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동의 부티크들
세계적인 도시에는 유명한 다이아몬드 거리들이 있다. 파리 방돔광장, 뉴욕 맨해튼 47번가와 도쿄 우에노 오카치마치가 대표적이다. 서울에는 종로와 강남을 중심으로 보석 시장이 형성돼 있다. 그중에서도 고가 보석인 하이엔드 주얼리는 명품 거리 일번지인 청담동에 밀집해 있다. 신사동에서 청담동으로 이어지는 거리 곳곳에는 숨은 보석상들이 즐비하다.이현주 기자│사진 이승재 기자·한국경제DB
파리 방돔광장에 수백 년 역사와 전통의 보석상들이 있다면, 최근 30년 사이 서울 도심에도 보석상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고가 시장을 겨냥하는 하이 주얼리는 1988년 서울 올림픽 전후 명동과 롯데 1번가를 중심으로 형성됐고, 백화점을 거쳐 점차 고급 주거 지역인 압구정역 인근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0년대 개관한 갤러리아백화점 명품관은 '국내 하이 주얼리 강남 시대'를 여는 계기가 됐다. ‘청담동 명품 거리’가 생기면서, 주변 대로와 골목들로 고급 보석상들이 뻗어 나갔다. 특히 이곳에 결혼 예물 시장이 형성되면서 하이 주얼리도 성장을 거듭했다. 보석 업계에 따르면 압구정역 일대에서 압구정 로데오역 주변으로 약 200여 개의 크고 작은 보석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청담동 하이 주얼리 시장은 명실상부 국내 자산가들의 보석 투자 일번지로 꼽힌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지금 이곳은 비밀스러운 ‘그들만의 리그’에서, 보다 대중적이고 ‘양성화된 시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하이 주얼리, 명동에서 청담동으로
사실상 하이 주얼리 트렌드를 이끈 건 해외 럭셔리 브랜드들이었다. 백화점 명당 자리를 차지하는 이들 브랜드는 유럽 왕실의 보석, 나폴레옹이 사랑한 보석과 같은 역사와 전통을 강조한 마케팅으로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
청담동의 보석상들은 이에 대비되는 특징을 갖는다. 대대적인 광고와 마케팅을 하는 해외 럭셔리 브랜드와 달리 소리 없이 ‘프라이빗’하게 영업해 온 게 특징이다. 상대적으로 브랜드 가치가 떨어지는 국내 보석상들이 특별한 광고나 홍보도 없이 청담동을 중심으로 크게 성장한 배경은 뭘까.
먼저 ‘자산 가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자산 배분과 재테크 차원에서 보석을 투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자산가들이 청담동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보석은 증여세를 피하면서 대를 이어 물려줄 수 있어 상속·증여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국내 보석상들은 해외 럭셔리 브랜드에 비해 ‘가격경쟁력’을 갖는다.
국내 유일의 주얼리산업연구소이자 공익법인인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의 온현성 연구소장은 “국내 브랜드의 주얼리는 최종 소비자가에 마케팅 비용이 많이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갖는다”고 말했다.
김종목 한국귀금속보석단체장협의회 회장은 “안전자산인 금 투자를 하는 것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금은 보유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진짜 부자들은 일찍이 보석에 투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례로 다이아몬드의 경우 보관과 이동이 용이하고 희소성과 환금성의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김 회장은 “최근 10년 사이 1캐럿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약 두 배 뛰었다”며 “자연이 만든 상품으로 전 세계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오래 보유하면 가격이 오르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자산가들의 투자 수단으로 활용된다”고 말했다.
또 최근 해외 유명 패션 하우스에서도 하이 주얼리 컬렉션을 내놓는 추세로, 젊은 세대에게는 럭셔리 브랜드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트렌드를 좆을 수 있는 방법이다. 이처럼 자산 가치와 문화 가치의 교집합에서, 청담동 시장은 성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값비싼 보석일수록 그들만의 리그를 유지해 온 데는 속사정이 있다. 우선 고객 입장에서는 비밀 보장을 원한다. 보석감정원 출신으로 3년 전 소규모 보석상을 연 A씨는 “억대 이상의 고가 보석을 샀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하는 자산가는 없다”며 “알음알음 소개를 통해 운영되고 있고 네트워크로 개인 딜러들과 접촉하는 편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 보니 굳이 대로변에 소매점을 열 필요가 없다. A씨는 “건물의 지하나 빌딩 4~5층에 작게 차려 놓고 간판도 거의 보이지 않는 곳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보안상의 문제 때문에라도 정보를 잘 노출하지 않는 편이다.
청담동 하이 주얼리 시장은 통계가 잘 잡히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세금을 피해 음성적으로 시장을 형성하면서다. 유럽, 미국, 홍콩 등 해외에서 합법적인 거래가 가능한 투자 상품으로 자리매김한 데 비해 국내에서는 제도적으로 오랜 기간 1990년까지 보석이 수입 금지 품목이자 대출 제한 업종으로 묶여 있었다. 사치제로 분류돼 개별소비세 26%와 부가가치세 10%가 부가됐다. 이는 국내 보석 산업 발전을 막는 장벽으로 지적돼 왔다.
제도 개선을 통한 산업 양성화는 업계의 숙원 사업이었다. 그런데 최근 작은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올해 1월 1일부터 26%의 개별소비세 과세 기준 가격이 200만 원에서 500만 원으로 상향 조정되고, 매 공정 단계마다 부과되는 데서 반출 시 한 번 과세 과세로 변경된 것. 김종목 회장은 “홍콩, 유럽, 미국 등이 세제 혜택으로 보석 강국으로 커가는 동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보석에 개별소비세를 매긴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며 “국내 보석 시장이 10조 원을 육박하고 세계적인 경쟁력이 충분하다는 점에서 산업으로 키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변화는 과거 최종 제품 단계까지 개별소비세를 과세하던 것과 비교하면 작지만 의미 있는 결과로 해석된다. 무엇보다 보석을 '사치의 대상'에서 '투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석 업계는 반색한다. 이미 한 발 앞서 독자적인 시장을 키워온 청담동 하이 주얼리 대표 주자들은 한국을 넘어 세계로 뻗어갈 '한국의 까르띠에' 탄생에도 도전장을 내민다.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금관의 후예들’
국내 하이 주얼러들이 세계가 주목하는 기술력을 갖고 있는 점도 청담동 보석 시장의 성장을 견인했다. 한국의 보석 세공 기술은 신라 시대 금관을 만들던 ‘금관의 후예’들로 불릴 정도로 손꼽힌다. 전 세계 국가대표 기술인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기능올림픽 대회에서 주얼리 부문 최고 자리는 단연 한국의 차지다. 2년마다 열리는 이 대회에서 내로라하는 유럽의 세공 장인들을 제치고 금메달을 휩쓸고 있다. 역대 총 16번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해 세계 최고 세공 기술력을 인정받고 있다. 보석 강국으로 알려진 스위스, 일본보다 앞선 성적이다.
일본 주얼리 시장에 진출한 한국의 보석 기술자들은 한때 8000명을 육박했다. 또 세계 럭셔리 주얼리 하우스인 티파니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부문의 러브콜을 보내기도 했다. 모두 보석 부문 기술 수출에 해당한다. 30여 년 짧은 역사를 가진 한국 보석업계가 올린 쾌거라 할 수 있다.
명품의 가치는 ‘장인정신’에서 출발한다. 장인정신을 만드는 이들이 유럽의 '마이스터'라면 한국에는 '명장'들이 있다. 명장은 대통령의 훈장을 받는 기술 장인들로, 지금까지 귀금속 가공 분야에서 총 12명의 명장이 배출됐다. 청담동 하이 주얼리의 한 축은 이와 같은 기술 명장들이다.
김종목 회장은 명장 1세대이자 세 번째 명장으로, 대로변 1층 건물에 자신의 이름을 건 보석상을 운영하고 있다. 매장 내 작업실이 있어 보석 세공 과정을 직접 눈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서 가장 비싼 보석은 다름아닌 루비 반지다. 김 회장은 “일반적으로 다이아몬드가 루비보다 비싼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크기가 클수록 루비의 가격은 다이아몬드보다 훨씬 더 고가에 거래된다”고 설명했다. 그만큼 희소하기 때문이다.
유럽의 아틀리에와 같은 공방을 운영하며 작업에 몰두하는 명장들도 있다. 국내 최초의 명장인 진용석 명장은 이순용 명장 등과 함께 압구정동에서 공방을 꾸리고 있다. 진 명장은 “명장이 만든 보석들에는 작품명이 붙고, 일 년에 한 번씩 명장 전시회도 열고 있다”고 소개했다. 그의 고객 중에는 외국인도 적지 않다. 그가 만든 최고가 보석도 일본인이 보유하고 있다. '보석 세공의 달인'으로 입소문을 타며 멀리서도 고객들이 찾아 오고 있다고 한다. 진 명장은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보석을 선호하는 고객들이 있어 주로 맞춤 제작을 한다”고 말했다.
청담동 하이 주얼리 시장에서 오랜 기간 자리를 지키고 있는 터줏대감들은 이와 같이 기술을 앞세운 명장들, 그리고 보석에 '한국의 멋'을 담는 '주얼리 디자이너'들이다. 박은숙 한국귀금속보석디자인협회장은 “15년 전부터 국제 공모전에서 스타 디자이너들이 매해 탄생하고 있고, 국제 공모전에서 지난해에는 에클라바치의 임성옥 대표가, 올해는 림죠이엘리의 채림 대표가 대상을 받았다”며 “경쟁력 있는 한국형 하이 주얼리 브랜드들이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표 주얼리 디자이너들은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가한 영부인들을 위한 보석을 만들어 성황리에 전시회를 마치기도 했다.
한편, 보석 투자를 할 때는 다이아몬드와 유색 보석 중 루비, 사파이어, 에메랄드가 투자용으로 적합하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무엇보다 10년 이상 장기 투자할 때 자산 가치를 높일 수 있다.
대기업 보석 투자 이어질까
최근 신세계백화점이 하이 주얼리 시장 진출 의지를 밝힌 것도 의미 있는 변화로 해석된다. 과거 LG, 롯데, 코오롱 등의 대기업 군에서 보석 사업 진출을 꾀한 적이 있지만 사치재 인식과 세금 문제로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다. 현재 효성에서 해외 럭셔리 브랜드 ‘드비어스’의 라이선스 사업권을 갖고 있는 게 전부다. 그러나 세금 개정을 시작으로 신세계에서 고가 보석 시장에 진출하면 향후 기업 투자도 활발해질 것이라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온현성 월곡주얼리산업연구소장은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수입가 500만 원을 기준으로 하면, 판매가는 1500만 원이 넘기 때문에 사업성이 충분하다”며 “주얼리 브랜드의 비즈니스 모델을 잘 알고 있는 백화점 유통, 패션 분야에서 오랫동안 스터디를 해 왔고, 앞으로 진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사진 설명
1. 청담동 일대 주요 보석상
2. ‘김종목 주얼리’ 전경.
3. 루비 반지는 단 하나도 똑같은 색이 없다.
4. 매장 내 위치한 보석 세공 작업실.
4. ‘자비시 주얼리’의 전경.
5. ‘뮈샤’의 2층 전경.
6. ‘에클라바치’의 전경.
7. 임성옥 작가의 ‘힐조화’.
8. 오승희 작가의 ‘위풍당당’
9. 정순희 작가의 ‘색시’.
10. 김미영 작가의 '추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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