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섭 소장의 바로 이 작가

‘BR-183’, Oil on Linen. 150cm×150cm, 2013년
‘BR-183’, Oil on Linen. 150cm×150cm, 2013년
미술품을 수집하는 사람은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할까? 개인적 차이가 있겠지만, 보통은 ‘남과 다른 그 무엇’을 발견했을 때 가장 큰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게 된다. 그림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기능이나 보편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공산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림은 제각각 다른 개인적인 감성까지 충족시켜주는 묘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그 생명력을 남들보다 일찍 발견해내는 것이 컬렉션의 묘미이자 관건이다. 국제무대에서 큰 주목을 받고 있는 이세현(49) 작가의 영국 유학시절 에피소드도 그 예다.

“한국 작가들의 작업들을 많이 봐 왔는데, 아주 우수하고 완성도도 높았다. 문제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아 나를 그렇게 열광시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당신의 작품은 완전히 처음 보는 형식이다. 그 내용도 잘 이해되면서 무엇을 얘기하려는지도 명확한 점이 좋다.”

무명이었던 이세현 작가는 영국 유학시절 어느 날, 세계적으로 저명한 컬렉터인 스위스의 울리 지그(Uli Sigg)가 그의 작업실을 방문한다는 소식에 기쁘면서도 의아했다. 결국 이 작가는 지그에게 “왜 나처럼 무명작가를 만나기 위해 직접 런던까지 온 것인가. 나보다 더 유명한 한국 작가도 많을 텐데, 왜 하필 내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처럼 작가는 그만의 ‘남다름’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을 흔히 독창성이나 변별력이라고 부른다.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시킬 수 있다는 것은 모든 작가들이 바라는 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만큼 안성맞춤인 경우도 드물다. 그의 ‘붉은 산수’ 그림을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한다. 색감, 조형성, 내용 등 메시지의 전달력을 극대화시키는 요소를 두루 갖췄다. 여기에 분단의 아픔과 자연의 아름다움, 현실과 이상, 개인의 추억과 사회적 역사 등의 감정들이 한 화면에서 만나 그만의 방식으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artist]동서양의 감성을 매료시킨  이세현의 ‘붉은 산수’
흔히 작품의 생명력은 동시대적 감성이 우러날 때 제대로 발휘된다. 박수근의 ‘빨래터’가 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겐 더없이 큰 위안을 선사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 작가도 흔해 보이는 풍경 그림 같지만, 자신과 교감이나 정서적 울림이 없는 풍경, 스토리는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예쁘게만 멋 부리는 풍경화에 빠지지 않도록 수없이 경계하고 채근한다. 또한 규칙적이고 꾸준함을 유지하는 데 집중한다. 스스로 전업작가의 길을 택한 이상, 매일 빠짐없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다. 실제 그의 작업실에선 쉼 없이 작업이 이어진다. 언제 방문해도 캔버스 표면을 긁고 있는 색연필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

이 작가의 남다름은 이미 유학시절부터 발휘된다. 당시 영국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한국 작가의 역량을 알리고자 기획했던 ‘4482’라는 전시가 대표적이다. 2007년 10명의 작가들이 개최한 ‘더 오픈(The Open)’이라는 전시를 모태로 태동한 ‘4482’전은 국제 통화에 쓰이는 영국과 한국의 국가번호를 조합한 것이다. 그만큼 전시 제목에서 타국생활의 애환까지 전해진다. 이 전시를 통해 그동안 100여 명의 한국 작가들이 영국과 유럽 미술계에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혼자가 아닌 항상 ‘더불어’라는 마음가짐은 오늘의 이세현을 지탱하는 힘이 돼준다. 물론 ‘공유하고 상생할 수 있는 사회풍경’을 담아내는 그의 그림과도 통한다.

이 작가의 경우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경우다. 젊은 작가로서 유럽의 현지 갤러리에서 초대전을 받긴 쉽지 않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 유수의 갤러리에서 모두 ‘솔드 아웃(sold out)시킨 한국 작가’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물론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국제무대에서의 입지가 탄탄하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특별전에 이어, 올해 1월에도 홍콩 펄 램갤러리에서 열린 기획전 ‘동시대 산수화(Contemporary Sansuhwa)’의 메인 작가로 초대됐다. 펄램갤러리의 대표인 펄 램은 홍콩 사교계의 여왕으로 불리며, 홍콩 부동산 재벌 고(故) 린바이신(林百欣) 회장의 딸이기도 하다. 그만큼 아시아의 큰손으로 통한다.

또한 이번 전시는 스위스 취리히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큐레이터 미키 윅 김(Miki Wick Kim)이 기획한 것이다. 한국의 현대 산수화를 집중 조명하면서 우리 고유의 명칭인 ‘산수화 (Sansuhwa)’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최근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는 ‘단색화(Dansaekhwa)’처럼, 펄램갤러리의 첫 한국 작가 기획전에서 ‘한국적 미학이나 현대미술 코드를 인정받은 케이스’로 기록될 것이다. 2006년 홍콩에 오픈한 갤러리는 현재 상하이와 싱가포르까지 4개가 운영되며, 전시는 3월 1일까지 열리고 있다.

이처럼 이 작가의 ‘붉은 산수’ 작품 속에는 보는 이를 매료시키는 삶의 애환과 아름다움이 동시에 담겨 있다. 그렇다고 작품 속의 ‘붉은색’이 뭔가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붉은 색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여러 문화 속에서 다양한 상징성과 의미를 갖고 있다. 그는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운 붉은색에 대한 해석을 감상자의 몫으로 남기고 있다. 어쩌면 예술이란 속성을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인 특성’에 주목한다고 볼 수 있겠다. 모든 풍경에는 인간의 삶과 관계망이 스며 있듯, 누군가 살았거나 살고 있는 그 풍경 속에는 꼭 한국인이 아니더라도 공유할 수 있는 공감대가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가의 풍경 그림은 ‘실존에 대한 고민’의 현재 진행형이다.

실제로 영국에서 돌아온 이세현의 눈에 비친 고국의 모습은 어땠을까? 상식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들의 연속이었다. 지난 1980년대엔 가장 근본적인 ‘인간다움의 존엄성’을 지켜내고자 온갖 고민을 온몸으로 함께했다면, 수십 년이 지난 오늘도 세월호 사건처럼 가장 ‘기본이 허물어진 사회’를 목격하게 된다. 이 작가의 시점은 그런 일련의 ‘상식에서 벗어난 사회상’을 놓치지 않는다. 우리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조리함을 현실의 인물로 주인공 삼아 작품 속에 담았다. 그것은 특정한 정치적인 목소리가 아니라 삶과 죽음 혹은 본질에 대한 정직한 물음이었다.

결국 이 작가가 포착한 유토피아의 모습은 유년시절 아름다웠던 자연의 모습에서 출발하지만, 분단의 비극처럼 우리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는 현실적인 과제들과 맞닿아 있다. 이처럼 다양한 관점과 문화를 이해하는 그만의 표현 방식은 동서양의 감성이나 조형 어법을 넘어선다. 굳이 예술의 저항정신을 앞세우지 않더라도, 우리 내면에 잠들어 있던 양심의 소리를 자극하는 날선 부드러움이 담겼다. 인간의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필수적인 관심사(아름다움, 행복, 슬픔, 고통, 삶과 죽음 등)에 대한 질문을 건네고 있다.

주목할 만한 작가를 판단하는 기준 중에 ‘작가적 역량’과 ‘중장기적인 발전 가능성’을 살피라는 말이 있다. 이 작가는 최근 ‘소리 없이 강한’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해 연말부터 중국 본토의 베이징 전시와 파주의 미메시스아트뮤지엄의 전시를 마치고, 홍콩의 펄램갤러리 전시를 진행 중이다. 올해는 고향의 거제미술관, 부산비엔날레 전시를 비롯해 노르웨이의 미술관과 독일 쾰른에서의 개인전도 앞두고 있다. 또한 그의 작품을 소장한 곳 역시 뱅크오브아메리카(BoA),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민생미술관(상하이), 제임스리컬렉션(베이징), 울리지크컬렉션(취리히), 마이크로소프트 아트컬렉션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들을 망라한다. 이런 점들은 이 작가의 앞으로가 더 궁금한 이유다. 참고로 그의 작품 가격은 ‘150×150cm’ 전시가 기준 4300만 원 정도다.

김윤섭은…
미술평론가로서 명지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및 서울시립미술관 작품가격 평가위원, (사)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전문위원, 대한적십자사 문화나눔프로젝트 아트디렉터, 동국대 평생교육원 주임교수 및 서울시 공공미술 심의위원,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등으로 활동 중이다.


김윤섭 미술평론가·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 사진 서범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