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세대의 新 놀이터
“일상에서 누리는 최고급 리조트다. 공연 한 편을 보는 동안 일주일간의 피로와 비참했던 일들까지 다 씻겨 가는 기분이다.”
금융권에서 은퇴한 김명진(56) 씨는 매주 토요일 오전 음악감상실 ‘무지크바움’에서 ‘발레바움’ 강좌를 듣는 게 새로운 인생의 낙이다. 클래식 감상과 공부를 통해 내면의 열정을 되찾아서다. 그가 즐겨 찾는 무지크바움은 오페라 칼럼니스트 유형종이 운영하는 클래식 감상실로, 김 씨는 ‘발레바움’에서 국내외 발레 명작 감상법에 대해 배우고 있다. 희극 발레의 대표작이자 세르반테스의 소설 <돈키호테>를 소재로 한 발레 <돈키호테>의 경우 유형종의 해설과 함께 <라 스칼라 발레 실황>(2004년) 한 편을 보는 식이다.
김 씨 외에도 이 수업에는 매주 약 20여 명이 함께하고 있다. 감상을 위해 실내조명을 낮춰 어두운 중에도 몇몇은 강사의 설명을 꼼꼼히 노트에 받아 적는 열정을 보인다. 때로는 무대 위 스타와 직접 만나는 호사도 누린다. 8월 중에는 2주에 걸쳐 볼쇼이발레단의 영웅, 이렉 무하메도프에 대해 프리뷰하고, 실제 내한한 그를 초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가졌다. 김 씨는 음악감상실의 매력에 대해 “집에서 DVD로 볼 수도 있지만, 집중도나 분위기가 확실히 달라서 매주 찾은 게 벌써 6년째다”라며 “제대로 공연 한 편을 보고 나면 고농축 영양제를 맞은 것과 같이 힘을 얻는다”고 말했다.
무지크바움에선 발레바움 이외에도 하루 세 차례, 해설이 있는 명작 감상이 이뤄진다. 요일에 따라 영화, 오페라, 기악, 무용 등 주제에 따라 ‘시네무지카’, ‘크라시쿠스’, ‘클래식바움’ 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별다른 홍보 없이도 입소문으로 사람들이 몰려 이곳은 하나의 ‘동호회’처럼 운영된다. 월요일에 운영되는 기악 강좌와 금요일의 오페라 강좌는 아예 전문가 강사 없이 회원들이 자체적으로 준비를 해 발표하는 형식으로 운영된다. 열정적으로 공부하고 준전문가 수준으로 지식이 늘면서, 보다 적극적인 예술 참여를 원하는 회원들이 있어서다.
예술의전당 아카데미 수강생 역대 최고
예술의전당 하면 대형 오페라 하우스와 콘서트홀이 먼저 떠오르지만, 실제 더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공간은 따로 있다. 예술의전당 아카데미가 그 주인공으로, 건물 곳곳에 마련된 강의실에 오전 일찍부터 사람들이 차고 넘친다. 이곳은 29년째 이어져온 전통의 아카데미로, 한국 예술 아카데미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무지크바움이 유명 칼럼니스트를 중심으로 형성된 동호회 성격의 아카데미라면, 국내 공연문화예술기관에서 예술 아카데미를 처음 시작한 곳이 서울 서초구에 위치한 예술의전당이다. 이곳의 흐름을 들여다보면 최근 예술 아카데미의 인기를 짐작해볼 수 있다. 예술의전당 예술 아카데미 수강생 수는 2015년 9657명으로 1988년 이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수강 분야도 초기 서예교실에서 점차 인문학, 힐링, 공연기획 등으로 더 다양해졌다.
특히 2000년 이후 비약적인 성장을 해 왔다. 그 배경에는 ‘어린이 미술 영재 프로그램’이 있었다. 유명 작가들에게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에 입소문을 타면서 경쟁률이 100대1, 200대1에 달했다. 초창기 미술사에서 점차 클래식, 기악 등의 고전음악 강좌가 인기를 누리고, 2010년 이후 인문학 강좌 열풍이 맞물리면서 인기는 최고조에 달하고 있다. 황복희 예술의전당 아카데미부 부장은 “일례로 이진지숙 미술평론가의 강의는 230명 모집이 순식간에 마감되고 대기 인원까지 줄을 선 상태다”라고 말했다.
한 번 수강한 후에 계속해서 수강을 하는 재수강 현상은 예술의전당 아카데미의 성과이면서 동시에 고민이다. 사람들은 몰리는데 강좌가 일찍 마감되면서 청와대에 민원까지 들어올 정도다. 이렇게 행복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예술의전당 아카데미는 수익성 측면에서도 극장의 알짜배기 수익 모델의 역할을 톡톡히 한다. 국내외 유명 공연을 올리는 극장 대관에서보다 더 많은 수익이 바로 아카데미에서 나온다. 올해만 해도 연간 28억 원 매출 목표가 9월 중 달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같은 주제라 하더라도 시대에 따라 트렌드는 바뀐다. 최근 인기 있는 강좌의 특징은 ‘현장’, 그리고 ‘체험’으로 요약된다. 강의실에 앉아 명사에게 강의를 듣는 방식에서, 직접 문화예술 현장으로 나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생생한 강의를 선호하는 것. 또한 아마추어 예술가에 도전하며 직접 실기 강좌에 참여해 발표회까지 여는 체험 강좌도 인기 만점이다.
그중 매월 토요일 열리는 ‘우리 땅 지리여행’의 경우 박종관 건국대 지리학과 교수와 함께 한반도의 지리 경관 곳곳을 탐방하며 자연과 인문의 융·복합을 도모한다. 지난해 개설된 이후 매번 35명 정원이 모집과 동시에 마감되고 있다. 한 학기가 끝난 후에는 세계지리여행을 떠나는데, 이들은 지난 8월 중 러시아 바이칼 지리여행 답사를 다녀왔다. 이 밖에 김성택의
‘연기 강좌’, ‘서정학과 함께 배우는 성악’은 한 학기 동안 실기 실습을 거쳐 실제 예술의전당 무대에 오르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체험형 강좌로 수강생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은퇴 세대, 그중 남성 회원들의 급증이다. 수강생 중 연령대로는 50~60대, 수강 시간대로는 오전 강좌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다시 말해, 은퇴 이후 예술 아카데미를 ‘제2의 인생 학교’ 삼아 다니는 이들이 많다는 것.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매일 오전 출석 도장을 찍으며 출퇴근하듯이 다니는 회원들이 늘고 있고, 남성 회원들도 전에 비해 부쩍 늘었다”며 “전통적으로 중년 여성이 많았는데, 성악 교실의 경우 전체의 60%가 남성 회원으로 구성돼 있다”고 말했다.
이들은 은퇴 이후 적적한 삶을 예술이라는 새로운 공부이자 취미를 통해 품격 있는 제2의 인생 설계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예술 아카데미의 문을 두드린다. 문화예술기관에는 아카데미 이외에도 도서관, 박물관, 공연장, 카페, 음식점 등이 한 데 모여 있어 중장년들의 새로운 놀이터가 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고고학과 미술사학, 박물관학 등의 주제를 다루는 국립중앙박물관에도 중장년 남성들이 많이 모인다. 국립중앙박물관회의 예술 강좌 남녀 회원 비율은 5년 전 약 2대8에 비해 현재 약 4대6으로 변화했다.
공연장뿐 아니라 미술관에서도 예술 아카데미를 운영한다. 예술의전당보다 앞선 1986년부터 예술 아카데미를 연 국립현대미술관은 사실상 국내 최초로 미술관 교육을 시작한 곳이다. 이와 같은 문화예술기관의 교육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풍부한 문화 자원을 활용해 운영하는 것으로, 관객들에게 콘텐츠 향유 증대를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미술관 교육 시작
국립현대미술관이 초창기 국내 상위 1%들의 예술 모임을 주도했다면, 최근에는 거의 대부분의 미술관과 갤러리, 옥션 등에서 자체 예술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예술 교육에 앞장서고 있다. 미술관으로서는 예술 아카데미가 전시된 작품을 효과적으로 소개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다.
서울 창덕궁 옆 ‘공간 사옥’에 위치한 아라리오미술관은 크게 두 가지의 예술 아카데미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관람객들에게 미술관 전시 작품을 해설해 이해를 돕기 위한 일반 강좌로, 주로 현대미술사 강좌와 전시된 작품을 활용한 여러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수강생이 늘어날수록 전시 및 부대시설(외식, 뮤지엄숍)의 매출이 함께 늘어나는 효과도 누리고 있다. 또 특정 예술 애호가를 위한 고급 강좌는 커뮤니티를 형성해 장기적으로 두터운 예술 향유층을 만드는 목적에서 운영된다. 저녁 시간대 강좌인 ‘A클래스’와 낮 시간대의 ‘파인딩 원셀프(Finding Oneself)’가 그것이다. 각 분야 전문 명사들의 초청 강연뿐만 아니라 해외 아틀리에 탐방 특별 프로그램의 참여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이 밖에 각 백화점 문화센터, 지방자치단체 문화센터, 사설 아카데미도 활발히 운영 중이다. 예술의전당 아카데미 출신으로 한 재단 아카데미에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이미숙 씨는 최근 예술 교육의 흐름에 대해 “과거 미술관 탐방, 갤러리 투어를 하면 오전에는 전시장이 한가한 편이었는데, 워낙 비슷한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요즘엔 이른 오전부터 단체 관람객으로 북적거린다”며 “지금은 일부 전시장에서는 수업을 하지 못하게 막을 정도로, 미술관 탐방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인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예술 아카데미가 배출한 스타 강사들이 방송국, 기업 등에서 맹활약하고 있는 것도 재밌는 부분이다”라고 했다. 스타 강사들을 통한 예술 교육 시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강사의 몸값이 뛸수록 수강료는 더 올라가는 구조다.
이와 같은 예술 아카데미는 대부분 유료 강좌로 운영되지만(일부 미술관에서는 일회성 무료 강의를 연다), 한 학기 수업이 100% 무료인 곳도 있다. 바로 서울문화재단의 ‘서울시민 예술대학’이다. 15주에 걸쳐 각 장르별로 ‘체험형 강좌’를 진행하는데, 20명 정원이 하루 만에 마감될 정도로 입소문이 난 상태다. 만 19세 이상 서울 시민 누구나 문학, 연극, 음악, 무용 등 순수예술을 중심으로 예술 체험을 할 수 있다. 임미혜 서울문화재단 예술교육본부장은 “일찍이 유럽에서는 학생부터 성인까지 연계되는 통합 예술 교육이 이뤄지는 반면 한국에선 성인 예술 교육의 중요성이 부각된 게 최근 몇 년 사이의 일이다”라며 “성인 대상의 특화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 현재 전국 지자체에서 벤치마킹을 하러 오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대형 공연장에서부터 동네 마을회관까지 예술 아카데미가 열리고, 사람들이 몰리고 있는 배경에는 ‘자아 찾기’가 있다. 고도성장을 통해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된 현대인들이 문화를 통해 ‘나만의 취향’을 찾고, 남과 다르기를 원하면서다. 목적이 어떠하든 예술 교육을 통해 얻는 유익한 효과는 ‘러닝 바이 두잉(learning by doing)’으로 보인다. 교육학자 존 듀이의 이론처럼 경험을 통해 자연스럽게 학습하게 되는 과정이다.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인성과 사회의 공동체성 회복을 지향한다.
끝없는 경쟁의 사다리를 오르면서 효율과 성과를 추구하는 현대인들이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는 시간, ‘쓸모 있음’의 경제학에 익숙한 이들이 ‘쓸모없음’의 미학을 체험하고 경험하는 장이 바로 예술 교육의 현장이다. 미술 실기 교육에서 맞고 틀리고의 개념은 없다. 자유롭게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자기표현이 가능하다. 또 다양성에 대해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다. 그렇게 삶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예술 교육의 중요한 효과다. 유럽의 예술 교육
유럽의 예술 교육은 단순한 취미 교육이 아닌, 개인의 발견과 공동체성 회복, 그리고 예술 교육을 통한 재취업 지원까지 연계되는 장기 계획이다. 유럽에선 18세기부터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추구하는 전인교육의 측면에서 예술 교육이 이뤄져 왔다. 문화 교육의 메카로 불리는 독일은 시민대학을 통해 성인들의 문화예술 교육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이곳은 ‘예술을 매개로 한 교육’을 지향한다. 50세의 은퇴자라면 생애전환에 초점을 맞춰, 향후 20년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 탐구한다. 예술 활동을 통해 ‘새로운 나’를 개발하고, 인생을 설계하는 토양으로서 예술 교육을 활용하고 있는 것. 학위로 연계되는 과정으로 그 안에서 ‘애니메이터’나 ‘일러스트레이터’로 재취업하는 사례도 나온다. 꼭 예술 관련 직업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새로운 적성이나 재능을 발견하는 연계 활동으로 예술 활동이 유용하게 활용된다. 이 밖에 프랑스는 1980년부터 학교를 중심으로 문화예술 교육이 의무적으로 시행돼 왔다. 핀란드에는 학교와 연계된 예술교육센터가 핀란드 전역에 800개로 뻗어 있다. 개별 기관으로 보면 과거 귀족 예술의 핵심 역할을 한 영국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가 눈에 띈다. 이곳은 현재에도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들이 활동하고 있는데,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의 격차를 줄이기 위해 수석 발레리나를 비롯한 무용 단원들이 직접 빈민 학교로 찾아가 예술 교육을 실시한다. 한편 국내에선 2005년 <문화예술교육 지원법>이 만들어지면서 학교 교육을 중심으로 예술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 성인 대상의 예술 교육은 미비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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