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머니 = 글 지철원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연구위원]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고 한다. 맏이는 맏이대로 막내는 막내대로,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한결같음을 표현한 말이다. 다 큰 자녀도 여전히 보살펴야 할 대상으로 보이지만 일정한 때가 되면 품 안의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도 부모의 몫이다. 한국의 부모는 자식이 결혼을 해야 독립하는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어 자녀 양육 기간은 세계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긴 편이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자녀를 돌보는 기간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2014년 통계청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초혼 연령은 남성 32.6세, 여성 30.0세로 집계되고 있다. 남성뿐만 아니라 여성도 30세를 넘겨 첫 결혼을 하는 것이다. 예전에 서른이 넘어 첫 애를 낳으면 노산(老産)이라 불렀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든다. 결혼이 늦어진 만큼 부모에게 의지하는 기간은 늘었다고 볼 수 있다. 자녀의 초혼 나이가 늦어지는 상황이 불안한 부모들이 자녀들 대신 짝 찾기에 나서는 ‘맘매칭(mom matching)’까지 등장했다고 한다. 공부뿐 아니라 자녀의 연애마저 부모가 노력해야 하는 시대다. 이렇게 해서라도 결혼하고 독립하면 다행이다. 통계청이 2014년 만 13세 이상 전국 3만7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결혼에 대해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다’고 한 응답은 전체의 38.9%로 2008년의 27.7%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아졌다. 결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선택사항이 돼 가고 있다.
치매 노인 봉양, 딸 > 아들 자식이 결혼하겠다고 해도 부모의 역할이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아들과 딸에 대한 차별 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이것이 결혼 비용의 차이로 나타난다. 여성가족부가 2014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들을 장가보낼 때는 부모가 대체로 8000만 원 이상을 지출하고 딸을 시집보낼 때는 6000만 원 이하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모세대 응답자 중 93%가 결혼 비용에 대한 부담감을 상대방 집안에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그중 51.9%는 자녀 결혼 지원금이 ‘부담스러웠다’고 답했다.
반면 통계청의 조사를 보면 부모에게 생활비를 드리겠다는 자녀들의 비율은 점점 줄고 있다. 부모 부양이 가족과 정부, 사회의 공동 책임이라는 응답은 2014년 47.3%로 2008년에 비해 3.7%포인트 늘었다. 이에 비해 가족의 책임이라는 응답은 31.7%로 9%포인트 줄었다. 부모에 대한 부양을 개인이 아닌 사회의 책임으로 여기는 젊은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응답자 중 부모의 생활비를 지원하고 있다는 비율은 49.5%로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세태 때문인지 부모의 생각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 보험연구원이 발표한 2015년 보험 소비자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6%가 ‘자녀에게 주택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특히 20대는 86%, 30대는 67%가 나중에 자식들한테 집을 물려줄 생각이 없다고 답해 젊은 층일수록 집은 자녀에게 물려주는 것이라는 생각이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산을 물려줄 계획이 없는 만큼 자식에게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는 생각도 크지 않았다. 은퇴 후 어떤 종류의 소득이 필요할지를 물었을 때 응답자의 48%가 ‘내가 준비한 노후 생활 자금’이라고 답했고 그다음은 35%가 답변한 ‘재취업을 통한 근로소득’이었다. ‘자식의 경제적 지원’이라는 답은 9%에 불과했다.
믿었던 아들은 정작 노후에 큰 보탬이 안 된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가족 구성원 중에서 치매나 중풍에 걸린 노인을 돌보는 사람은 누구일까.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이 2009년 당시 장기요양보험의 재가 서비스를 이용한 환자의 가족 수발자 1233명을 조사했더니 배우자가 32.8%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 3명 가운데 2명이 여성인 점을 감안하면 남편이 아내의 수발을 책임지고 있는 경우가 가장 많다는 의미다. 배우자 다음으로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21.3%인 딸, 그다음은 20.9%인 며느리로 나타났다. 아들은 19.3%로 꼴찌를 차지했다. 노후 설계는 가족 설계로부터 시작된다는데 우선 딸부터 낳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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