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선비들의 창조 코드,
인문학의 전성기를 꽃피우다

18세기 인문학은 자못 유쾌하다. 조선의 혁신 선비 박지원·박제가·이덕무, 탕평정치의 대명사 영조와 정조, 이름도 빛도 없지만 시대의 주역인 많은 얼굴들. 그들과 조우하는 여정이다.
[한경 머니=이현주 기자]

조선의 르네상스로 불리는 시기가 있다. 한양 도성 굽이진 인왕산자락과 위용 넘쳤던 경복궁과 창덕궁, 원각사와 대사동 주변에서 문예 부흥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18세기다. 문(文), 사(史), 철(哲)을 겸비한 인물들이 이곳에서 북적북적 지적 담론을 형성하고 일종의 ‘문화 살롱’을 열곤 했다.
18세기는 우리 인문학의 전성기로 통한다. 무엇보다 지적 열망과 호기심이 폭발했던 시대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는 정보를 가져야 지식인이었다. 활자와 책은 사대부가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중앙 정부는 인쇄소를 직접 관할하며 책의 생산과 유통을 제한하고 이를 정치 체제 유지에 활용해 왔다. 18세기 들어 눈에 띄는 변화는 바로 책 읽기와 글쓰기 열풍이다.
글을 읽는 데 신분의 고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여성 사이에선 소설 감상 붐이 일었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도 크게 늘었다. 이처럼 ‘지식의 대중화’가 진행되면서 상층 문화와 하층 문화가 섞이고 정보를 교류했다는 점이 18세기 인문학의 첫 번째 포인트다.
때마침 서양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시기 지식의 대중화에 불을 지핀 역사적 사건은 바로 프랑스 <백과전서>(1751년) 편찬이다. 지식을 담는 새로운 형태의 등장이었다. 한정주 고전평론가 겸 뇌룡재 대표는 “18세기 가장 위대한 지적인 사건이 백과전서파의 출현으로 당대에 학문과 지식으로 대접받지 못한 것들까지 집대성하고 탐구했다”며 “조선에서도 이덕무의 손자인 이규경을 통해 조선 최대의 <백과전서>가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장서가 늘어…회람하고 탐독하다
중국으로 가는 조천사(朝天使)와 연행사(燕行使), 일본의 조선통신사들은 중국 연경과 일본 오사카에 방문할 때마다 필수 코스처럼 서점에 들렀다. 한 번에 몇천 권씩 수레에 싣고 들어오고, 이를 함께 회람하고 탐독하는 장서가 문화가 유행처럼 번졌다. 백과사전을 비롯한 외국에서 들어온 지식과 정보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전 세계적으로 신분 격차가 해소되는 징후가 사람들 사이 공유되고,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 개인들이 사회의 지적 토대를 형성했다.
새로운 예술 취향도 일었다. 수집하거나, 감상하거나, 몰두하거나 하는 일종의 ‘마니아 문화’가 생겼고, 다양한 취미와 취향이 일어났다. 개인의 취향에 그치지 않고 함께 모여서 공유하고 즐기면서 담론을 만들어냈다는 점이 이전 시대와 다른 독특한 지점이다. 조선 지식인의 고상한 취향인 수석(壽石) 취미가 보편화된 시기가 바로 18세기다. 곳곳에 돌을 쌓고 매화를 키우고 감상하면서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다. 여럿이 함께 모여 문화를 향유하면서 ‘감상하는 힘’을 배양했다. 한편 문화적으로 18세기는 조선의 독자적인 진경산수화가 나타났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18세기의 지식인 하면 떠오르는 몇몇의 인물들이 있다. <열하일기>로 유명한 박지원, 지전설을 주장한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 책만 아는 바보로 불린 이덕무 등이다. 세 명의 공통점을 하나 꼽으라면 ‘백탑파’다. 남산자락에 살던 박지원, 이덕무, 유득공,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 등은 관념적인 주자학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이용후생(利用厚生)의 학문을 추구하며, 조선에 변혁의 바람을 불러왔는데 이들이 모여 교류하던 곳이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있던 백탑(지금의 종로구 탑골공원)이다. 사상적으로는 북학사상을, 문학적으로는 연암체를 공유하는 벗들로 이른바 ‘백탑 스타일’을 만들며 새로운 조류를 형성했다. 성호 이익의 후예들인 성호학파, 북학파 등의 커뮤니티도 유명했다.
이 밖에 시민 문화의 형태로 이해되는 여항 문화, 음악 부분에서 시조나 줄풍류 등의 탄생, 지방에서 성장한 판소리나 가면극, 새로운 문체와 문학 창작 등은 18세기를 ‘창조적인 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정치적으로는 영·정조의 탕평군주 시대이면서 그 앞뒤인 17세기, 19세기에 비교해 전쟁이 없는 시대라는 점도 그 배경이 된다. 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는 “사극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시대가 18세기인 이유는 현대와 관련해서 의미 있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라며 “인문학의 요체라 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사유를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때다”라고 말했다.

다양한 현상에 호기심 폭발
인문학의 중심엔 ‘인간다움’이 있다. 18세기의 인간다움은 ‘다양성’으로 나타났다. 사상과 사유의 자유로움,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인간 군상의 모습이 그 전후 시대와 비교할 때 두드러졌다. 신분제 사회에서 다양한 계층의 공존을 모색하며 결국 신분제 철폐에 이르게 됐다. '신 계급 사회'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오늘의 현실과 비교해볼만한 부분이다.
조선의 18세기가 결코 흠 없는 시대는 아니었다. 세계정세는 급변했고, 사람들은 불안했다.백성을 이끄는 왕도 역시 불안했다. 박현모 여주대 교수는 “최근 정조평전을 쓰면서 제목을 ‘말 안장 위의 군주’라고 했다”며 “정조가 정적들과 대립한 후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말 안장에서 내려오지 못할 만큼 힘들어했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18세기 인문학은 불완전한 시대에 피어난 꽃이다. 그 특징은 역동성이다.
18세기의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변화들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해보기 위한 시도로 지금부터 다섯 가지 분야를 살펴본다. 18세기의 문장, 인재, 음식, 궁궐, 지도라는 테마는 각각의 주제 의식을 던진다. 지식인의 조건, 비주류의 자부심, 맛의 세계화와 식도락, 세계 속의 우리, 지도자의 식견과 덕목이라는 관점에서 읽는다면, 18세기와 21세기 사이 300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우리는 더 풍요로워졌는지, 인간답게 살고 있는지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을 넘어 무기력에 빠진 우리 사회에 옛 선비들이 주는 위로의 메시지이자 오늘날 적용 가능한 화두다.

세계의 18세기
조선 밖 세상에서도 18세기는 역사적으로 조금 특별하게 기록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위대한 백년’으로 불린다. 근대성의 핵심 요소들로 꼽히는 계몽사상, 절대왕정, 부르주아지를 바탕으로 산업혁명(1776년), 미국독립선언과 프랑스대혁명(1789년)으로 이어지는 서양의 18세기는 자부의 역사로 남아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은 강희제·건륭제의 체제 아래 경제가 발전하고 문화적으로도 번영을 누렸다. 일본도 도쿠가와 바쿠후의 통일국가 체제 아래 농업, 상업, 수공업이 번성한 시대였다. 조선도 18세기 세계사의 흐름에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보였으나 19세기 들어 역행하는 쪽으로 역사가 흐른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왜 18세기인가
사진 설명 - 18세기 한양 도성 풍경은 역동성이 특징이다. 정조 시대를 기준으로 인왕산 아래서는 중인들이 모여서 시를 짓고, 백탑파들의 랜드마크인 원각사지석탑 인근에선 이 시대의 혁신 선비들이 ‘백탑 경향’을 만들어 갔다. 시전상인들의 독점판매권을 폐지하고 자유경쟁 체제를 도입한 신해통공(1791년)으로 시장이 활기를 띠고, 청계천 준천의 빈민가가 다닥다닥 모여 있다. 천주교 비밀 집회와 천주 연구와 같은 모임도 곳곳에서 이뤄졌다.

18세기를 이끈 인물들
박지원
(朴趾源, 1737~1805년)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자 근대 이전 산문에서 가장 큰 명성 얻음. ‘연암체’로 불릴 만큼 독자적인 문체를 자랑하며, 학문 공동체 ‘백탑파’의 핵심 일원.
대표작 <열하일기>, <허생전>, <연암집> 등

이덕무
(李德懋, 1741~1793년)
조선 정조 연간의 학자이자 시인이며 산문가로서, 책벌레로 통함. 왕실의 후예이면서 서얼, 정조의 배려로 검서관에 발탁됨.
대표작 <이목구심서>, <선귤당농소>, <세정석담> 등

정조
(正祖, 1752~1800년)
조선의 제22대 왕, 탕평과 개혁을 통해 대통합을 추진. 인문학에 뛰어났던 군사로서, 경연을 통해 신하들을 누르고 국정을 장악.
대표작 <홍재전서>

이익
(李瀷, 1681~1763년)
조선 후기 사상사에 한 획을 그은 실학자로 경세치용의 경학을 수립.
가난과 병고 속에서도 100권의 저술을 이뤄내고, 수많은 제자를 거느림
대표작 <성호사설>, <곽우록>, <성호선생문집> 등

이서구
(李書九, 1754~1825년)
조선 후기 실학자이자 문신으로 해학시에 뛰어남. 우의정까지 지냈지만 홍대용과 박지원 문하에 출입하면서 실학파 문인들과 사귐.
대표작 <척재집>, <강산초집>

정약용
(丁若鏞, 1762~1836년)
당파는 남인으로 젊어서부터 훌륭한 학자로 인정받음. 정조 사후에는 18년이나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정계에서 나온 뒤 방대한 저술 활동.
대표작 <목민심서) 등 경집 232권과 문집 267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