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베르테르들에게는 헌신과 열정으로 가득 채워진 ‘슬픔의 성전’이었을지도 모른다.
1961년 서울 구석구석에서 ‘노란 샤스의 사나이’가 울려 퍼졌다. 1990년대처럼 손수레 레코드 가게가 있었던 시절은 아니었지만, 라디오, 다방, 그리고 거리 곳곳에서 흥얼흥얼 울려 퍼졌다.
누구는 이 노래가 서구적 재즈도 아니고 ‘국산 가요’도 아니었지만 그 못지않게 ‘중년신사까지 코가 빠지도록’ 불러댔다고 떠올렸다. 그런데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바로 이 ‘노란 샤스’의 정체다. 전쟁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노란 샤스’는 실상 극장에서나 봄직한 귀한 색상이었다.
한 신문에서는 이 ‘노란 샤스’의 문화적 기원을 따지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유럽 전역에 ‘베르테르 효과’까지 낳게 한 바로 베르테르의 대표적 복장이 ‘노란 조끼’를 입은 모습이기 때문이다. 젊음의 순전한 도취와 몰입을 보여주는 노란 조끼가 어쩌면 노란 샤스의 기원이 아닐까 하는 억지스러운 추측에도, 분명한 것은 ‘노란’ 샤스 또는 조끼 입은 청년이 지닌 신비로운 정체였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식민지 시기부터 줄곧 인구에 회자됐다. 베르테르와 롯테는 많은 이들에게 연인의 이름이었다. 1940년대 일본으로 건너간 한 고학생이 바로 이 롯테(charlotte)에 빠져 ‘롯데’를 공식적인 이름으로 세우게 된 것처럼 ‘베르테르’와 ‘롯테’는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기억하는 문화적 원천이었다.
그러나 알려진 것처럼 이 소설이 그렇게 달달한 소설만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사랑과 대적하며 죽음으로 달려간 소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수한 젊은이들이 ‘베르테르’를 자처해서 ‘금서’로까지 지정된 소설이 아니던가. 물론 소설의 면면만 놓고 보면 왜 이토록 강렬한지 조금은 고개가 갸우뚱거려질 수도 있다. 약혼자가 있는 ‘샤를 롯테’를 좋아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생일대의 문제를 바로 롯테를 놓고 결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 요령부득의 문제를 살펴보려면 베르테르가 고백하고 있는 일기를 찬찬히 살펴야 한다. 1771년 5월 4일, 베르테르의 편지가 시작된 바로 첫날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떠나오게 되어서 기쁘다’고 쓰고 있다. 베르테르는 너무나 ‘고독’한데, 이곳에 내려와서 마음을 따사롭게 데워줄 ‘청춘’을 찾았다고 말한다.
베르테르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고독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세상에 눈을 뜬 이 청년이 본 1770년대 독일 사회의 모습 때문이다.
세상의 감옥에서 사랑을 만나다
지체 높은 사람들은 하층민을 가까이 하면 손해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로는 겸손한 체 하지만 실은 불쌍한 사람들의 불쌍함을 더 자극하는 짓궂은 자들의 세상, 관례에서 벗어나면 무조건 질색하면서 겉만 번지르르한 채로 출세욕에 사로잡혀 서로 경계하는 세상, 또 귀족 집안 출신이라며 고향 자랑을 하면서 신분차별로 자유를 속박하는 한심하고 천박한 자들의 세상, 베르테르에게 이런 사회는 환멸스럽기 짝이 없다.
이 세상 속에서 같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에게 이 세상은 ‘감옥’ 같았다.
그런데 이 낯선 고장에 와서 어느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고백한다. 하루하루 소박하고 생기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고 접하면서 햇빛과 정원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실은 한 여성을 만난 것이 중요한 원인이었다. 이 여성은 교양 있는 척하지 않으며 자기감정에 충실하다. 또 이 여성은 춤추는 것을 좋아해서 마음이 심란할 때에는 춤곡을 치고 나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진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녀가 춤출 때 마음과 영혼이 합치되는 그런 느낌을 받기도 한다.
이 여성의 이름이 바로 샤를 롯테다. 사실 롯테는 이 마을에서 누구라도 함께하고 싶어 하는 그런 사람이다.
베르테르도 이 롯테에게 사로잡힌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모든 욕망이 잠잠해지고, 고통과 혼란이 사그라지는 느낌이 든다. 오직 삶의 기쁨이 그녀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하루 종일 오로지 그녀를 만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다. 그 소망이 다른 모든 것을 집어 삼킨다’.
그럼에도 약혼자가 있는 롯테에게 더 이상 다가갈 수 없기에 마음을 접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굳세게 마음을 먹고 타국의 서기관이라는 직함으로 세상에 나온다. 그러나 다시 만난 세상에서 그가 만난 것은 ‘그렇고 그런 부류’들의 구별 짓기 행태뿐이다.
소리 내지 않은 채 진행되는 차별과 따돌림. 그리고 이를 확산시키는 스캔들과 뒷담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것일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런 곳에서 베르테르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에 힘겨워하면서 결국 다시 롯테가 살고 있는 그 마을로 간다.
베르테르가 흔쾌히 손 내밀 수 있고 가고 싶은 세계는 ‘롯테’가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그가 마음 붙일 곳은 롯테뿐인 것처럼 보인다. 분명한 것은 그가 자신을 내던지며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자신의 열정을 드러내고 싶다는 강렬한 생각이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메시지다.
1960년대 노란 조끼를 입은 사나이, 베르테르는 대한민국에서도 그 위용이 대단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태일조차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구절구절을, 그리고 그 편지의 형식을 제 삶의 비의를 담아내는 데 갖다 썼을 정도였는데 말이다.
애정과 열정이 실은 헌신하고 싶은 세계 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수많은 청년들이 베르테르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젊다는 것’을 지워내면 이 이야기는 그 힘을 잃을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이 소설에서 읽어야 하는 것은 젊은이들의 헌신과 그 열정일 것이다. 이 헌신을 받아줄 이가 단지 롯테만은 아닐 것이다.
박숙자 경기대 교양학부 조교수 / 일러스트 김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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