있다. 자신을 먼저 수양한 후에야 남을 덕으로 다스릴 수 있다는 유교의 덕목은 그 자체로 인문학의 본연이었다. 인문학이 말 그대로 사람을 공부하는 학문일진대, 자신을 추스르고 그 소양으로써 사람을 다스린다는 유교는 현대의 학문 분과로 보면 단연코 인문학에 속한다. 따라서 이상적 유교사회를 지향한 조선 사회야말로 인문학도들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혼자 있을 때도 사람(자신)을 돌아보니 수신(修身)이요, 집 안에서도 사람(가족)을 인도하니 제가(齊家)요, 사회에 나가서도 사람(민생)을 생각하니 치국(治國)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 조선에서는 권위의 원천이 바로 유교적 인문학 소양에 있었다. 출중한 무예나 뛰어난 공예 솜씨, 남다른 상술이나 현란한 손재주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유교 경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야말로 권위의 원천이자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따라서 최고 엘리트들이 모인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도 권위의 본질은 언제나 무(武)가 아니라 문(文) 곧 유교 지식이었다. 그 지식이 가감 없이 드러나던 공간들 가운데 으뜸이 바로 경연(經筵)장이었다.
조선의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부터 부단한 교육을 받아야 했다. 세자 때는 시강원(侍講院)에서 주어진 스케줄에 따라 매일 경사(經史)를 공부하며 스승(신하)의 가르침을 받았다.
보위에 오른 후에도 이런 학습을 계속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경연이었다. 교재는 주로 치국 관련 서적이 많았으나, 성리학이 심화됨에 따라 수신 관련 교재도 등장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이 매우 강조한 <소학(小學)>을 경연에서 처음으로 독파한 국왕은 16세기 전반의 중종이었는데, 이는 성리학적 이해와 그 실천을 강조하던 당시 조류의 산물이었다.
요컨대, 경연은 국왕이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던 제도였던 것이다. 만일 숙제나 예습을 제대로 해오지 않을 경우에는 그 방면의 대가인 경연관(신하)으로부터 부드럽지만 준엄한 질책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국왕은 경연에서 언제라도 체통을 구길 수 있었고, 경연은 필연적으로 유학자 신료들이 국왕을 견제하는 기능으로 발전했다. 표면적으로는 유교적 왕도정치를 구현하자는 취지였으나, 정치 무대의 현실에서는 신하들이 국왕을 옥죌 수 있는 강력한 견제 장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경연을 오히려 왕권을 강화하는 기회로 뒤바꾼 국왕이 있었으니, 바로 영조와 정조였다. 즉위 과정에서부터 정통성 시비에 휘말림으로써 왕권다운 왕권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통치를 시작한 두 국왕이 결국 모든 신하들을 굴복시키고 권위를 회복한 비결은 신하들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던 인문학적 소양 곧 유교 경전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누구보다도 월등하게 갖춘 것이었다. 두 군주는 타고난 머리와 근면한 학습을 통해 유교 지식을 쌓았고, 끝내는 당대의 어떤 유학자에게도 뒤지지 않을 최고의 경지에 스스로 올라섰다.

백성과 직접 소통에 나서
따라서 경연의 분위기는 뒤바뀔 수밖에 없었다. 경연관(스승)이 국왕(학생) 앞에서 진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형국에서 승자는 단연 국왕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영조와 정조는 경연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경연관에게 감봉 처분을 내린다거나, 경연관이 미처 준비하지 못한 다양한 주석을 스스로 강론함으로써 학생(국왕)이 오히려 스승(경연관)을 가르치곤 했다.
한 예로, <논어>를 강론하면서 경연관 송덕상 (宋德相)이 상투적인 해석으로 일관하자, 정조는 <중용>을 비롯해 풍부한 자료들을 설명하며 오히려 송덕상에게 가르침을 주었던 것이다. 이런 판국이니, 경연관에 임명되는 것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웃지 못할 풍조까지 나타날 정도였다. 이렇듯, 왕권 견제 기능을 하던 경연을 오히려 왕권을 드높이는 경연으로 뒤바꿀 수 있었던 것은 영조와 정조가 신하들을 압도하는 유교 지식 곧 인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갖춘 덕분이었다.
영조와 정조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궁궐이라는 공간을 넘어 백성들과 직접 대면해 소통하기를 꾀했다. 양반 신료라는 중간자(中間者)를 거치지 않고 민(民)의 고충을 가감 없이 직접 들음으로써, 민생을 직접 챙기는 성군의 이미지를 만천하에 알리고자 했다.
영조가 주로 순문(詢問)에 주력했다면, 정조는 원거리 행행(行幸)도 마다하지 않았다. 순문이란 나라에 어떤 일이 있을 때 국왕이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의 의견을 직접 듣는 것인데, 균역법의 시행을 놓고도 영조는 순문을 활용했다. 영조는 재위 중에 모두 129차례나 순문을 행했다. 이는
1년에 두 번 이상 행한 꼴로, 백성들과 직접 소통하려던 영조의 열정을 잘 보여준다. 화성(華城)에 위치한 사도세자의 융릉(隆陵)에 행차하는 길에 정조가 백성들과 다양한 방법으로 소통했음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영조와 정조를 군사(君師)라 일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정치적 군주(君)일 뿐 아니라 인문학적 소양으로도 만인의 스승(師)이 됐음을 자타가 공인한 것이다. 정치적 힘과 지식의 힘을 겸비한 18세기의 두 국왕 영조와 정조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민생을 안정시켰던 것은 이래서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다. 물리적인 권력만 휘두를 뿐 아래로부터 인정받는 권위가 사실상 부재 상태인 요즘의 인왕산자락을 바라볼 때, 영조와 정조가 더욱 돋보임은 어쩔 수 없다.
키워드로 보는 18세기 인문학_18세기의 궁궐
경연이란
경연(經筵)은 국왕에게 유학 경서를 강론하던 제도였다. 중국 한나라 때 시작해 송나라 때 제도로서 틀을 갖추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예종 때 경연을 처음 시작했으나 고려가 불교사회였던 탓에 활성화되지는 못하다가, 유교 국가를 표방한 조선왕조에 들어서면서 발전했다. 유교정치에 큰 관심을 둔 세종과 성종을 거치면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렸는데, 특히 성종은 하루에 아침(朝講), 점심(晝講), 저녁(夕講)으로 세 번씩 열리는 경연을 재위 25년간 거의 거르지 않고 참석했다. 이에 비해, 전제권력을 휘두른 세조와 연산군은 한때 경연을 폐지하기도 했다. 제도로서의 경연은 개항 후 고종 때까지 존속하다가 관제 개혁이 한창이던 1895년에 사실상 폐지됐다.
경연에 참석하는 관리의 정원은 특별히 정한 바 없으나 대개 3정승을 포함해 당상관급으로 15명 이상, 홍문관 관원들을 중심으로 참찬관(參贊官)·강독관(講讀官)·검토관(檢討官) 등 10명 이상, 도합 25명이 넘는 엘리트 신하들이 참석했다. 따라서 경연에서는 강론을 마치고 나서 바로 시국 전반에 걸쳐 다양한 논의를 전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사실상의 최고회의기구이자 의결기구로서의 기능까지 갖추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경사(經史)에 밝지 못한 국왕은 경연 내내 신하들에게 휘둘리기 일쑤였다. 요컨대, 경연은 국왕에게 유교적 이상 정치를 강론하는 것이 본래 목적이었으나, 실제로는 신하들이 유교적 덕목을 내세워 왕권을 제어하는 쪽으로 기능했다.

정조에 눌린 경영관 송덕상
송덕상(宋德相, ?~1783년)은 은진(恩津) 송씨로, 17세기 후반에 정치와 학문으로 일세를 풍미한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의 현손이다. 정치적으로는 집안의 내력을 따라 노론에 속했으며, 사도세자의 죽음과 정조의 즉위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던 정국에서는 정조를 옹위하던 시파와 가깝게 지냈다.
1753년(영조 29) 좌의정 이천보(李天輔, 1698~1761년)의 천거로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를 제수하면서 관직에 첫 발을 디뎠다. 이후 몇몇 관직을 거치다가 1767년에 사헌부 지평에 임명됨으로써 정치 무대의 한복판으로 진입했다. 정조가 즉위하고 시파의 핵심 인물이던 홍국영(洪國榮, 1748~1781년)이 권세를 잡자 그의 후원을 받았다. 홍국영이 권세를 누리던 1776년부터 1779년까지 3년간 동부승지, 이조참의, 예조참의, 한성부좌윤 등을 두루 역임하다가 막판에는 문관의 인사권을 쥔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홍국영이 몰락하면서 운명을 함께해 송덕상도 위리안치의 형을 받았다. 그 뒤 왕위 계승에 대해 올린 소에 흉역(凶逆)의 뜻이 있다 해 옥에 갇혔다가 죽음을 맞았다.
송덕상은 철저한 학문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채, 송시열의 후예라는 후광을 업고 시류에 합류해 한때 권세를 누리기도 했으나, 정국의 변화와 함께 몰락했다. 경연관으로서 송덕상은 유교 지식 면에서 정조의 상대가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계승범 교수는…
조선의 양반 지식인들의 중국관과 유교의 한국적 특성이 결합돼 조선 사회를 형성해 가는 과정에 관심을 두고 연구를 해 왔다. 저서로는 <중종의 시대>,
<우리가 아는 선비는 없다>, <정지된 시간> 등이 있다. 워싱턴대, 시애틀대, UCLA 등에서 한국사와 동아시아를 가르쳤다.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서강대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